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75) 사람과 쪽박은 있으면 있는 대로 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족빡 : 쪽박, 작은 박
* 시민 신 대로 : 있으면 있는 대로


일을 하는 데는 갖가지 연장이나 자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재료와 연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결국 사람이 일을 한다.

일이란 게 한두 가지인가. 세우고 짓는 일, 만드는 일, 큰일, 작은 일, 어려운 일, 쉬운 일로 다양하다. 다시 말하면 일에 따라서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하지 일이 힘들어 사람이 못하지 않는 법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될 것이다. 

능력에 따라 다 적재적소가 있다는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말이다. 사람이 필요한 일이 다양하게 있는 것처럼 쪽박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생활에 긴요하게 쓰이는 용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쌀을 퍼내는 쪽박만 해도 용처에 따라 크고 작은 것들이 수없이 많다. 작다고 내버리거나 너무 크다고 투덜댈 게 아니다. 살다 보면 쓸 데가 생겨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아돌면 남아도는 인력을 놀릴 게 아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 몫을 하도록 일을 찾아 맡겨야 한다. 쪽박이라는 그릇 또한 쓸 만한 일에 쓸 수 있게 궁리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우리 선인들, 궁핍한 가운데 구차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실생활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던 옛 분들의 삶의 모습을 이 말에서 대하게 된다. 집안 어른인 노인네가 할 일은 당신들이 찾아서 했고, 아이들 부모에게는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게 있음은 물론, 손자 손녀들에게도 자잘한 일을 해 돕도록 했을 게 아닌가.

1987년 제주에서 촬영한 보리베기 모습. 사진=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1987년 제주에서 촬영한 보리베기 모습. 사진=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며 검질도 매고 조와 보리도 베고 고구마도 파 보았다. 타작을 위해 도리깨질도 도왔음은 물론이다.

고구마를 거둬들이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먼저 어른이 줄기를 걷었다. 흙 속에 뿌리 박힌 것이라 무척 힘들 뿐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요령이 필요했다. 다음으로 호미로 흙 속에 묻혀 있는 고구마를 파야 한다. 어린 내게 주어긴 일은 어른이 걷은 줄기를 조금씩 모아 놓는 것. 마소의 먹잇감이다. 그러는 동안 네다섯 식구가 고구마를 파서 멱서리나 포대에 담아 놓고 마차에 실었다. 

분업 형식으로 갈라 맡아 하면 진행이 순조롭고 능률도 올랐던 것 같다. 사람이 있는 곳엔 일이 있는 법이다.

‘사름과 족빡은 시민 신 대로 쓴다’

특히 한 사람, 한 손이 아쉬운 농번기에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추수할 때 가장 원수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다. 고구마를 한참 거둬들이는데 큰비가 오면 비에 젖어 저장에 군 일거리가 생기지 않는가. 한 사람의 손이 아쉬운데…

사람과 도구는 다 용처가 있음을 되새길 때, 절실히 다가오는 말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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