[BOOK世通, 제주 읽기] (232) 양경인,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은행나무, 2022.

양경인,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은행나무, 2022.
양경인,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은행나무, 2022.

1.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뭇 생명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남녘 바다 건너 불어온 봄바람은 제주의 4월을 휩싸고 돈다. 그리고 제주의 봄은 4‧3과 함께 살아간다. 그동안 4‧3에 대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기억 투쟁을 벌여왔던가. 맹목적 반공주의 및 극우 민족주의를 비롯한 분단 기득권 세력의 4‧3에 대한 편향적 정치역사에 맞서, 4‧3은 이제 대한민국의 공식기억(official memory)으로 제도적 복권을 이룩하였다. 4‧3국가추념일 제정(2014), 4‧3특별법 전면 개정안 통과(2021), 그리고 제주 4‧3생존수형인에 대한 무죄 판결(2021) 등 대한민국의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4‧3사건’은 그 정치적 혐오와 배타성을 일소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4‧3에 대한 역사적 진실, 특히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4‧3항쟁에 동참한 제주 민중의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탐구가 완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사안은 4‧3이 제도적 복권을 이룩한 이후 이에 자족할 게 아니라 4‧3이 꿈꿨던 세상을 향한 한층 래디컬하고 진전된 탐구를 요구한다.

2.

이와 관련하여, 양경인의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이후 『선창』으로 약칭)는 4‧3항쟁에 직접 참여한 여성운동가 김진언의 삶을 집중 조명하고 있는 논픽션으로, 방금 얘기했듯이 4‧3의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진전된 탐구와 그 지속성을 위해 아주 귀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 『선창』은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으로서 논픽션의 특성상 김진언의 생애에 관한 객관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4‧3의 역사적 진실 및 그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탐구와 글쓰기는 자칫 안주할 수 있는 4‧3 관련 연구와 문학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과를 한층 주목하게 된다. 

무엇보다 『선창』에서 주목할 부분은 김진언을 비롯하여 “가부장적 봉건제도 아래 살았던 여성들이 해방 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자기 해방을 찾아가려고 했던 이야기”(6쪽)가 매우 구체적 실감으로 자연스레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미군정기 여성운동이 통일운동과 맞물리면서 수렴되는 과정을”(11쪽), 김진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여성운동가의 삶과 함께 증언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선창』을 통해 여성운동과 통일운동이 제주에서 어떻게 맞물리면서 4‧3항쟁의 또 다른 역사적 진실과 해방의 상상력이 펼쳐갔는지 그 과정을 공부하게 된 것은 큰 소득이다. 아직 필자의 과문인지 모르지만, 4‧3에 대한 여성 구술 생애사 자료의 대부분이 전대미문의 대참사, 즉 4‧3수난사에 초점을 둠으로써 당시 국가폭력이 지닌 부당성과 악마성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4‧3희생자의 약자로서 무고하게 죽은 원혼을 칭원(稱冤)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가 하면, 가까스로 살아난 자의 초인적 힘으로 자신과 가정을 지탱시킨 가모장(家母長)으로서 제주 여성의 숭고성을 주목했다면, 양경인의 『선창』은 4‧3항쟁에 직접 참여한 여성운동가의 활동의 면모뿐만 아니라 여성운동가의 주체적 시선으로 4‧3항쟁 전후의 양상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선창』이 여성의 시선에서 4‧3수난사와 또 다른 4‧3항쟁사의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우리에게 내면화된 남성중심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선창』의 일독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3.

그래서, 『선창』의 김진언 여성운동가가 여맹 활동에 대해 보였던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선을 간과해서 곤란하다.  

당시 여맹 활동은 거의 당을 위한 심부름꾼 역할이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여성 사업을 수행하도록 맡긴 게 아니고 당에서 부녀부장을 놓고 뒤에서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녀부장은 서쪽 사람인데 다른 곳에 있다가 연락할 때만 오니 이름도 몰랐다. 나는 우리끼리 의논하여 사업을 진행할 수 없어 답답했다. 우리가 무식해서 그럴 수밖에 없구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남존여비라서 그렇구나 하다가 와산에 가서 일을 하는데 사태는 자꾸 불리하지, 연락은 계속 지체되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의 체계가 왜 이 모양일까 의심이 생겼다. 부녀부장이 연락도 기관지도 가져오고 글로 하는 것도 모두 남자들이 했다. 우린 구두로 받아서 실전으로 일을 했던 것이다.(44-45쪽)

이렇게 김진언은 해방공간에서 여맹 활동이 남성중심주의적 당의 명령 체계에 따라 이뤄지는 것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김진언의 이 구술 증언만으로 당시 제주의 여맹 활동이 성 불평등과 당의 경직성에 매몰되었으므로, 여성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위 증언의 진실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다. 위 인용문에 대해 양경인이 각주를 통해 부연했듯이, “여성운동이 남성 주도적인 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여 여성운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여성대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나 제공하는가”(45쪽)의 여부다. 그런데, 정작 김진언의 위 증언에서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남성 주도의 당의 명령 체계에 따른 여맹 활동이 민중의 구체적 현실에 기민하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현장에 대한 객관적 정세 파악을 하면서 여맹 활동에 정진했다는 점이다. 기실, 김진언의 이러한 여성운동가로서 주체적이고 비판적 시선은 4‧3항쟁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국전쟁 도중 북한에서 여맹 활동을 하면서 경험한 북한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서도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무계급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싸우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계급이 눈에 훤히 보인다. 간부들과 일반 인민들의 차이. 간부들은 이 전쟁을 이기려면 계급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면 부자와 가난이 없는, 남녀차별이 없는 평등사회가 과연 올 건가…….’(89쪽)

김진언이 북한에서 목도한 것은 무계급사회가 아니라 간부와 일반 인민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 차이’였다. 더욱이 “간부들은 이 전쟁을 이기려면 계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라는 김진언의 증언에는 분단 사회의 질곡이 초래한 온갖 모순과 억압이 한국전쟁 이후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모종의 예지가 녹아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개풍군에서 일하며 북한 인민들의 생활이 제주도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데 놀랐”(이하 87쪽)을 뿐만 아니라 “북한은 수력자원도 풍부하고 지하자원도 많은 곳이라고 당에서 자랑했는데 정작 인민의 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방 하나에 불을 때서 며느리고 시아버지고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 커다란 이불 한 채로 같이 자는 집이 많았”으며, “제주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한 방에 자는 일은 없었다.”는 그 당시 객관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4.

이렇듯이, 『선창』에서 김진언은 여성운동가로서 해방공간의 제주와 한국전쟁 도중 북한에서 여맹 활동에 정진한바, 여성으로서 주체적이고 비판적 시선으로 당시 객관적 정세를 파악해온 역사의 산 증언자이다. 때문에 김진언의 구술 생애사 『선창』은 한 개인의 역사적 삶을 주목하되, 그 삶이 4‧3항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간 여성운동가의 해방의 서사를 구축하듯, 역사와 문학에서 자칫 소홀히 여긴 ‘증언서사’로서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선창』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4‧3 74주년을 맞이하여 김진언의 구술 생애에서 미처 듣지 못한 말은 아래의 시구절이 아닐는지……. 김진언의 구술 생애사 속 진실과 4‧3의 정명(正名)을 새긴 백비(白碑)를 세우는 일이 다르지 않으므로.

어떠난
써넝헌디
눅졍
내불어시니게

오꼿
일려세와불자녕
— 강덕환의 「백비」(『섬에선 바람도 벗이다』, 삶창, 2021) 전문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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