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5) 악셀 호네트, 문성훈/이현재 역, 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사월의책, 2011.

악셀 호네트, 문성훈/이현재 역, 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사월의책, 2011. /사진=알라딘.
악셀 호네트, 문성훈/이현재 역, 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사월의책, 2011. /사진=알라딘.

최근 한국 사회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 이론이 꼽힌다. 호네트는 ‘인정투쟁’ 한국어 서문에서 사회운동들이 차츰 다양한 인정 범주를 통해 드러난 도덕적 어의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한 사실로 언급한다. 

이미 ‘BOOK世通’에는 호네트의 다른 책 2권이 소개된 바 있다: ‘BOOK世通 57’에 ‘사회주의 재발명’, ‘BOOK世通 146’에 악셀 호네트, 낸시 프레이저의 ‘분배냐, 인정이냐?’ 최근에는 ebs ‘위대한 수업’에서 악셀 호네트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도 있다. 

‘무시의 사회적 동학’과 ‘인정의 병리학’

‘인정투쟁’ 첫 부분부터 책 내용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어렵다고 느끼는 헤겔(Hegel) 이론이 ‘인정투쟁’ 제2장과 제3장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셀 호네트는 헤겔의 예나 시기 철학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주체들 상호 간의 인정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제2장과 제3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1장을 읽기는 수월하다. 제1장은 ‘인정투쟁’과 상반되는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 이론에 대해 다룬다.) 

책 초반 내용이 어려워도 책읽기를 두려워하지 말 것은 호네트가 친절하게도(?) 제4장에서 헤겔 이론을 미드(G. H. Mead)의 사회심리학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호네트는 청년 헤겔이 말했던 인정투쟁의 사변적인 관념론을 미드의 탈형이상학적 언어로 풀어낸다. (헤겔 이론이 어렵다면 책 서두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전체 맥락을 대략 잡은 후에 제4장부터 읽는 것도 좋겠다 싶다. 하버마스와 호네트의 이론을 비교하는 ‘옮긴이의 말’을 한 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이다.) 

호네트는 미드의 이론에 기초해, 자아를 ‘객체로서의 자아(me)’와 ‘주체로서의 나(I)’로 나눈다. ‘객체로서의 자아(me)’는 타인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상인데, 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자신들이 정당하게 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인정을 거부당할 때에  ‘도덕적 불의의 감정’이 생기는데, 호네트는 이를 ‘무시의 사회적 동학’으로 파악했다.  

‘사회적 무시의 감정’에 기초해 ‘주체로서의 자아(I)’는 ‘객체로서의 자아(me)’에 반응하며, ‘새로운 객체로서의 자아(new-me)’를 얻으려 한다. 이 과정을 호네트는 ‘인정의 병리학’에 기초한 ‘인정투쟁’으로 설명한다.    

미드에 따르면, 정체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는 심리학의 관심이 정적인 형태에서 역동적인 형태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이는 객체로서의 자아(me)→객체로서의 자아(me)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자아(I)→“다른” 객체로서의 자아(me)를 불러일으키는 주체로서의 자아(I)로, 자아가 발전하면서 형성되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정체성 투쟁’으로서 인정투쟁

자아는 사회가 자신을 바라보는 me-identity와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I-identity, 그리고 자신이 사회에 대해 바라는 새로운 me-identity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me-identity를 바꾸려는 ‘정체성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정체성 투쟁’의 가장 큰 동력은 ‘사회적 무시’다. 사회적 인정의 경험은 인간이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정의 거부, 곧 무시는 필연적으로 인격의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협의 느낌을 수반한다. 인정에 대한 유보나 박탈로서 무시에 대한 경험은 인정관계를 재구성하려는 투쟁으로 나가게 한다. 최근 벌어진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장애인의 인권이 더 이상 보살핌이나 배려의 차원이 아닌, 장애인의 권리임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라는 (제주 사회라는) 콘텍스트에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다름(차이)을 차별로 느껴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인권이라는 텍스트는 ‘고통사’라는 콘텍스트와 함께 읽어야 한다. 인권은 ‘고통’이라는 구체적 차원에서, 역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이 때 ‘고통’은 ‘무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약자(소수자)의 정체성 운동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요구들이 무시되는 것과 같은 강력한 ‘부정’이 필요하다. 강력한 정체성 운동은 강력한 부정의 반작용으로 나오는 것이다. ‘무시의 사회적 동학’은 바로 이를 말한다. 

인정투쟁의 경험적 역사

호네트는 역사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힘이 인정투쟁이라는 점을 헤겔과 미드의 이론에 기초해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경험적인 사실임을 강조한다. 

제8장에서 호네트는 인정받고자 하는 근본 기대가 훼손될 때 야기되는 도덕적 경험의 틀 속에서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동기가 형성됨을 인류 역사에서 경험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특히 호네트는 영국 역사가 톰슨(Edward P. Thompson)의 연구를 소개한다. 

톰슨은 인정투쟁의 원인을 실용적인 이익갈등이 아니라, 도덕적인 불법감정에서 찾는다. 톰슨은 자본주의 산업화 최기에 영국 하층민들에게 저항동기를 부여한 ‘도덕적 기대의 훼손’을 연구했다. 그는 경제적 궁핍이나 곤경에서 투쟁의 단초를 찾지 않았다. 대신 사회에 가지는 도덕적 기대의 훼손에 주목했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할 때,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규범적 훼손을 체험하며, 삶과 죽음이 걸린 투쟁으로 나아간다.  

물론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이 지향하는 바는 필자가 언급하는 소수자 운동 차원을 뛰어넘는다. 호네트는 인정투쟁에 기초해서 사회 규범이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잘 언급한 대목은 (어려운 내용이지만) 마지막 장인 제9장에 나오는 다음 내용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규범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던 인정이론적 단초는 칸트적 도덕이론과 공동체주의적 윤리론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인정이론은 가능한 한 특정한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보편적 규범들에 대한 관심을 전자와 공유하고 있으며, 후자와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316면)

나가며 

필자는 이 책을 필자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유학시절에 처음 접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 관심은 곧 호네트의 ‘인정이론’으로 옮겨갔다. 한국 사회는 의사소통행위보다는 인정투쟁에 기초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더 많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와 제주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수자 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개념은 매우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이는 사회운동에서 인정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막막한 현실이 눈앞에 전개된다. 여러 번에 걸친 정체성 투쟁에도 큰 변화는 없는 것 같고 좌절감은 쌓여간다. 하지만 소수자와 약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먹물 인생인 필자는 흉내 낼 수도 없는 도덕적 힘이 그들의 인정투쟁에는 깃들어 있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려대 법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박사.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철학/법사회학 전공).

블로그: blog.naver.com/gojura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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