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51) 미래 중광미술관이 해결해야 할 문제

제주 출신 작가 중광(1934-2002)이 사망한 지 20년이 된다. 지난 3월 9일이 그의 작고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를 추모하고자 중광이 1980년대 전시를 열었던 미화랑이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 내의 서예박물관에서 그를 기리는 작은 전시 <중광작고 20주기 특별전: 예술의 원점-중광과 다섯 광화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의 대부분은 1980년대 중광의 작업들이고 나머지 작가들이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중광 작고 20주기 특별전.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중광 작고 20주기 특별전.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정작 그의 작고 20주년인데 제주도에서는 조용하다. 작년 여름 가나아트 회장이 중광의 작품 40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하면서 중광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정작 도민들은 기증된 작품들을 본 적이 없다. 모 대기업 회장이 사망 후 작품을 국내 유수의 미술관에 기증하나 너도나도 회장의 이름을 내걸고 빠르게 전시를 선보인 것과 대조된다. 올해 초에는 ‘저지문화지구 활성화’ 용역 보고회에서 수장고, 생활문화센터 등 여러 시설들과 더불어 50억을 들여 2024년까지 중광미술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포함시켰을 뿐이다. 

그의 작고 20주년에도 여전히 수장고에도 잠자고 있는 중광의 작업들을 상상하며 한편의 파노라마와 같은 그의 삶과 미래의 중광미술관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소개한다. 

그는 1934년경 오사카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일제 강점기, 4.3, 6.25를 겪었고 가난과 도둑질과 씨름하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고자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고 학비가 없어서 중학교를 중퇴했으며 제주와 집을 탈출하고자 해병대에 입대했으나 특별한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청년기를 보낸 그는 이미 세상의 야속함과 인간의 허약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통도사에 입문하고 세속의 이름 고창렬을 버리고 ‘중광’이라는 법명을 얻고 나서도 불교의 가르침과 세속과의 거리가 종이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간파했다. 

스님 중광은 세속의 쾌락을 즐기는 가운데 예술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술과 담배, 그리고 복잡한 인간 세상의 굴곡 속에서 달마상, 동자승, 여러 동물 이미지를 활달하면서도 경쾌한 선으로 그린 선화를 그리고 시를 썼다. 비록 파격적 행적으로 인해 승적을 박탈당했지만, 대신에 ‘걸레 스님’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걸러지지 않은 충동과 광기, 기존의 수묵화의 전통을 넘어선 회화, 도예, 판화 작업을 선보이며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외에서 주목을 받다가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구상, 장욱진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은 중광의 솔직하면서도 직설적인 화법과 행동거지를 부러워하며 어울리곤 했다. 구상은 중광과 우정을 나누면서 “본질적으로 원초적인 야성”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과 예술의 본질적 모순을 자기 안에 화해시킴으로써 즉 해탈에 도달”한 작가라고 평하곤 했다. 

상업적으로도 제법 성공한 작가였다. 전시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동리, 서정주, 서세옥 등 유명 예술가들이 포함된 전시에 그도 꼭 이름을 올리곤 했다. 그를 다룬 영화, 연극이 만들어졌으며 언론에 종종 등장하곤 했다. 해외에서 전시를 하며 작품을 판매했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경매에 그의 작품이 나오곤 한다. 해외 미술관에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대영박물관에 8점, 코넬대학교 존슨미술관에 1점이다. 

중광의 인기가 올라가고 유명세를 얻으면서 그가 정작 싸워야 했던 대상은 예술가로의 자신이 아니라 가짜 그림이었다. 그동안 한국미술시장은 인기 작가의 모작과 늘 싸워야 했는데 중광도 예외는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핵심을 포착한 그의 그림은 제법 모방하기가 쉬웠고 가짜 작업이 화랑가에 나돌곤 했다. 그러자 그는 직접 자신이 손으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1990년 그 가짜 그림들을 직접 찾아서 구매하는 데 2천만 원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 한 신문에 실린 중광과 그의 가짜 그림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1990년 한 신문에 실린 중광과 그의 가짜 그림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어떤 경우에는 가짜 그림을 판매하는 화랑에 가서 자신의 그림과 가짜 그림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곤 수거한 가짜 그림들을 화실 구석에 쌓아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주는 증거라며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그가 이 가짜 그림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시중에 돌던 가짜 그림들이 모두 수거되었는지, 이후에 어느 정도의 가짜 그림이 생산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사망 후 그를 알고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그를 추모하는 작업이 이어지곤 했으나 미술관 꿈만 키워갔을 뿐 가짜 그림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11년 그의 작고 10주년에는 작업 150여 점과 자료를 모은 대규모 회고전 <걸레스님 중광-만행>이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인물미술사학회가 학술대회를 열어 홍가이, 윤범모, 김영호 등 여러 학자들이 중광예술론을 펼치며 미술관의 꿈을 더욱 독려했다. 

제주에 기증된 중광의 작품과 미래의 중광미술관은 중광이 살아생전에 싸워야 했던 가짜 그림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제주도에 작품이 기증된 후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병색이 짙던 중광은 2000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초대를 받았고 전시가 끝난 후 일본으로 갔다가 이후 트럭에 작품을 싣고 가나아트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아마도 몸이 아팠던 중광이 말년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을 판매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그가 작업실을 청소하다시피 정리한 후 트럭에 싣고 온 것들일 것이다. 그는 교리와 현실을 가뿐히 넘나들었고 ‘걸레스님’에서 ‘걸레작가’로 순항할 정도로 유연한 인물이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얼마나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미래의 중광미술관은 단순한 전시장의 기능을 넘어서 그의 유산 속에 남아있는 가짜의 그림자들을 걸러낼 연구 장치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 양은희

양은희는 제주출생으로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큐레이터 및 평론가로 활동해 왔다. 현대미술과 미술제도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 번역서를 발표했다. 저서로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2017, 공저) ▲디아스포라 지형학(2016, 공저) ▲뉴욕, 아트 앤 더 시티(2007, 2010) 등이 있다. ▲개념 미술(2007) ▲아방가르드(1997) ▲기호학과 시각예술(1995, 공역)을 번역했다. 현재 스페이스 D의 디렉터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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