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테마여행] 대정고을에서 모슬포까지, 그 바람 앞에 서다

제주시에서 대정을 향해 서남쪽으로 뻗은 서부관광도로변은 온통 황금빛 억새와 국화로 뒤덮여 있다. 드넓은 황금빛 초원 위에 낮은 오름들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능선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면 그 자체가 한 폭의 수채화다. 이 수채화를 가슴에 품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이 도로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 제주시에서 대정으로 가는 서부관광도로 길가는 억세와 오름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 장태욱

동광 진입로를 지나 대정을 향해 가는 길가에는 미쳐 수확하지 않은 귤들이 나무에 매달린 채 돌담 너머로 방문객을 환영한다. 제주의 황금빛 가을은 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시간만큼 더 길어진다.

대정고을,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 간 자리

과거 대정현(지금은 대정읍)은 조정에서 중죄인을 벌하기 위해 귀향을 보냈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과거 제주에 유배되었던 자들이 총 49명이었는데, 그중 대정현에 유배된 자들이 3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배인들의 수를 구(區)별로 구분했을 때 대정은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기록된다.  

대정고을은 과거 대정현청이 있던 곳으로 근래에 보성, 인성, 안성 세 마을로 분리되어 있다. 대정고을에는 조선시대 이곳으로 유배왔던 선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동계 정온(鄭蘊)과 추사 김정희(金正喜)다.  
  

▲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장태욱

동계 정온은 대북의 영수 정인홍의 제자였다. 그는 광해군 10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영창대군이 살해되자 그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광해군과 그 권력의 기반이었던 대북의 미움을 사서 10년간 대정에 유배되었다. 
 
그는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집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을 쌓고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키는 형벌)되었을 때, 대정현감 김정원이 적소(지금의 인성리) 마당에 서재용으로 두 칸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유배되었던 송상인 이익 등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했다.

동계 정온이 제주를 다녀간 지 약 200년 후 제주에 귀향왔던 추사 김정희는 당시 자신과 친분을 유지했던 제주목사 이원조로 하여금 동계정온비를 건립하게 했다. 그 '동계정온선생유허비'가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에 남아있다.  
   

▲ 추사 적거지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마당에 가시로 둘러진 것을 보면 당시 추사가 위리안치되었음을 알수 있다. 근처에 추사 전시관이 있어서 예술작품을 포함한 그에 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 장태욱
 

추사 김정희는 경북 경주 경주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아버지 김노경은 승지, 판서 등을 맡았을 정도로 집안은 화려했다. 왕가의 친척이자 권문세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추사는 박제가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실사구시적 학문관을 몸에 익혔다.

하지만 그의 부친인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에 연류되어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그의 가문은 위기를 맞았다. 그 후 그의 아버지를 탄핵했던 김홍근은 대사헌에 임명되자마자 다시 과거 사건을 들먹거렸다. 김홍근은 김정희마저 제거하려 하였다.

김정희는 포졸들에 의해 관아로 끌려가서 초죽음이 되도록 매를 맞았고,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대정현에서 보내는 9년 동안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질병과 싸웠고, 부인을 잃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자 이상적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탐구에 몰두했고, 친구인 초의선사와의 교류를 통해 인식의 기반을 넓혔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제주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추사체나 세한도는 그가 대정현에서 보낸 인고의 생활이 만들어 낸 예술적 결실인 것이다.

안성리 마을에 마련된 추사적거지와 인근의 추사박물관에 가면 그의 제주생활을 보여줄 자료들과 더불어 세한도를 비롯한 그의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이재수의 난을 주도한 세 거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다. ⓒ 장태욱

추사 적거지에서 서쪽 30m 지점에는 보성, 안성, 인성을 나누는 삼거리가 있는데, 이 삼거리에 '제주대정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다. '삼의사(三義士)'란 이재수의 산에 중심에 있던 세 장두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지칭한다. 

1961년 이 지역의 유지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이 이 삼거리에 이재수의 난을 기념하며 삼의사비를 세웠는데 비문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의 폐해가 직설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이 일대의 도로가 확장되면서 삼의사비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1997년에 대정읍 연합청년회 명의로 다시 세워졌다.
   

▲ 사계리에서 송악산으로 향하는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형제섬이다. ⓒ 장태욱

푸른 바다 위 섬들이 연출하는 해안절경

대정고을에서 차를 돌려 삼방산이 바라다 보이는 데로 가면 사계리 포구가 나온다. 사계리 포구는 모슬포항을 향하는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해안도로는 송악산을 지날 때 까지는 해안가 백사장너머 보이는 형제섬을 배경으로 한다. 

해안도로의 중간 기착점에 해당하는 송악산에 이르면 해안은 바다에서 절벽 위로 가파르게 솟아오른다. 푸른 바다 위에 솟아오른 절벽위에 서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가까이에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는 물론이거니와 멀리 서귀포앞바다에 범섬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마치 파란 도화지 위에 훌륭한 예술가의 손놀림이 지나간 것 같다.
   

▲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송악산 ⓒ 장태욱
 
송악산 해안절벽위에 서니 이전과 달리 옷이 휘날릴 정도로 바람이 불어왔다. 노랗게 피어난 들국화와 한들거리는 억새풀 속에서 한라산과 산방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대의 공중정원에 서 있는 착각이 일어난다. 거기에 인근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은 방문객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한 줄 더한다. 추사 예술의 훌륭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일대 바람과 더불어 해안절경이 전하는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 송악산에서 바라본 가파도의 모습이다, ⓒ 장태욱
 

모슬포,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름

송악산을 지나 모슬포항을 향해 가노라면 길 왼쪽에는 바다 위에 눈부신 햇살이 비추고, 그 햇살을 듬뿍 받은 어선이 고기를 잡고 있다. 그 해안절경의 반대편에는 감자나 배추를 심어놓은 넓은 경작지 사이로 과거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군사시설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모슬포 포구에 도착했다.
   

▲ 송악산 인근에서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 장태욱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난 여잘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
더욱 슬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경'에서 - 김영남의 '모슬포에서' 중 일부

모슬포는 과거 사람들이 '못살포'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열악했다. 우선 제주의 최 서남단에 있어서 1년 내내 강한 편서풍이 불어온다. 한라산이 겨울에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 게다가 샘물이 귀하고 땅은 척박하다. 국토의 극남단에 있어서 중앙과의 연락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유형의 상징이 되었고, 4·3 과정에서는 수많은 인명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시인은 아마도 자신과도 같은 상처를 입었던 모슬포로부터 자신이 간직한 내면의 아픔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리라.   
  

▲ 모슬포 포구 입구 길가에 식당들이 지나가는 손님을 맞는다. ⓒ 장태욱

과거에는 대정현청이 있던 보성, 안성, 인성이 대정의 중심지였다면, 지금 대정의 중심지는 모슬포 포구다. 모슬포에서 많이 잡히는 자리돔과 방어는 전국에 잘 알려진 지역 명물이 되었다. 모슬포 포구에 오면 지금은 '못살포'라는 오명을 무색하게 하려는 듯 언제나 활기가 돈다.

포구 입구에는 해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방문객들을 맞는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지 처음 오는 이들은 어리둥절할 음식이름들이 붙어있다. '객쭈리 탕', '아나고 탕', '보말 국', '어랭이 물회'…. 대부분 해산물 요리들인데 이 지역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을 재료로 한다. 음식 이름에도 해산물의 지역 방언을 주로 사용한다.
  

▲ 모슬포 포구 ⓒ 장태욱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라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어느 음식을 주문하여도 지역의 인심에 감탄할 만큼 훌륭한 식탁이 차려질 것이다. 야박한 관광지 음식이 아닌 훈훈한 지역민심을 맛보고 싶은 이들은 모슬포 포구로 가실 것을 권한다.

제주도 서남단 끝자락엔 누구든지 오래도록 그리워할 바람과 해안절경이 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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