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73) 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저승이서 벌어당 이승이서 쓴다(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 저승이서 : 저승에서
  * 벌어당 : 벌어다(가)

   
해녀들은 바다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 해산물을 따오는 ᄌᆞᆷ수(잠수(潛嫂)를 말한다. 해녀들은 태왁을 집고 바다에 나가 수중 수십m까지 내려가 뿔소라와 전복을 따고 해삼과 문어을 잡고 미역을 캐어 온다. 풍파 속에서 특별한 장비도 없이 죽기 살기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열 살을 전후에 바다에 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바다를 밭으로 삼아 평생을 바다에 산다. 일진이 좋아 많이 따고 캘 수도 있지만, 일진에 따라서는 빈 망사리에 한숨만 가득 채우고 올 수도 있다.

예전에는 제주에 태어나면 으레 해녀를 하는 것으로 알아 운명처럼 바다에 들기도 했다. 젊을 때면 몰라도 늙으면 힘이 없고 숨이 차 힘든데도 날만 ᄇᆞᆯ면(잔잔하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침에 밭에 나가 일을 하다 가도 신들린 사람같이 달려왔다. 바닷속에서 많이 잡아 올려야 그걸 내어 팔아 가족을 먹이고 가용하고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한의 겨울철, 강풍이 몰아쳐도 검푸른 바다 위엔 해녀들의 태왁이 떠 있었다. 나이 6,70된 해녀는 늙은 축에도 못 끼었다. 80이 넘은 노인도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바다로 든다. 

몇 길 바닷속으로 내려 호미 쥔 손을 바삐 놀리다 숨이 차 급히 물위여 올라오며 내쉬는 ‘호오잇 호오잇’ 숨비소리는 얼마나 처절한가. 한 가닥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소리,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기사회생의 소리다. 

아차, 숨이 끊길지도 몰라 하다가 모진 목숨 살아났다는 생사가 교차되는 그 순간에 나오는 소리가 아닌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천당으로 되돌아왔다는 생명에 대한 확인으로 절박하게 내지르는 소리다.

제주 해녀들은 칠성판을 등에 지고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일단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살아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기가 막힌 한탄이다. 

어린 시절에 온 동네가 슬픔에 잠겼던 일이 떠오른다. 젊은 해녀가 전복을 따다 한참 만에야 물 위로 떴다 한다. 호미를 잡아맨 줄을 손목에 감아 전복을 따려는데 전복이 호미를 물어 놓아주지 않아 그만 숨이 끊겼다 했다. 해녀는 홀어머니였고 밑에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품에서 자란 두 아들, 그래도 꿋꿋이 자라 형은 1963년 사범학교를, 동생은 2년 뒤 교육대학을 나왔다. 나와는 기연(奇緣)으로 큰아들이 제주시 자취방에서 1년을 함께했던 추억이 있다. 한스러운 어머니의 최후가 가슴에 사무쳤을 것이다.
  
  ‘저승에서 벌엉 이승에서 쓴다’
  
  저승을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가. 험한 바닷속이 바로 저승이다. 그곳에서 채취한 해산물로 근근이 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생의 환희이니, 바로 이승이 아닌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다. 풍랑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녀들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고 절규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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