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76) 사람 늙으면 개 된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늙으민 : 늙으면, 늘그막에 이르면
* 사름 : 사람
* 됀다 : 된다


생명 있는 것이면 다 그렇지만, 사람도 늙으면 행동에 젊었을 때 않던 이상한 징후들이 나타난다.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기운이 빠지고 일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간다. 그뿐인가. 신체적인 퇴행에 정신까지 흐려지면서, 전에 없던 헛걱정이나 공상 또는 잡념으로 밤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늙신네는 밤에 좀이 엇나. 동짓돌 진진 밤인 좀이 돌아나비영 호루 밤 보내기가 촘말로 힘이 든다. 느네도 늙어 보민 알거여(늙은이는 밤에 잠이 없다. 동짓달 긴긴 밤엔 잠이 달아나 버려 하룻밤 보내기가 참말로 힘든다. 느네도 늙어 보면 알 거다).”

노인에겐 힘이 없다. 노후를 개탄하며 하는 말이다. 사진은 1970년대 제주에서 촬영한 낮잠 자는 노인. 사진=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노인에겐 힘이 없다. 노후를 개탄하며 하는 말이다. 사진은 1970년대 제주에서 촬영한 낮잠 자는 노인. 사진=서재철, 제주학아카이브.

잠이 안 오면 자연히 백이면 백 배가 출출하게 마련인 게 사람의 생리현상이다. 입에 고인 침을 꿀꺽꿀꺽 삼키지만 삼킬수록 견디기가 힘들어 간다. 배고픈 것은 좀체 참지 못한다. 

긴 긴 겨울밤, 찬바람에 눈이 나부낀다고 대수랴. 허리춤을 올려 입어 가면서, 살금살금 기어나와 우영팟(텃밭)에 들어가 놈삐(무) 하나를 뽑아 손으로 문질러 가며 입에 놓아 바삭바삭 씹는다. 

아니면 감저 눌(고구마를 저장하는 구덩이)에 가 팔 한 짝을 깊이 집어넣어 고구마 서너 개 꺼내어 입에 넣어 배고픔으로 데모(?)가 한창인 창자를 진정시켜야만 한다. 그야말로 꿀맛일 터이다.

다들 잠든 밤, 누가 볼 것도 아니다. 체면 불고하고 제일 안전한, 완벽한 것이 이 두 가지 방법이다. 

제주의 겨울 날씨가 그렇게 순탄하기만 한가.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강풍이 몰아닥칠 양이면 밖에 나가기는 다 글렀것다. 이 경우가 문제다.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식구들이 다 잠에 빠진 트멍(틈)을 이용해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다른 재간이 없다. 숨죽여 가며 솥뚜껑을 열어보고 찬장을 뒤져보고…. 아뿔싸. 컴컴한 밤중이라, 그만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잠기 빠른 한 식구의 입에서 다급한 소리가 튀어나오고야 만다. 

“아이고, 정지에 도둑개 들었져. 요놈의 도둑개!” 

혼비백산, 간신히 방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가장 체면은 둘째치고 이 무슨 개망신인가 말이다. 자식 아니면 안사람에게서 ‘도둑개’라 불린 게 아닌가. 늙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신체 처량할 수가 없다. 

'사름 늙으민 개 됀다.'

노인에겐 힘이 없다. 노후를 개탄하며 하는 말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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