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7) 김창생, 서원오 옮김, ‘바람 목소리’, 봄, 2022.

김창생, 서원오 옮김, ‘바람 목소리’, 봄, 2022. 사진=알라딘.
김창생, 서원오 옮김, ‘바람 목소리’, 봄, 2022. 사진=알라딘.

1.
최근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웹드라마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 재일조선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 관심이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글로벌 시대의 현실에서 전 세계로 흩어져 살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정치역사적 및 사회문화적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파친코’의 대중적 인기는 의미심장하다.

물론, ‘파친코’ 외에도 좁게는 재일조선인과 넓게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다루고 있는 문제작들이 있다. 그중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재일조선인 작가 김창생의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창생은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조선인으로서 삶을 살다가 2010년 그의 부모님의 고향 제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러니까 김창생의 삶 자체가 디아스포라인 셈이다. ‘바람 목소리’는 김창생의 바로 이러한 디아스포라를 소설의 형식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문학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2.

마당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미쳐 날뛰듯 휘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설아는 생각했다. 저건 그냥 바람소리가 아니야! 저건 사람의 목소리, 울부짖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야! 그 속에는 내 것도 섞여 있어. 그리고 동아(冬芽)의 외침도!(10-11쪽)

작중 주인공 ‘설아(雪芽)’는 일본으로 떠난 지 “60년 만에 고향인 제주도로 돌”(10쪽)아와 자신이 겪었던 험난한 시간 속 삶을 톺아본다. 그런데 고향 제주에서 직접 듣는 ‘바람소리’가 ‘설아’에게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울부짖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다. ‘설아’는 또렷이 기억한다. 유년시절 해방공간의 제주에 불어닥친 전대미문의 폭력과 살욕(殺慾)의 광풍을……. 이 광풍 속에서 제주의 공동체는 무참히 유린‧해체‧붕괴되지 않았던가. 언어절(言語絶)의 이 대참사는 반인류적 제노사이드로서 ‘설아’의 집안도 예의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설아’의 가족이 겪은 4‧3의 수난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제주 여성이 4‧3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웅숭깊은 시선이다. 이것은 작품 곳곳에서 보석처럼 빛나지만, 4‧3의 혼돈 속에서 ‘설아’의 어머니가 남편과 자식을 살리기 위한 주체적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결행하는 장면과, 어머니의 결정으로 ‘설아’와 ‘동아’ 두 자매가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의 위험을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험난한 ‘재일(在日)의 삶’을 슬기롭고도 억척스레 살아간 모습 등은 제주 여성이 벼려온 삶의 강인한 의지와 분투가 바탕이 된 ‘생의 위엄’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설아’와 ‘동아’를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의 삶, 특히 일본 관서지방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오사카 지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구체적 삶을 만날 수 있다. 오사카 일대는 일본의 4대 공업지역 중 하나인 한신 공업지역으로, 제조업 중심의 공장에서 생산과 노동력의 상당 부분을 수행했던 게 재일조선인이었던 만큼 ‘바람 목소리’에서 신발 공장에서 일을 하는 ‘설아’와 그 지역에서 식당 일을 하는 ‘동아’의 삶은 이 지역의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생활사, 특히 재일제주인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문학적 재현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가령, 이곳에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데 제주의 전통 음식 중 하나인 ‘참기름 떡[油餠]’을 만드는 과정이 세밀히 서술되고 있는가 하면, 돼지의 내장 부속물을 양념구이로 먹는 장면 등은 ‘바람 목소리’에서 재현되고 있는 재일제주인의 생활사의 사례다. 

3.
물론, ‘바람 목소리’에는 재일조선인의 생활사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도 담아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정과 일본 정부는 1948년 3월 일본 전 지역에 ‘조선학교폐쇄령’을 내림으로써 조선인의 민족교육을 제도적으로 봉쇄 및 탄압하고자 했으나, 재일조선인은 이에 맞서 이른바 ‘한신교육투쟁’을 가열차게 벌였다. ‘바람 목소리’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주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작가가 ‘한신교육투쟁’을 주목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될 작가의 문학적 소명과 문학적 진실이 있다. 재일조선인 작가 김창생에게 ‘한신교육투쟁’과 ‘4‧3민중봉기’는 결코 별개로 분리될 수 없는 정치역사적 근인(根因)이 있다. 그것은 두 민중운동이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 지배권력에 대한 래디컬한 비판은 물론, 그 옛 제국의 권력을 대신하여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제국인 미국의 새로운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새 역사의 창조적 주체로서 민중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2차 대전 후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냉전체제에 대한 재일조선인 작가의 역사인식과, 이를 문학적으로 실천하는 작가의 산문정신의 결합의 산물이다. 바로 이것은 ‘바람 목소리’에서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를 살아낸 작가의 문학적 성취임을 강조해두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했듯이, 재일의 삶을 살고 있는 제주 여성이 보이는 4‧3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그 정치적 입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오사카에서 ‘설아’ 자매를 보호하고 있는 ‘설아’ 엄마의 절친 ‘시춘’의 분노다.

……그 하와이에서 돌아온 망령 난 영감탱이를 이 재봉틀에 다 묶어 놓고 재봉틀 바늘로 꼼짝도 할 수 없게 ‘달달달달…’ 박아버리고 싶다. 어디 한 방울의 물인들 줄까 보냐! 제주도에서 일어난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그 일들을 노망난 그 영감탱이한테 전부 다 갚아 줘야 해! 인과응보가 뭔지를 똑똑히 보여줘야 해!……(85쪽)

‘시춘’은 고향 제주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오사카에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전해듣는다. ‘4‧3민중봉기’에 대해 미군정과 한국 정부가 주도면밀히 전개한 폭력적 탄압 속에서 사라지고 죽어간 고향 제주 사람들의 수난에 대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시춘’은 허탈감은커녕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한신교육투쟁’을 경험해온 ‘시춘’에게 바다 건너 고향 제주에서 전해오는 이 끔찍한 소식은 ‘시춘’뿐만 아니라 재일제주인 디아스포라로 하여금 2차 대전 후 동아시아에 불어닥친 역사의 광풍이 정치적 관념태가 아니라 구체적 실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설아’는 이처럼 일본에서 4‧3에 대한 참상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정치역사적 요인을 점차 갈무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바람 목소리’는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을 살아간, 그리고 4‧3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추적해간 ‘설아’의 ‘역사성장소설’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여기에는 작중 후반부에서 ‘설아’가 4‧3무장대의 사령관 이덕구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을 이덕구의 외조카(4‧3당시 도일(渡日)하여 재일조선인의 삶을 살았음)로부터 직접 증언의 형식으로 듣는 대목이 한층 뒷받침해준다. 비록 이 대목은 소설적 재현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나, 작중에서 증언하고 있는 이덕구의 외조카는 ‘강실(1938~2015)’이란 실존 인물로서 이 대목 자체만으로 이 소설은 재일 디아스포라의 맥락에서 4‧3의 역사적 진실을 문학적으로 매우 밀도 높게 재구성하고 있다. 

제주도민들 가운데 열에 여덟은 그저 통일된 조국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 그냥 그것뿐이었어.(196쪽)

‘4‧3민중봉기’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 추구가 진행중임을 고려해볼 때, 래디컬하게 직면하는 문제는 위 소설적 표현에서 볼 수 있듯, ‘통일된 조국’을 향한 제주의 정치적 꿈이자 기획을 궁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4‧3의 역사적 주체로서 참여한 제주가 앙가슴에 품었던 ‘통일된 조국’은 어떤 세상일까. 이 문제는 두 가지의 거시 담론과 연관한 미시 담론 및 구체적 실천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나는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에 자행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주의를 어떻게 하면 온전히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하나는 2차 대전 후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재편한 냉전체제와 그에 따른 분단체제를 어떻게 하면 지혜롭고 슬기롭게 그리고 과단성 있게 헤쳐갈 수 있을까. 그래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에워싼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병진하면서, 이들 국민국가를 포괄하여 창조적으로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이 절실한 이유다. 

5.
끝으로, 이 같은 정치적 상상력은 어떤 대단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바람 목소리’의 결미에서, 제주로 귀환한 ‘설아’가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로서 익혔던 재봉틀 솜씨로 고향에서의 삶을 잘 살고자 할 뿐만 아니라 ‘설아’의 유년시절 4‧3 당시 가까스로 생존한 어린 ‘윤호’가 성장하여 행복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4‧3의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삶의 일상과 기획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예의 ‘통일된 조국’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음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바람 목소리’는 그래서 4‧3문학의 수작(秀作)이자 디아스포라 문학으로서 읽어야 할 ‘문제작’이다.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