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차별금지 싸움, 정치가 응답할 차례

편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여전히 반인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어선 안됩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 대상은 다르나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차별이나 혐오,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인권문제에 천착한 '인권왓 칼럼' 연재를 통해 인권활동가들의 현장 목소리를 싣습니다. [편집자 글]

윤석열 정권의 임기 첫날, 제주시청에서는 제2공항 백지화 도민결의대회가 열렸다. 제2공항 건설은 도민 의견을 따르겠다며 도민의견수렴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반대 의견이 더 높게 나왔으나 조속한 건설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원희룡 전 지사를 국토부장관으로 임명한 새 정권의 첫날이었다. 

멋진 집회였다. 선흘2리 동물테마파크와 싸워내고 있는 주민, 제성마을 벚나무 벌목에 항의하는 주민, 월정리 동부하수처리장 증설을 막아내는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거대 개발사업으로 마을주민들이 겪게 된 엄청난 갈등, 고향을 잃은 설움과 불통 행정에 대한 실망, 오·폐수를 줄일 생각은 않고 하수처리장만 늘리겠다는 행정의 통보. 과거의 부정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들이 정말 멋졌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올라온 어떤 노래는 집회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MC스나이퍼가 편곡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묵묵히 지켜만 보던 벙어리’, ‘여전히 부패한 이들은 술 마시며 숨통 조이는 닭장에서 버는 한두 달 봉급을 여자의 가슴에 꽂아주겠지’.
이 멋진 자리에, 왜 장애인을 비하하는 ‘벙어리’라는 표현이 무대에 올라와야 하나. 왜 이 자리에 여성을 그저 ‘가슴에 봉급이 꽂히는’ 존재로만 묘사하는 노래가 올라와야 하나. (MC스나이퍼의 다른 노래 <논현 랩소디>의 가사 전체가 여성 혐오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굳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제주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2일 오전 11시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국회의 차별금지법 4월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제주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2일 오전 11시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국회의 차별금지법 4월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수많은 대중매체에서는 부패한 남성 권력자를 표현하기 위해 왜 항상 ‘얼마나 많은 여성을 돈 주고 살 수 있는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반대로 부패한 여성 권력자를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남성을 구매할 수 있는지, 남성의 바지춤에 얼마나 많은 돈을 넣을 수 있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 권력을 우습게 만드는 방식은 오히려 그 여성의 누드를 그리거나, 남성 편력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방식에 가깝다. ‘한두 달 봉급을 가슴에 꽂아준다’는 가사가 권력자를 풍자하는 가사가 아니라, 그저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여성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벙어리’ 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이 장애에 빗대어져야 할까?

  벙어리와 가슴들의 싸움
1964년, 공무원의 요정 출입금지조치가 제주도에서 처음 해제되었다. ‘기생관광’으로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해 엔화 벌이를 하기 위해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엔화를 벌어야 할 때는 ‘애국자’, 외화벌이가 끝나자 ‘윤락녀’라는 잣대를 썼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제정 이후 제주의 ‘기생관광’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정작 성산업을 유지했던 국가와 지자체는 아무런 반성도 없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 이후 각종 기업들이 리워드처럼 보내주는 제주 관광은 70년대 일본 기업에서 단체로 보내주던 보너스 ‘기생관광’에서 달라졌는가? 천만에. 오히려 지금의 관광은 더 공고하게 여성 착취의 구조를 가중시키고 있다. 코로나로 관광이 위축되면서 여성들이 가장 먼저 잘렸다. 여성은 서비스업 분야에서 남성보다 43%의 임금을 덜 받고 있다. 테마파크와 호텔, 카지노에서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복장과 노동을 강요받는지를 생각해 보라. 성매매가 더이상 대놓고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제주지역 사회복지 예산은 수년째 22%대. 다른 광역단체들의 사회복지 예산이 30%를 넘어갈 동안 제자리였다. 6조원 넘는 한 해의 예산이 더 많은 관광객을 받기 위한 개발과 도로 건설에 쓰였다. 지금 제주의 휠체어 장애인들은 인도 폭이 좁아 위험하게 차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저상버스는 정차 위치나 버스 높이가 맞지 않는 문제로 이용이 매우 불편하다. 제주의 등록장애인은 인구의 5.4%인 3만 6876명인데, 정작 거리와 대중교통에서 장애인을 얼마나 만나 보았는가. 제주가 렌터카가 다니는 도로를 더 뚫을 동안, 어떤 도민들은 제대로 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서 가고 싶은 곳을 갈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는 거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들은 ‘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존재였던 적 없고, 여성들이 ‘가슴에 봉급이 꽂히는’ 것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적 없다.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를 비유하려고 사용된 ‘벙어리’, 그리고 부패한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가슴’들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지역의 미래는 제2공항이 없는 미래이기도 하지만, 여성을 수단으로만 사용해 오던 기생관광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미래이기도 하고, 장애인이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제 차별과 혐오를 멈출 시간
문재인 정권은 결국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뤄내지 못한 채로 임기를 마쳤다. 후보 시절 성평등을 실현하겠다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했지만, 공식 TV토론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이야기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관문 앞에서는 늘 사회적 합의와 시기상조를 내세울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을까? 

지난 3월 29일 열린 제주도의회 행자위 임시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혐오표현 방지 및 피해자 지원조례’ 가 올라왔으나 결국 심사 보류되었다. 이상봉 행자위원장은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으나, 이미 국민 대부분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는

지금, 대체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일까. 지난 15년간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늘 국회 앞에서 멈췄던 것처럼, 혐오표현에 대항해 온 ‘벙어리’와 ‘가슴’들의 오랜 투쟁의 역사 역시 도의회 앞에서 멈췄다.

지금 이 시각 국회 앞에서는 미류와 이종걸, 두 명의 활동가가 36일째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단식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단식이 담고 있는 건 15년 차별금지법 제정의 역사다. 시민들이 원하는 미래는 분명하다. 정치가 응답할 시간이다. 40년 넘는 ‘벙어리’와 ‘가슴’들의 싸움의 역사에 제주도의회가 제대로 응답할 시간이라는 거다. / 신현정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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