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9) 내 인생 처음 부끄러웠던 기억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눈부시도록 하얗던 벚꽃도, 꽃비로 흩어지더니 이젠 그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요즘처럼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와 이렇듯 봄이 쉬이 가버리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집니다. 

소풍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코로나로 학교에서는 아예 소풍을 가지 않고 있을 터입니다. 고3인 제 딸만 해도 고등학교 내내 야외활동 한 번 못 했습니다. 맘 놓고 소풍 갈 수 있는 날, 언제일지 사뭇 기다려집니다. 

효돈초등학교 정문입니다. 우리 효돈 마을 바로 가운데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한참 넓어 보였던 운동장이 제 한눈에 다 들어왔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효돈초등학교 정문입니다. 우리 효돈 마을 바로 가운데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한참 넓어 보였던 운동장이 제 한눈에 다 들어왔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원보훈련이었던 효돈초등학교 소풍

제가 이제 50대 중반, 초등학교 때는 박정희 집권기였습니다. 소풍을 원보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모처럼 야외나들이마저도 훈련이라니…, 참 그땐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고, 이상하지도 않았습니다. 

효돈초등학교 바로 마주하고 효돈농협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때, 그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초등학교 사진 찍는데, 우연히 선배님이신 백성익 조합장을 마주쳤습니다. 나중에 효돈감귤이야기 쓰겠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효돈초등학교 바로 마주하고 효돈농협이 있습니다. 제 초등학교 때, 그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초등학교 사진 찍는데, 우연히 선배님이신 백성익 조합장을 마주쳤습니다. 나중에 효돈감귤이야기 쓰겠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훈련이었기에 아무리 먼 거리도 꼭 걸어갔습니다. 그때 키 작고 힘이 약했던 저는 걷는 게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친구들이 원보훈련 길을 저보다 더 힘겹게 걷다가, 때론 업히다가를 반복하며 따라왔으니까요. 그 신나는 초등학교 소풍길마저도 그땐 굳이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효돈초등학교는 봄 소풍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같은 장소에 갔습니다.

“…… 천여 명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이름도 새로워라 우리 효돈교” 의 교가 끝부분처럼 그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모일 수 있는 봄 소풍 장소는 도라미라 부르던 월라봉의 콘머리큰산, 저수지, 양마단지, 땅똥산이라고 된소리로 발음하던 당동산(이 글에서는 그때 느낌으로, 땅동산이라고 쓰겠습니다.) 처럼 넓은 곳이었습니다. 

가을 소풍은 보통 학년별로 따로 갔습니다.  외통, 소금막, 쇠소깍을 자주 갔습니다. 많은 수의 학생이 같은 날 소풍을 가던 터라 다른 학년들과  같은 장소에서 겹치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효돈초등학교 소풍갈 장소는 참 많았고 다 좋은 곳이었습니다. 

쇠소깍 해변도 자주 소풍가는 장소였습니다. 우리 효돈은 참 좋은 곳이 많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쇠소깍 해변도 자주 소풍가는 장소였습니다. 우리 효돈은 참 좋은 곳이 많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점빵에 김이 없었다는데…… 아니었다.

소풍 전날은 참 설렜습니다. 잠들기 전, 소풍이면 으레히 걸어야하는 부담감도, 힘들어도 괜찮았습니다. 소풍이었으니까요. 

소풍 전날 밤,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눈을 뜨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고, 차오른 오줌을 마당 한 편에 아무 데나 갈기고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부엌에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김밥을 싸려고 솥에 불을 때서, 모처럼 눈이 부시게 하얀 곤밥을 하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소풍은 김밥을 못 싸고 갔습니다. 대신 곤밥과 계란말이였습니다. 제가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그날 소풍은 김밥을 못 싸고 갔습니다. 대신 곤밥과 계란말이였습니다. 제가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1학년 가을 소풍날 아침 부엌을 아무리 봐도, 김밥재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김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김이 어서라게… 담뱃집 점빵에도 엇고, 차부 점빵에도 엇고. 언치낙 연쇄점이 미릇 가봐시민 이서실티사… 어떵허느니? 경 허난 곤밥에 독새기 말앙 주마이. 어떵 안 헌다게…” (김이 없더라. 담배가게 상점에도 없고, 정류소 상점에도 없었다. 어제 저녁 농협 연쇄점에 미리 가봤더라면 있었을까, 어쩌겠니? 그래서 흰쌀밥에 계란 말아줄게. 괜찮을거야…)

어머니의 말이 조금 아쉬웠지만, 흰쌀밥에 계란말이도 족했습니다. 흰쌀밥, 계란말이도 어쩌다 제사, 명절이나, 다른 특별한 날에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그것도 좋았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 편 김밥을 싸고 가지 못한 아쉬움은 짙게 배인 소풍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렇게 곤밥에 계란말이에 도시락을 싸서 소풍갔습니다. 그날, 초등학교 1학년 가을 소풍장소는 땅동산이었습니다. 봄소풍처럼 학교에서 땅동산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소풍장소 땅동산 오르는 길에는 기암이 많이 있습니다. 도라미라 부르는 월라봉인데 애기업은돌, 구덕찬돌. 그땐 참 거대해보였습니다. 이 길을 올라 땅동산에 갔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소풍장소 땅동산 오르는 길에는 기암이 많이 있습니다. 도라미라 부르는 월라봉인데 애기업은돌, 구덕찬돌. 그땐 참 거대해보였습니다. 이 길을 올라 땅동산에 갔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동네 아이들과 같이 모여 앉았습니다. 각자 자신이 싸 온 도시락을 꺼냈는데 이상했습니다. 다 김밥을 싸고 왔습니다. 진형이, 석훈이, 희진이, 동선이, 치영이가 싸온 도시락은 분명히 김밥이었습니다. ‘아 어머니는 김이 없었다는데… 대체 어디서 김을 샀던 것일까?’

김밥들 틈에 내 흰 곤밥과 노란 계란말이는 유달리 도드라져보였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 김이 없던 게 아니었구나.’

제 기억 속 1학년 가을 소풍 날 전후 몇 일, 아버지는 집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부재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마 일을 하러 외방에 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소풍날 아침에 아버지에게 김밥 재료 살 돈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저는 1학년 가을 소풍 때 그렇게 김밥을 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물통, 갖고 싶었습니다.

땅동산 너른 들판이었던 곳은 이제 감귤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땅동산 너른 들판이었던 곳은 이제 감귤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점심시간이 끝나고 보물찾기를 했습니다. 땅동산은 소나무가 많았습니다. 보물을 찾으려고 소나무사이를 걷다가 손등에, 어깨에 긁히고 온통 상처투성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두 장, 세 장이나 찾는 보물, 종이쪽지를 저는 단 한 장도 찾지 못했습니다. 땅동산 너른 평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 하면, 제 키보다 한 참 더 자란 풀들이 무성했습니다. 그 풀 사이를 헤치다 보면, 풀의 옆면 날 선 부분에 손이 베이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보물은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가을 소풍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쓰레기치우기 마무리 된 반은, 키 순서로 앉았습니다. 키 작은 저는 2반 맨 앞에 앉았습니다. 1반, 2반, 3반 다 모였습니다. 이제 가을 소풍은 끝나고 있었습니다. 

사진 7 이런 물통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횡령(?)하려고 했던 물통은 가운데 노란색이었고 뚜껑이 조금 더 컸습니다. (헬로마켓에서 이미지 가져옴).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사진 7 이런 물통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횡령(?)하려고 했던 물통은 가운데 노란색이었고 뚜껑이 조금 더 컸습니다. (헬로마켓에서 이미지 가져옴).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그때 1반 남자 선생님이 물통을 대여섯 개 양손에 높이 들었습니다. 보온, 보냉은 되지 않는 플라스틱 재질의, 어깨에 멜 수 있게 긴 줄이 달려 있는 물통이었습니다. 뚜껑은 물컵 용도로 사용하고. 대개 몸통 앞 뒷면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졌습니다. 저는 그런 물통 없었습니다. 

“이 물통 잊어버린 사람, 물통 주인들 이거 찾아가라.” 

그리고는 하나씩 높이 들어 올리며 “이거 주인!” 하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땅동산 풀밭이 다져진 맨땅에, 2반이라 가운데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제 눈에 1반 선생님이 하나씩 물통을 들어 올릴 때마다 가을하늘이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저에게는 없던 물통이지만, 선생님이 들어 올릴 때마다. 자꾸만 그것들을 올려봤습니다. 

“이거 주인!” 

하나씩 물통의 주인은 찾아가고 1반 선생님이 마지막 물통을 잡고 들어 올렸습니다. 몸통 부분에 노란색이 보였습니다. 마지막 물통이고, 가을 소풍이 끝나가는 시간이라 자기들끼리 떠드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물통 주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겨우 몇 초나 지났을까요. 선생님이 바로 외쳤습니다.

“자, 이거 주인 없습니까?”

그때였습니다. 맨 앞에 앉아 있던 제가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바로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라, 선생님은 올렸던 손 그대로 내려 바로 저에게 물통을 건넸습니다. 

아, 아마 채 2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 물통이 1반 선생님에게서 저에게 건네질락 말락 할 때 “아 그거 내껍니다. 내껀데 마씸” 하고 뒤에서 3반 키 큰 여자아이가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제가 앉아 있는 그 자리까지 달려와 그 물통을 손에 잡았습니다. 아, 정말 그때 제가 그 물통을 잡아본 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은 듯합니다.

어정쩡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모르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큰 소리로 “아 제 건줄 알았습니다.” 그 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제 얼굴까지 바짝 다가와 제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습니다.

“충민아. 물통 누나가 갖고 간 거 아니? 누나가 갖고 갔을거라…. 넌 너 물통 갖고 가고, 너 자리에 앉아라”

제 담임이신 홍봉련 선생님이셨습니다. 입가 왼쪽에 점이 있는, 안경 쓴 아주 친절하고 차별하지 않던 선생님이셨습니다. 홍봉련 선생님은 연년생인 제 누나의 1학년 담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을 소풍은 끝이 났습니다. 선생님들은, 땅동산에서 가까운 신효 아이들은 바로 집으로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는데 자꾸만 아이들이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뒤에서 “자기 것도 아닌데 자기 거라고 했다.” 고 제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걸었습니다. 우는 건 내 생각을 다 들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풍이 끝나고 이 길을 부끄러운 마음에 혼자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감귤박물관 진입로가 되었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소풍이 끝나고 이 길을 부끄러운 마음에 혼자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감귤박물관 진입로가 되었습니다. 사진=강충민. ⓒ제주의소리

집에 오자 비로소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냥 서럽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서러웠습니다. ‘왜 난 내 것이 아닌데 손을 들었을까?’ 자꾸만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 뒤에 서러움보다 더한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면서 땀을 많이 흘렸고 소리를 많이 질렀고, 많이 아팠습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제게 물통 이야기를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부끄러운 기억에 괜찮아지는 건 참 오래 걸렸습니다. 

제 인생 처음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저는 그때 횡령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물통은 단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제 2년만 있으면 그 부끄러운 기억이 50년이 됩니다. 그동안 저는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에는 부끄럽다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남은 인생도 효돈초등학교 1학년 가을 소풍의 기억을 떠올리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아. 요즘 선거철입니다. 궁금해집니다. 뽑아달라 외치시는 분들은,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또 편지에 전하겠습니다.

2022년 4월 21일 목요일  
강 충민 올림

# 강충민 시민기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사회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좋아하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라초등학교 인근에서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jejungo.net)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강충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강충민시민기자 블로그 가기 ⇒ http://blog.naver.com/som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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