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3) 홍경자 어르신 이야기② 제주 첫 여성 어촌계장 해녀의 삶

홍경자(73) 어르신이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한 것은 전화교환수로 일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

어르신은 상군이었던 분을 새어머니로 맞이하면서 바다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홍경자 어르신 가족들도 해녀 가족으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새어머니를 따라다니다 자연스럽게 애기해녀가 된 어르신이 16살이 되던 해, 첫 출가물질을 다녀오기로 결심한다.

몇 가지 생필품만 보따리에 싸서 아리랑호에 몸을 실었다. 부산항에 도착해 차를 타고 경주시 감포로 갔다. 출가물질을 떠날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무 옷이 없었을 터라 물소중이와 물적삼만 입고 낯선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미역이 생각보다 돈을 잘 쳐 주었다. 그곳에서 주로 미역, 천초, 전복, 도박, 밤생이(말똥성게)등을 주로 채취했다.

육지로 원정물질을 간다고 했을 때 외할머니께서 화물로 보리쌀 10말, 조 2말, 메주 3덩어리를 보내주셨다. 타지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심심하게 달래 주는 것들은 고향의 음식이었다. 함께 물질하는 동료들 네 명이 방 하나 작은 부엌 하나가 딸린 초가집 하나를 빌려 함께 살았다. 제주에서 올라온 메주로 장을 담아 그 장으로 배추된장국을 끓였다. 여기에 보리밥을 지어 국과 함께 먹으면 비록 내 몸은 타지에 있지만 뜨끈한 된장국을 목 아래로 넘긴 내 마음은 제주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제주에서 보내온 음식들이 있어서 그나마 외로움과 설움을 달랠 수 있었지. 막상 여기 와서 보니까 여기 사람들 먹는 게 제주사람들보다 못했던 거라. 거기 사람들 밥이랜 한 거 보면 고구마 쪄서 고구마순에 김치. 그걸 밥이라고 먹더라고.”

육지에 와서 가뜩이나 서러운데 동네 남자 한 명이 유독 그렇게 눈엣가시일 정도로 고향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가이네가 ‘야! 너네는 한라산에서 공 차면 바다에 빠진다며?’ 놀리는 거라. 제주도를 얼마나 하시봤으면 그렇게 이야기를 할까, 얼마나 화가 나는지. 우리보다 먹는 것도 못 먹으면서. 그런 하대를 받을 때가 가장 서러웠지.”

그 당시 물질을 쉬면 하숙했던 주인집 일손을 좀 도왔다. 한 명은 밥 당번, 또 한 명은 설거지 당번 이런 식으로 주인집 일을 하면서 하숙비를 보탰다고 한다. 홍경자 어르신이 맡은 당번은 물 당번과 애기업개였다. 그 지역도 제주처럼 물이 귀했던 터라 물을 길어오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9남매 중 맏이였던 어르신에게는 물 긷기나 아기 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르신은 7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물을 길었고, 또, 어머니가 물질을 가시면 혼자서 늘 물을 길어다 물항아리를 채웠다. 젖먹이를 등에 업고 불턱에서 쉬고 계신 어머니에게 가는 것도 늘 소녀 홍경자의 몫이었다. 

홍경자 어르신은 어린 아기를 봐야 했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과 달리 주인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주인집의 며느리가 홍경자 어르신 밥까지 늘 같이 챙겨주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때보다 몸은 조금 편했다. 하지만 자꾸 그리움이 밀려왔다. 제주의 풍경도 물맛도 그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어르신이 업고 키운 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인형을 업고 놀 나이에 아기허벅을 지고 아침마다 물을 길어오셨다는 어르신의 이야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어르신의 어머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色色
인형을 업고 놀 나이에 아기허벅을 지고 아침마다 물을 길어오셨다는 어르신의 이야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어르신의 어머님 얼굴이 그려졌습니다. ⓒ色色

하루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누우면 집 생각과 동생들 생각에 눈앞이 흐려졌다. 제주의 추위와는 또 다른 경북의 살을 에는 추위는 특히, 무명천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고 작업하는 해녀들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바다 아래로 들어간 후 불을 쬐고 다시 들어가야만 했다. 제주처럼 불턱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갈밭에 불을 지폈었다고 한다. 그래도 인근 해병대 초소에서 가끔 기름을 부어주어 더 따뜻하게 불을 보태주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곳 중대장이 서귀포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경북으로 올라가 7개월 출가물질을 하니 홍경자 어르신의 손에는 13만 원이 모였다. 지금으로 치면 약 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어르신 나이 16살에 올라가 번 돈이었다. 그 돈으로 홍경자 어르신의 집에는 소 한 마리가 들어왔다.

주로 미역과 천초로 돈을 마련하셨다. 그 당시 구역별로 바다에서 낚아 올린 것들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미역이나 천초를 갖고 올라와 바닥에 싹 널어두어 마르도록 하는데 그렇게만 하면 해녀들의 역할을 끝이 나고, 가격을 흥정해서 돈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판매 대금은 해녀가 7, 그 중개인이 3의 비율로 가져갔다.

말린 미역을 잘 모은다고 해도 상품이 되지 않는 작은 조각들이 남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해녀들이 따로 모아둔다. 천초도 한 망아리 싹 널어두고 그물에 붙어 잘 안 떼어지는 작은 조각들이 생기는데 그것 역시 해녀들의 몫이다. 그 조각들을 가지고 집에 와서 또 잘 손질해 두면 저 산골짜기에서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팥 넣고 납작하게 만든 시루떡이나 도토리떡같은 것들을 해 오면 돈과 함께 미역과 천초를 바꾼다. 동네 엿장수도 집으로 찾아와 천초 한주먹과 엿 한 주먹을 맞바꿨다. 그렇게 다른 마을의 음식을 서로 교환해서 먹는 재미도 좋았다고 한다.

당시 몇몇 선배들은 올라간 김에 그 지역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그 지역에 정착했다. 하지만 물질을 더 하고 싶지 않았던 홍경자 어르신은 다시 제주로 내려왔다. 외로운 것도 외로웠지만 제주사람들을 천하게 보는 육지사람들의 시선도 싫었다.

그 이후 부산으로 건너가 전화교환수 일을 하였지만 안타까운 화재 때문에 제주에 다시 내려오게 된다. 다시 제주로 내려온 어르신에게 물질이 아닌 다른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고작 열아홉 살이었지만, 그 당시 사회 분위기상 곧 ‘혼기가 찬 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이기도 했다. 또, 시집을 가려면 스스로 돈을 마련해서 가야 했다. 때문에 다시 바다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마침, 육지에 출가물질을 갔다가 거기에서 결혼해 정착한 이모가 해녀를 구한다고 제주로 내려왔다. 그 이모의 남편은 교사였지만 여수에 바다를 사서 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수에서 전복, 해삼, 전초, 도박, 미역 등으로 채취하며 3년 정도 돈을 벌어 온 후, 6년 동안 연애를 했던 초등학교 동창과 식을 올렸다. 어느 날인가 눈에 들어왔던 남자아이가 동네 초등학교 동창 친구였다. 함께 바닷가에서 헤엄치고 놀았던 소꿉친구였단다. 

“어느 날엔가 물꾸럭(문어)을 잡고 뭍으로 올라왔는데 ‘휙’하고 휘파람을 부는 거라. 가이는 절대 이름을 안 불러. 늘 그렇게 휘파람을 부는데 보니까 뭔가 툭 던지고 가더라고. 가까이 가서 보난 옥돔이어서. 그때 물어보난 저 비양도 앞에 가서 잡아왔댄 하더라고. 그 이후로도 옥돔 자주 잡아서 먹으랜 줬었지. 그때 사용했던 옥돔낚시? 그거 해녀박물관에 내가 기증했지.”

말이 없고 표현도 잘 못 하는 그 남자아이는 오히려 묵묵히 어르신 곁을 지켰다. 특히, 어르신이 제주 밖에 나가서 살 때도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부산에 전화교환수로 있을 때는 강원도 오징어잡이 배에 일하러 올라오기도 했고 어느 날엔가 연락이 와서 영도항에 나갔더니 오징어 20마리가 담겨 있는 상자째 주고 홀연히 가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신 어르신은 아이들을 낳으면서 더 이상 남의 집 살이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에 빚이 좀 있었던 터라 어르신이 물질을 하면서 틈틈이 빚을 갚아가고 있어 집을 마련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2남 1녀를 낳고 더 이상 애들은 남의 집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출가물질을 선택했다. 출가물질을 다녀오면 제주에서보다는 조금 더 수익이 좋았기 때문에 당분간 출가물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큰아들이 여섯 살 되는 해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홍경자 어르신이 살고 계신 집이다. 곳곳에 물질, 밭일을 하기 위한 도구들이 있는 곳. 어르신이 주무시고 밥을 먹고 살림을 하는 곳. 어르신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자랐고 이제는 그 아이들의 손자들이 찾아오는 터전. 즉 어르신의 삶 자체인 공간이다. 아이들이 모두 태어난 후에 홍경자 어르신은 더 이상 출가물질을 가지 않았다. 돈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것이 어르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경자 어르신이 큼지막한 전복을 손에 쥐고 물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65년 이상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사셨던 어르신의 손이다. 얼마나 고된 시간이었는지 짐작하도도 남는다. /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홍경자 어르신이 큼지막한 전복을 손에 쥐고 물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65년 이상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사셨던 어르신의 손이다. 얼마나 고된 시간이었는지 짐작하도도 남는다. /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1965년 어업협동조합이 생기면서 조합원출자금을 내고 어촌계원이 되었던 홍경자 어르신은 한림수협을 발전시킨 한수리 어촌계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했다. 스물한 살 때는 친정아버지가 일본에서 고무복을 사와서 딸에게 주셨다. 그래서 어르신은 한수리 해녀 중 최초로 고무복을 입고 물질을 한 해녀이다. 당시에는 마을 해녀들은 다들 천으로 만든 해녀복을 입었는데, 몇 번 입지 못하고 다시 넣어뒀다가 출가물질을 갈 때만 챙겨서 입었었다고 한다.

한수리 어촌계에서는 성게 작업은 무조건 공동작업으로 진행한다. 성게를 공동작업으로 채취하는 것은 한수리 어촌계가 제주도에서 최초로 시작한 방식이라고 한다. 깊은 바다에 있는 성게는 알이 잘 안 여물기 때문에 한수리 해녀들은 함께 성게를 잡아다 얕은 바다에 놓고 키우기도 했다. 물론 뭍과 가까운 곳의 성게는 전복과 소라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몰랐을 때였다. 77년도에 잠시 중단되었다 갯바다에 소라와 전복이 점점 사라지자 그때 다시 성게를 갯바다에 놓고 키워 공동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마을공동어장은 해녀들이 함께 일궈온 바다 밭이기도 했다. 

한수리 해녀들은 물질 말고도 다양한 일을 했다. 한림항에 조깃배나 고등어배가 들어오면 그물에서 생선들을 떼어내는 작업이나 분류작업을 하면서 가욋돈을 벌기도 했다. 지금은 마을로 이주한 외국인들의 몫이 되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는 해녀들이 담당했다. 어촌계 회원들은 함께 바다 정화 활동도 한다. 그들의 삶의 터전이기에 함께 쓰레기를 치우고 갯닦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쓰레기가 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일지라도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리지 않고 바다 정화 활동에 앞장선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왜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지 누구라도 이해를 할 것이다. 살아는 있으나 숨은 쉬지 않은 채로 동료들과 깊은 바다에 들어가 내 목숨과 바꿔 잡아 올린 물건들을 함께 지켜내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녀들의 거친 표현과 큰 목소리도 그렇다. 그 험한 바다에서 해녀들끼리 이야기를 하려면 목소리를 단전에서 끌어올려 소리 지르듯 내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터. 자연스럽게 거친 파도결처럼 억세지고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눈을 크게 뜨고 물가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해녀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었던 어렸을 적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홍경자 어르신은 그 누구보다도 어촌계 일에 앞장섰었다. 마을부녀회장도 했었고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의 임원도 맡다 보니 어촌계원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 마을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 누구 한 명 반대 없이 어촌계장은 홍경자 어르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홍경자 어르신은 2004년, 제주도 최초의 여성 어촌계장이 된다. 처음 어촌계장 권유를 받았을 때 남편은 어르신에게 딱 한 마디를 건넸다. 

“잘해봐.”

그날, 남편의 말투와 표정과 분위기에서 어르신은 본인을 향한 남편의 든든한 응원과 깊은 믿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들의 지원으로 어촌계장을 3년이나 연임할 수 있었다. 어촌계장은 나잠업을 하는 해녀와 관련된 일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의 고충과 애로도 함께 들어줘야 하는 자리였다. 해안마을인 한수리에서는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마을 사람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역할을 맡은 것이다. 처음 어촌계장 했을 때 여성 81명, 남성 165명 정도였던 어촌계원 중 지금은 40여 명 정도만 남아있다. 여기에 지금 현역 물질을 하는 사람은 20명, 가끔 나와서 물질을 하는 해녀를 포함하면 30명도 안 된다. 가장 젊은 해녀가 60대로, 대부분의 해녀가 고령의 나이에 물질을 하고 계신다. 

마을을 위한 홍경자 어르신의 활동들은 어르신이 2012년 4월 산업포장 대통령 표창장을 받으면서 더욱 인정받게 되었다. 어촌사랑 주부 모임의 초대회장을 맡으며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고, 해녀의 지위를 격상시켰으며 마을 소득증대에도 힘쓰신 덕택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고생한 것들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어 가을에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세계자연보전총회에서 제주해녀에 대해 발표를 하는 경험도 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을의 생태와 자연을 관장하는 해신당 할망신에게 목숨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전해주어 사람들의 귀감을 사기도 했단다.

2012년 어르신이 받은 산업포장증.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2012년 어르신이 받은 산업포장증.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포장 수여 당시 모습.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당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포장을 수상하던 모습.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세계자연보전총회 당시 홍경자 어르신.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세계자연보전총회 당시 홍경자 어르신.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이 어촌계장이 되면서부터 마을의 영등제에는 어르신이 빚은 오메기술이 제주(祭酒)로 올라가고 있다. 어르신은 옛날 꼬마였을 때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마을제를 했던 옹포의 나그네(심방)가 오메기술을 해 오라고 하면 마을에서 오메기술을 만들어 올렸던 기억이 또렷하다고 하신다. 그 기억을 더듬어 친정에서 매년 했었던 오메기술을 올 한해 마을사람들의 안녕까지 함께 빌며 정성으로 빚었다고 한다. 큰 항아리에 들어가는 좁쌀은 1말, 누룩은 2kg이었다. 그 좁쌀을 오메기떡으로 만들어 뜨거울 때 손으로 다 으깼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스러우셨을까. 오메기술을 만들면 작은 단지에 월별로 담아 정성스럽게 제주로 올린다. 그러면 심방이 하나씩 보며 그달을 점쳤다. 하나씩 단지를 열어볼 때마다 어르신을 포함한 마을사람들의 가슴은 조마조마하다. 나그네가 단지를 열어보며 월별로 이야기를 해 주고 조심해야 하는 달을 알려주며 비념해준다. 또, 장닭으로 액막이도 하며 한 해 마다의 풍어와 안녕을 빌었다. 

그렇게 한수리 영등제에서 월별로 오메기청주를 담아 제주(祭酒)로 올리는 것은 홍경자 어르신이 만든 마을의 문화가 되었다. 

오메기술 뿐이 아니다. 영등제에 올라가는 시루나 떡 역시 홍경자 어르신이 만든다. 집 창고에 켜켜이 쌓아져 있던 두 개의 시루는 영등제에 올라갈 백시리(흰시루떡)를 하기 위한 용도였다. 시리 한 개당 창호지를 3개씩 중간에 깔고 켜켜이 담아 쌀가루를 찌면 한 시루 당 총 4개의 백시리가 나온다. 그렇게 두 시루를 찌면 총 8쪽의 시루떡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다시 시루를 안쳐 통으로 된 백시리를 만들어 제에 올렸다. 

두 개의 시루가 쌓인 모습.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두 개의 시루가 쌓인 모습.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은 한수리의 마을제도 문화유산으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지켜나갔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다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마을사람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마을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주었던 이런 문화들을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하신다. 고향이 아닌 타지에서 사는 자녀들과 손자들, 그 손자들이 낳을 증손자들이 나중에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 한수리에 와서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아이들이 집에 와도 바다에 있는 엄마,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어르신. 젊었을 때는 애환의 바다였지만 지금은 바다와 나의 몸이 허락할 때까지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어르신에 말에 마음 한 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홍경자 어르신의 집에는 열정적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홍경자 어르신의 집에는 열정적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홍경자 어르신은 2017년 수산물 대축제 가족요리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홍경자 어르신은 2017년 수산물 대축제 가족요리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집 안에 놓인 수많은 표창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상장 하나가 보였다. 2017년 받은 수산물 대축제 가족요리 경연대회 대상. 어떤 음식으로 대상을 받았냐고 물어봤더니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마무리하고 가려던 찰나 웃으며 가까이 와서 속삭이셨다. 

“여름 고등어철에 싱싱한 고등어 푹 삶아. 그 삶은 물에 메조쌀 갈아서 죽하고 마지막에 참기름 떨어뜨려서 만든 고등어죽인데. 일찍 돌아가신 우리 친정엄마, 내가 해녀할 수 있게 해 준 새어머니, 큰딸 고생한다고 늘 미안해하신 친정아빠, 평생 내 편이었던 남편을 위한 음식이야.” 

# 김진경

김진경.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