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93)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태ᄉᆞᆫ땅 밟기

당초 한 달 일정으로 출발한 도일주 도보여행의 대장정은 10일간의 소장정(?)으로 끝날 것 같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 택시나 버스를 이용했으나, 1일 20~25km를 걷는 강행군으로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끝없는 수평선,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제주섬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섬 땅의 속살과 민낯을 들여다 보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제주 사람들은 예부터 고향을 ‘태ᄉᆞᆫ땅’이라고 했다. 태(胎)를 사른 땅이라는 뜻이니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고 절묘한 표현이 또 있을까. 제주인이 제주를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직무유기에 다름아니다.

자기 고향을 제대로 아는 방법 중 하나가 산천 답사이다. 낳고 자라고 묻힐 땅, 그 땅을 순례하는 일이야말로 숭고한 대지에 대한 예의이고 향토애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TV에서 방영된 다큐 영화는 멕시코 국경→미국→캐나다 국경까지 도보로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거리 4300km, 기간 162일(5개월+10일)의 험난한 여정이다. 완주자는 전체의 16%이고 나머지는 중도에 포기한다. 완주자들이 고통스런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은 건 자유와 평화였다. 이것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은가? 걸어라, 걷고 또 걸어라. ‘왜 사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민하면서…….

<2>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해안선을 따라 걷는 도일주 도보여행 9일째다. 제주시-애월읍-한림읍-한경면-대정읍-안덕면-서귀포시-남원읍-성산읍을 거쳐 구좌읍에 이르렀다.

순례자는 길 위에서 타인을 만난다. 여기서 만나는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의 손님이다. 신엄에 사는 김석희(소설가)는 시오노 나나마의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번역계의 거물이다. 

귀덕에선 강요배(화가)를 만났다. 강 화백은 두 가지가 질긴데 말과 술이다. 술을 입에 댔다 하면 말술이고, 말을 시작하면 오뉴월 장마비처럼 쏟아진다. 그래서 자신의 화실에서 자고 가라는 간청을 물리치고 돌아섰다. 성산읍 온평포구에서 장선우(영화감독)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장 감독은 서울 출신으로 제주에 정착한 지 17년이 됐다. 그는 여러 편의 ‘작가주의 영화’를 연출했다.

‘제주의소리’에 연재한 나의 칼럼(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전체를 다 읽었다고 일산에 사는 현순화 씨가 나랑 함께 걷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고마운 일이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삼생(전생·금생·후생:240년?)의 인연이라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미련하게도 무심코 흘려보낸 인연을 다 합치면 수만 년이 될 터이다.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알고 보면 세상살이는 인간관계가 좌우하고 그 관계의 뿌리에 인연이 있다.

명나라 때 서예가 동기창은 “무릇 군자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걸은 후 세상을 논하라”고 했다. 독서와 여행이 인생공부의 핵심임을 강조한 말이다. 나는 여기에다 교만인우(交萬人友)를 추가한다. 만인의 벗을 사귀라는 뜻이다.

<3> 오! 보혜사 성령님

도보여행 중 ‘제주동산교회’의 김경태 목사와 친구인 정우은 목사, 후배인 나기철(시인), 김대용(시인)도 격려와 성원을 보내 왔다. 뮤지션 노명희는 조만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여행은 혼자 떠난 게 아니다. 따뜻한 사람들이 응원군이 돼 줌으로써 피곤치 아니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가르쳐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동행하신다. 아! 내가 순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이었구나. 고통과 시련의 터널 끝에서 신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감지한다.

여행에 필요한 건 무어든지 공급하겠다는 김희숙(무용가)의 전화가 왔다. 후배 정영기가 하도해수욕장에서 도보여행에 합류했고 세화리에서는 이어도원우회의 강순애 씨가 동행했다. 오! 주여, 소생이 무엇이관데 이다지도 크나큰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250km를 완주한 건 내 힘이 아니라 ‘신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은 ‘치유와 참회’, ‘극기와 연단’ 그리고 자아실현의 길이었다.

42세에 지리산 등반 도중 사망한 고정희 시인의 시(詩)다.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냐

그렇다! 외롭기로 작정해서 떠나온 길이다. 가다가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떠나는 길이다.

내일이면 아무도 반겨줄 이 없는 쓸쓸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굳세게 살자…….”
이번 도일주 도보여행이 내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은 이것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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