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94) 제주도는 더 이상 한반도의 변방이 아니다

사진=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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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아주 경이로운 책과 만났다. ‘양을라 종실 한라태자 종부정 대종회(회장 양인)’라는 긴 이름의 종친회가 펴낸 ‘탐라왕조실록’이다. 이 책은 저자(양인)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종실의 서고에 있던 종중기록물(족보 등), 사료 등을 모아서 엮었다.

책의 내용은 탐라왕국 개국 1세 양을라에서부터 마지막 왕인 109대 고자견까지의 왕조실록으로 4천여 년 동안 묻혀 있던 탐라왕국 이야기를 발굴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대단히 귀중한 사료라고 판단된다.

이 책의 신빙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3307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지만 문서로만 남은 고대국가 탐라국의 실체를 되찾아야 한다는 경각심에 불을 지핀 것은 사실이다.
몇 년 전 방문했던 오키나와의 옛 왕국, 유구국은 왕궁과 왕궁의 서고에 보관해던 사료들이 남아 있어서 유구국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유구국과 소멸 과정이 비슷한 탐라국은 한국·중국·일본의 문헌에 간략히 언급돼 있을 뿐, 유물이나 유적 등 문헌을 뒷받침할 만 한 물증이 전혀 없다.

실증주의 사관이 아니더라도 실물이 전혀 없는 역사는 공허하고 설화와 혼동하기 쉽다. 실증이 중요한 건 죽은 역사를 살아 숨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에서 ‘탐라왕조실록’의 발간은 그 의미와 파장이 결코 작지 않다.

제주도에서도 탐라국의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한때 있었다. 신구범 지사 재직시인 1997년에 국내외 사학자로 구성된 ‘제주사 정립 추진 위원회’가 발족되었고 ‘탐라국 시대사 정립’ 등의 연구 사업을 추진하다가 신 지사가 퇴임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제 와서 탐라사를 복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의 후손들에게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다. 탐라국은 제주인의 정신적 고향이자 뿌리이므로 향토사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제주인의 자긍심과 자존감은 여기서 배태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탐라사의 복원은 탐라정신의 부활이다. 그동안 제주정신으로 거론돼 온 ‘삼무·조냥·수눌음’에 송성대의 해민정신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탐라정신의 엑기스는 ‘개척·협동·도전’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번영을 이룩한 개척,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협동, 해양왕국을 건설한 진취적인 도전이야말로 탐라정신의 중핵이다.

셋째, 탐라정신을 발판으로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한반도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복작거릴 때, 우리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제주섬은 유라시아 대륙과 해양의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정학적·지경학적 이점이 있고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윤명철의 ‘동아 지중해론’을 뛰어넘는 담대한 계획, ‘21세기 제주구상’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 구상 속에 일본-중국-러시아-유럽을 잇는 육상·해상 실크로드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탐라 해양 왕국을 재현하는 ‘新 대항해시대’를 열어야 한다.

고대의 탐라인들은 뛰어난 조선술·항해술·외교술·상술로 탐라섬을 동아시아 물류 허브,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탐라인의 DNA를 물려받은 제주인이 무엇인들 못할까?

과거는 미래의 이정표다. 과거를 알면 미래의 길이 보인다. 많은 역사가들이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주장한다. 역사를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되새김질하기 때문이다. 탐라국의 역사도 21세기 역사로 치환할 수 있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도 미래의 찬란한 역사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언젠가 웅대한 꿈을 지닌 탐라의 후예 중에 세계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위대한 코스모폴리탄이 탄생할 것이다. 제주도는 더 이상 한반도의 변방이 아니다. 지구의 중심이요, 우주의 옴팔로스(omphalos, 배꼽)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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