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일 시인, 두 번째 시집 ‘멍’ 발간

부정일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멍(한그루)’을 발간했다. 

도내 최장수 문학동인 한라산문학회를 이끄는 부 시인은 첫 시집을 펴낸 지 5년 만에 새로운 시집을 엮었다. 

표제 ‘멍’은 먼 산을 바라보는 늙은 시인의 멍한 눈길일 수도, 세상사에 부대끼며 멍든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멍’의 시간에서도 시심(詩心)을 잃지 않고 시를 써 내렸다.

이번 시집은 총 4부에 걸쳐 59편의 시가 담겼다. 

1부 ‘돌집에는 고로쇠나무가 있다’는 황혼기의 내면이 그려진다. 저물어가는 삶의 쓸쓸함 속에서도 시인의 결연한 의지와 원숙미가 담겼다. 2부 ‘공짜는 없다’에서는 반려견 자크, 깜보, 비타와 함께하는 일상이 녹아들었다.

3부 ‘멍’은 미수동에서부터 아무르 강변까지, 시인의 삶을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가 때론 애잔하게, 때론 날카롭게 그려진다. 4부 ‘동백꽃 배지를 달다’는 피해 갈 수 없는 제주4.3이 담겼다.


후박나무를 베다

삼사십 평 마당 한가운데 아름드리 후박나무가 있다 
원시림처럼 가지는 하늘을 덮어 습한 그늘은 
키 작은 식물을 키우지 못했다 
온실에서 노란 하귤 달고 마당으로 이사 온 나무는 
다 떨어져 열매는 보여주지 않고 
삼백 원씩 사다 깐 잔디는 흉내만 낼 뿐 
어디선가 날려 온 잡풀만 자랐다 

빌려온 기계톱이 윙윙거리고 
수십 년 마당을 지켜온 후박나무 정령에 대한 예우인가 
아내는 붉은팥과 거친 소금을 뿌렸다 
망설임의 끝, 
아마존 밀림의 거목을 베듯이 후박나무 벨 때 
북국의 빙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있을 자리에 있지 못한 이유로 
누군가는 영원할 것 같던 철의 밥통에서 낙마하고 
후박나무의 잘린 밑동은 볕 쬐는 의자가 되었다 

태양은 중천에 머물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갈색 선글라스 콧등 걸친 아내 
빨랫줄에 옷들이 펄럭이는 걸 보다가 
노란 열매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당을 걸었다 
원 그리며 천천히 걸었다


김정희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왜 하필 ‘멍’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한다. 15년 넘게 시를 썼으니 멍든 마음도 시가 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쓰임이 다해 마지막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온몸을 불태워 누군가의 추위를 녹여주는 폐목처럼 그는 따뜻한 사람이다. 시인은 따뜻해야 한다”고 소개했다.

양순진 시인도 추천사에서 “시인의 선연한 멍 자국을 본다. ‘글은 그 사람의 삶, 시(詩)는 그 사람의 영혼’이라는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며 증명하는 시인의 시 앞에서 숙연해진다”고 설명했다.

부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쓸쓸하지만 단단하고, 소소해 보이지만 무수한 결을 담은 시로 남은 생을 문학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부 시인은 “나란 놈은 빈껍데기로,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 평범하게 잊힐 사람인 것은 얼핏 봐도 사실”이라며 “누구나 나이가 들어 늙어갈 때쯤이면 오라는 곳은 줄고 갈 곳 또한 망설여져 멍하니 먼 산이나 보고 있는 뒷방 늙은이 같은 자신을 볼 때가 있다.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멍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한그루, 121쪽,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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