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제주4.3 호적 불일치, 국가 폭력서 비롯…국가가 나서야

제주4.3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 보상금 지급을 앞두고 호적 불일치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행정안전부와 대법원, 제주도 등의 긴밀한 협력이 요구된다. 유족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마지막 소원을 푸는 일이다.  ⓒ제주의소리
제주4.3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 보상금 지급을 앞두고 호적 불일치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행정안전부와 대법원, 제주도 등의 긴밀한 협력이 요구된다. 유족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마지막 소원을 푸는 일이다. ⓒ제주의소리

악의 무리를 일소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에게 법 따위는 안중에 없다. 법은 고사하고 말 보다도 항상 주먹이 앞선다. 그에게 법은 오히려 단죄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음을 항변하려는 뜻일 게다. 주인공들은 종종 법의 무기력함을 탓하기도 한다. 

분명 초법적임에도 불사조 같은 주인공의 활약상을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통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응징의 대상이 당해도 싼 악당이기 때문이리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시절이 제주에도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4.3의 참극이 벌어졌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당시 군·경은 법 위에 군림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한 서북청년단도 있었다. 그때는 국가가 앞장서 폭력을 조장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수많은 도민이 힘없이 스러졌다. 그 수가 약 3만명에 이른다. 영화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때려잡아야 할 악인이 아니라 무고한 백성이었다. 

역대 몇몇 대통령이 여러차례 사과했듯이 당시 공권력은 초법적이었다. 백성을 지켜줘야할 국가가 이럴진대 도민들은 말그대로 숨 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당시 호적(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이 사실과 다르게 등재된 도민이 많은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사망 또는 행방불명으로 인한 호주(戶主)의 부재도 호적을 뒤틀리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호적에 잘못 올린게 위법이라면, 그건 국가가 그렇게 내몬 탓이 컸다. 

호적을 바로잡는 것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고나 할까. 

또 한가지. 호적 불일치가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4.3특별법 개정으로 국가 보상을 앞두고 있어서다. 다음달 1일 보상금 지급 신청 접수가 시작된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엉뚱한 사람이 보상금을 받게되는 불합리가 빚어질 소지가 있다. 

이러면 곤란하다. 보상금은 실제 유족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70여년 전 상처를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킨 유족들에게 또한번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난해 12월 제주4.3희생자유족회 주최로 열린 ‘4.3사건으로 인한 호적 불일치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 당시 발표된 호적 불일치 사례들은 70년 넘게 ‘나’없이 살아온 민초들의 고난의 기록 그 자체다. 

1947년생 송모씨(여)는 4.3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호적에 ‘할아버지의 딸’로 올라갔다. 졸지에 아버지와 남매지간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실제 동생, 그러니까 송씨의 작은 아버지가 그동안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다가 몇해전 돌아가신 후로 송씨가 직접 모시고 있다. 4.3유족으로 등록은 안된 상태다.

1948년생 이모씨(여)는 자신이 태어난 날 저녁에 아버지를 잃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다. 호적에는 작은 아버지의 딸로 등재됐다. 역시 유족 등록은 안되어있다. 

묘 이장 과정에서 자신이 아버지의 실제 딸임을 입증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유전자 20가지 중 4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유해가 바뀌었나 싶기도 하지만, 두 번이나 묘를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씨의 소원은 자신을 아버지 호적에 올리는 것이다. 

4.3으로 인한 호적 불일치는 단순히 개별 가족사의 문제로 볼 사안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국가의 폭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행 법규는 유족들에게 법적 절차를 통해 ‘알아서’ 가족임을 증명하라고 하고 있다. 너무 가혹하다.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와 인지청구의 소. 이름도 생소하거니와 결과를 낙관하기도 어려운 두 건의 소송, 이걸 다 거치고 오라는 식이다.

이것도 어찌보면 일종의 갑질이다. 국가가 먼저 위법을 저지르거나 위법을 조장해놓고 뒤늦게 ‘법대로’를 부르짖는 형국이다.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4.3특별법에 호적 정정의 길을 열어두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딴청을 부리고 있다. 

2021년 5월27일 개정된 대법원 규칙(4.3특별법에 의한 가족관계 등록 사무처리규칙) 제2조에 호적 정정의 대상자를 ‘희생자’로 한정시켜버렸다. 호적이 잘못된 사람은 희생자가 아니라 ‘유족’이다. 더구나 희생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규칙 개정 후 1년이 흐르는 동안 수없이 제기된,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모를리 없을 텐데 여태껏 조항을 놔두고 있다. 

뒤늦게나마 행정안전부가 움직이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으로 하여금 ‘제주4.3사건 가족관계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을 내오도록 했다. 연말쯤이면 호적이 일치하지 않는 유족들에 대한 구제 방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4.3특별법과 시행령 상의 미흡한 부분을 손질하든 대법원 규칙을 고치든 단 한 사람의 억울한 경우도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행안부와 대법원, 제주도 등은 숭고한 과업 앞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 

유족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마지막 소원을 푸는 일이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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