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6) 할망장터에서 만난 김갑순 어르신 이야기

5월의 제주, 제주시민속오일시장 할망장터에는 싱그러운 제주의 산, 들, 밭의 향기가 가득했다. 내가 할망장을 좋아하는 백 가지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것일 것이다.

“제주의 할머니들과 스스럼없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

여느 때의 오일장이 그렇지만 계절의 여왕인 5월의 오일장은 유독 향기로운 제주 자연으로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할망장 14번 좌판의 할머니는 산으로 들로 나가 캐오신 야생먹거리로 가득히 좌판을 펼치셨다. 양애순, 두릅, 야생 제피, 야생 달래순, 산취나물, 야생 방풍, 쑥부쟁이, 민들레, 원추리가 좌판에 깔려 있었다. 이미 단골층이 두터운지 손가락 마디만큼이나 굵은 고사리는 겨우 한 소쿠리만 남았고 보리탈(산딸기)은 이미 아침 일찍 다 팔렸단다. 

제주시 민속오일시장 할망장터에 봄나물향이 코를 찌른다. 양애순, 두릅, 야생 제피, 야생 달래순, 산취나물, 야생 방풍, 쑥부쟁이, 민들레, 원추리 등이 좌판에 자리를 잡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시 민속오일시장 할망장터에 봄나물향이 코를 찌른다. 양애순, 두릅, 야생 제피, 야생 달래순, 산취나물, 야생 방풍, 쑥부쟁이, 민들레, 원추리 등이 좌판에 자리를 잡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단골로 찾는 할망좌판에 나온 깅이노란콩장. 바닷가 돌틈의 작은 게를 잡아 메주콩장에 절인 메뉴인 '깅이노란콩장'은 다른 밥반찬이 없어도 밥을 부르는 밥도둑이다. 

자주 가는 단골 할망좌판에선 깅이노란콩장을 늘 만날 수 있다. 짜지도 않고 밥을 부르는 밥도둑인 이 깅이콩장은 내가 입맛이 없을 때 늘 한 봉지씩 사서 가는 애정하는 제주의 밥반찬 메뉴이다. 

할망장터 할머니들의 인기 새참거리로 3000원 짜리 열무국수가 있다. 이 국수를 만들어 파시는 분은 애월읍 고성2리 부녀회장을 오랫동안 하셨다는 어르신이다. 이 할머니가 준비해 온 열무국수는 이날은 아쉽게도 일찌감치 마감되었다고 한다. 전에 먹어본 경험이 있는 그 할머니의 단돈 3000원 짜리 열무국수는 경기도식 국수였는데, 제주로 이주해 오고 부녀회장까지 하셨다니 제주에서 어떤 삶을 사셨을지 나중에 꼭 여쭈어 보고 싶었다.

할망좌판에 앉아 어르신이 직접 차려주신 국수의 맛은 정말 어디에서도 먹어볼 수 없는 맛이었고,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분위기와 정취였다. 할망장만 한바퀴 돌아도 제주의 보물같은 제철 식재료와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 특별히 장볼거리가 없더라도 시간이 맞으면 꼭 가는 편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유독 내 눈에 들어온 노랗고 큰 과일. 하귤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팔삭” 팔삭이었다. 

오일장 할망장터 좌판에 나온 팔삭 귤. 먹음직한 노란 팔삭 앞에 '난 하귤이 아니라 팔삭이예요'라는 의미인듯 '팔삭'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았다. 그 옆으로 '자뭉맛'이라고 조그많게 쓴 글씨가 눈에 띈다. 아마 '자몽맛'의 오자인 것 같다. 그 오자마저도 정겹다. 
오일장 할망장터 좌판에 나온 팔삭 귤. 먹음직한 노란 팔삭 앞에 '난 하귤이 아니라 팔삭이예요'라는 의미인듯 '팔삭'이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았다. 그 옆으로 '자뭉맛'이라고 조그많게 쓴 글씨가 눈에 띈다. 아마 '자몽맛'의 오자인 것 같다. 그 오자마저도 정겹다. 
"돈 벌러 나오는 게 아니야, 나는 오일장에 나오면 엔돌핀이 돌고 너무 좋아." 말뿐이 아닌 사는 손님도 기분 좋게 만들었던 어르신의 할망장 좌판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나도 팔삭이라는 품종은 나이 서른살이 넘어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지인이 노지에서 키우는 달래밭에 심어 둔 팔삭을 따가라고 연락이 왔고 그렇게 처음 팔삭이라는 귤을 만나게 되었다. 지인께서 자몽이랑 맛이 똑같다며 청을 담가도 좋고 알맹이만 분리해서 꿀을 넣고 시원하게 마시면 좋다고 알려주었다. 

할망장에서 본 팔삭에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팔삭 옆에 작고 귀엽게 적혀진 '자뭉맛'이라는 단어였다. 하하. 자몽도 아니고 자뭉이라고 쓰고 강조하느라 동그라미까지 쳐 놓았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오일장 할망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귀여운 글씨. 이걸 보고서도 팔삭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 팔삭 2킬로만 주세요.”

“예~”

웃으시며 좋은 상품의 팔삭을 골라 담아주시는 할머니 얼굴을 그제서야 가만 보니 젊어도 너무 젊어보이셨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여쭈었다. 수줍게 웃으시더니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저요? 78세요.”

“정말요? 78세로 전혀 보이지 않으시는데요? 할망장에는 65세부터 팔 수 있다고 알고 있어서 그 정도 연세로 봤어요.”

정말 이제야 갓 할망장에 들어올 수 있는 나이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무엇보다도 동안의 외모도 그렇지만 어르신의 생기있고 싱글생글 웃고 있는 그 표정이 상대로 하여금 너무 기분 좋게 만들고 계셨다. 그래서 어르신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1945년 7월 서귀포 강정동에서 태어난 김갑순 어르신은 사실 나이 칠십이 넘을 때까지 평생 농사라고는 단 한번도 지어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농사를 시작한 지는 이제야 5년, 그리고 오일장에 나온 지는 3년 정도 되셨다고 한다. 나와 이야기 나눈 그 날은 오후에 하나로마트 2층에서 영농인 교육이 있다며 서둘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야말로 새내기 농부이자 새내기 상인이셨다.

그래서 제주시 민속오일시장이 아닌 서귀포오일장 할망장터에서 다른 장날 다시 만난 김갑순 어르신은 이날은 오전 10시부터 나와 계셨다. 그 전에 이미 좌판을 펼친 어르신도 계셨고 아직 개장 전인 좌판도 보였다. 그런데 김갑순어르신은 좌판을 펼칠 생각은 없어 보이셨고 옆 좌판의 어르신과 계속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셨다. 어르신과 구면인 나는 반갑게 가서 인사를 드렸다.

“제주시 오일장에서 봤던 그 분이네요. 음식이야기는 나보다 이분께 물어봐요. 이분은 나도 젊었을 때부터 잘 알던 어른인데요. 오끼(남원읍 의귀리, 옷귀-衣貴)에서 생길이(무말랭이)를 크게 하셨던 분이에요.”

“의귀리에서 무말랭이 크게 하셨어요?”

“아니, 젊은 아가씨가 오끼도 알고 생길이도 알고, 요망진 아가씬게~.”

강정 솔동산 토박이로 한 번도 제주 밖을 나가 살아본 적이 없으시다는 김갑순 어르신의 말은 제주어보다는 표준어를 더 구사하고 계셨고 단어선택이나 화법도 이제껏 내가 봐 왔던 어르신들과는 달랐다. 처음 뵌 날, 살짝 젊었을 때 피아노 학원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김갑순어르신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더 궁금해졌다.

“아까 오끼(위귀리)에서 생길이 했다는 저 어른은 우리 아버지랑도 관계가 있어요. 젊었을 때  알던 분이셨는데 내가 할망장 나오면서 50여년만에 또 만나게 되었어요. 사람 인연이 정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겠어요.”

강정동에서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김갑순 어르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사실 부모님께서 결혼 후 3년 동안 아이가 없다 귀하게 얻은 장녀가 바로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이 강정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두 명의 동생이 모두 천연두를 앓다 잃은 터라 부모님은 더욱 어르신을 애지중지하며 키우셨다 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초등학교 1학년까지 아버지가 갑순이를 업고 교문 앞까지 등교시켰단다. 하교할 시간이 되면 학교 친구들이 어르신의 집으로 지나가면서 어르신의 아버지에게 “갑순이 기다렴수다.”라고 외치면 아버지는 부랴부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학교로 뛰어가 갑순이를 업고 집에 왔을 정도라고 하니 어르신 아버지의 내리사랑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학교로 뛰어가는 어르신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김갑순어르신의 아버지는 서귀포에서 유명한 큰상인 중 한 분이셨다고 한다.

서귀포오일장에서 만났던 생길이를 크게 하셨다는 여자삼춘도 아버지와 관련이 있으시다고 했다. 어르신의 친정아버지는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과 소라를 수매하고 전복과 소라공장으로 납품하며 상인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마 살아계셨으면 지금 97세가 되셨을 거란다. 제주산업발전의 선구자이자 산남 제일부자로 알려진 강성익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가 설립했던 “강성익 통조림공장”에 소라와 전복을 납품했던 상인이 바로 김갑순 어르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강성익 통조림공장에 소라와 전복을 납품하면서 사업을 시작하신 어르신의 아버지는 당시 오끼(의귀리), 가시리, 수망리 무가 맛있다고 알려져 있던 터라 그 무를 말려 만든 생길이, 즉 무말랭이도 전량 수매해서 군으로 납품하면서 사업의 규모를 점점 늘리셨다고 한다. 그 시기가 아마 김갑순어르신이 20대 즈음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때 아버지에게 오끼 생길이를 파셨던 분이 바로 서귀포할망장에 나와 계신, 김갑순 어르신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이었다. 

4월이 되면 어르신의 친정아버지는 서귀포 중산간에 천막을 치고 사람을 구했다. 그리고 커다란 솥을 몇 개나 걸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봄에 고사리를 꺾어 천막으로 가져오면 천막에서 며칠이고 살면서 사람들은 그 고사리를 삶고 들판에 말렸다. 그렇게 말린 고사리도 어르신의 친정아버지의 손을 통해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김갑순 어르신은 천막을 쳤다고 했는데 아마 우리가 아는 행사나 축제에 쓰는 천막이 아닌 임시거처를 위한 가건물 형태의 천막인 것 같다.

1900년대 중반, “제주 까망도새기가 맛있다”라는 이야기는 도 외에도 퍼져나가 제주재래종 돼지의 인기도 높았다고 어르신은 말씀해 주셨다. 어르신이 표현하신 “제주까망도새기”도 어르신의 친정아버지의 손을 통해 육지로 팔려 나갔다. 어느 날 늘 보내던 대로 돼지들을 배에 실었다. 그날따라 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친정아버지는 돼지만 배에 싣고 보내고 제주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배는 다시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70년 12월 14일 17시 부산을 향해 출항했던 남영호가 다음날 새벽 거문도 동쪽 해상에서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족 모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고 했다. 

내로라하는 큰상인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김갑순어르신의 유년시절은 부족한 것 없이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저와 제 어머니는 밥 한번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집에 밥 해주시는 분께서 두 분이나 계셨고요. 강정초를 나와서 서귀여중, 남주고(당시에는 남녀공학이었다.)까지 다녔지요. 학창시절 전체 1등은 늘 저였어요. 공부도 곧잘 했답니다. 조부모님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집이라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너무 좋아 아버지께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당시에 서귀포에서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피아노과는 이화여대밖에 없던 시절이라 제주에서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아버지 덕분에 피아노레슨도 받았어요. 저는 책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어요. 책을 좋아해서 꿈은 법관이나 판사였어요.”

김갑순어르신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여자가 너무 많이 공부하면 시집을 못 간다고 대학진학을 극구 반대하셨다. 너무 대학을 가고 싶었던 김갑순어르신은 집을 나와 제주시로 상경했다. 주머니에는 늘 아버지가 주신 용돈이 충분했기 때문에 당시 7000원이었던 제주대학교 학비를 내고 아버지 몰래 제주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효돈 출신인 현학순 교수님께서 방 하나를 내어주셔서 교수님 댁에 살면서 꿈꿨던 대학 생활을 하려는 찰나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어르신은 아버지를 간호하러 강정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그 정성 덕분이었을까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완쾌되셨고 장녀인 김갑순어르신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아버지 일을 2년 정도 배우게 되었다. 서귀포오일장 할망장터의 의귀리 어르신도 그  때 알게 되셨던 거라고. 그렇게 법관이 꿈이었던 소녀 김갑순은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일을 거들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단다. 하지만 26세 결혼을 하며 어르신은 또 다른 인생을 살 게 된다. 

“나는 돈이 아깝지 않은 유년 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집은 그냥 주어지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 집은 누구나 그냥 주어지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피아노만 치고 책만 읽던 젊은 시절의 손은 시집을 간 후 생계를 이어가고 돈을 벌어야 하는 데 사용해야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저에게 늘 했던 말이 생각났죠. ‘사람에게는 거짓말해도 땅이 다 듣는다. 그 땅이 잊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절대 정직해라.’ 제 친정아버지는 동네에서는 고집쟁이, 교회에서는 대나무라고 말할 정도로 대쪽같았어요. 한번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죠. 그리고 정직하고 거짓말이 없으셨어요. 사업하실 때 일명 큰사람들이라고 불렸던 분들도 우리 아버지를 인정해 줬다고 했어요. 팔십이 가까워진 나를 돌이켜보니 어쩐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네요.”

드라마같은 어르신의 결혼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지금 할망장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에너지를 주는 삶으로 이어졌는지 나는 더 들어보았다. 다음편에서 어르신의 인생 후반부 이야기가 이어진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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