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4) 로지 브라이도티, 이경란 역,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로지 브라이도티, 이경란 역,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사진=알라딘.
로지 브라이도티, 이경란 역, 포스트휴먼, 아카넷, 2015. 사진=알라딘.

‘포스트휴먼’(posthuman)이란 용어는 오늘날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강력한 단어다. 하지만 형용사인 듯 명사인 듯 애매한 용어이기도 하고, 논자들마다 그 의미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악명 높은 개념이기도 하다.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은 포스트휴먼 연구 또는 그에 관한 담론과 이론, 사상을 의미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국내 논의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서 가운데 하나다. 

브라이도티는 오늘날의 세계, 즉 포스트휴먼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선 포스트휴먼 시대는 기술적으로 매개된 세계화된 시대다. 인간은 기술과 함께 살아간다. 불이 없다면 오늘날의 인간 신체 구조와 인지 능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술과 공진화한 존재가 인류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테크노사이언스라고 불리는 기술과 과학의 융합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학과 공학에 의존적이다. 이 기술은 지구적 경제,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토대이기도 하다. 

브라이도티는 “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기술, 그리고 인지과학이 포스트휴먼을 이끄는 아포칼립스의 네 마부”(80쪽)를 언급한다. 기술에 낙관적인 이들은 이 네 분야의 머릿자를 따 ‘NBIC’이라고도 부른다. 브라이도티는 특히 자본주의의 유전공학적 구조에 주목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과학과 경제의 틀로 가져와 상품으로 만드는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 책에서 줄곧 특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각 장마다 ‘생명’이란 단어가 들어가 강조되는 이유는 생명공학-자본주의 시대의 생명과 물질,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것들과 분리될 수 없는 연속체를 이루는 문화와 기술을 사유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은 우리 시대의 과학과 생명 기술이 생명체의 구조와 성질 자체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 인간에 대한 기본 참조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포스트휴먼적 동의가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모든 생명 물질에 대한 기술적 개입은 인간과 다른 종들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통일시키고 상호 의존하게 한다.”(56쪽)

저자는 복제양 돌리나 온코마우스(OncoMouse)를 포스트휴먼의 아이콘으로 꼽는다. 하버드 마우스로도 불리는 온코마우스는 최초로 특허를 받은 포유동물이다. 이 쥐는 실험용으로 암 세포나 온갖 병리 실험의 대상으로 활용된다. 인간에 대한 유전자 구조 이해 역시 과학적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생명공학과 자본주의의 결합에 대한 우려를 낳게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창조한 것처럼, 포스트휴먼 시대의 생명공학은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 창조물은 경제적 이익의 수단으로 각광 받는다. 누군가에게는 오늘날 포스트휴먼 시대는 『멋진 신세계』의 테크노 디스토피아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먼 조건은 ‘포스트휴먼 곤경’이기도 하다.

브라이도티가 일방적으로 기술과 과학을 배제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테크노사이언스에 개방적이다. 기술친화적인 동시에 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철학과 인문학의 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이러한 사유를 우리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레오나르도 다 빈치,《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브라이도티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첫째, 포스트-휴머니즘 즉, 휴머니즘에 대한 성찰적 비판의 기획이다. 유럽에서 출발한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한 근대적 관념과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휴머니즘의 인간이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그림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럽 남성의 이미지이다. 휴머니즘은 합리적 이성과 진보에 대한 신념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은 자유주의의 해방적이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유럽 남성이 아닌 비백인, 여성, 자연을 타자화시켰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인간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posthuman)에 대한 상을 만들어낸다.

브라이도티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둘째, 탈-인간중심주의, 즉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다. 인간 예외주의나 종 차별주의와 같은 휴머니즘의 중심 테제는 오늘날 더 이상 성립하기 힘들다. 인공지능은 ‘알파고 쇼크’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특정한 분야에서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이미 뛰어넘었다. 인간은 신을 닮은 존재로서 만물의 영장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주장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 대신 로봇이나 사이보그와 같은 기술적 비인간 존재와 동물, 식물과 같은 자연, 나아가 지구 행성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 번째 대멸종’과 기후 위기, 또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빛나는 중심이 아니다. 

브라이도티는 무인 드론 무기와 같은 킬러 로봇의 존재를 언급하며 오늘날 포스트휴먼 시대의 죽음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기술과 자연, 문화가 얽히고설킨 이 시대의 생명과 죽음은 모두 과거와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새로운 조건에 맞는 새로운 윤리적 성찰과 실천이 요청된다. 이러한 사유에 의하면, 대학과 인문학 역시 기존의 틀과 관습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맞게 포스트휴먼 대학과 포스트휴먼 인문학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경험해보지 못한 곤경과 위기의 시대이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대안과 기회로 열린 시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포스트휴먼 시대를 향한 저자의 긍정의 정치학(affirmative politics)이다. 

# 노대원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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