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9)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역,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주도민들은 제주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환경과 쓰레기 문제를 꼽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생태 환경은 제주도의 지역적 정체성이자 핵심적인 경제 자원이다. 그러나 그보다 자연 생태는 삶의 터전 그 자체라는 점에서 어떤 수단이 아니라 제주살이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기후 위기, 기후 변화로 벌어지는 문제들이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펼쳐지는 지역이 제주도다. 지구적 생태 위기라는 사태 속에 한반도의 최전선에 제주가 위치한다.

이 ‘트러블’의 시대에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진지하고 유쾌한 사유를 펼쳐내는 ‘과학-예술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책의 저자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raway)는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에 1985년 「사이보그 선언」으로 이른바 사이보그 페미니즘, 테크노 페미니즘을 출현시키며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과학자이자 페미니즘 사상가, 문화비평가로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지식과 사유를 종횡무진 융합하여 새로운 대안적 사유를 제시해왔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아이콘인 사이보그는 20세기 말보다는 오늘날 더 와닿는다. 그녀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 나가는 실천적 사상가인 것이다.

해러웨이는 우리 시대를 “어지럽고 불안한 시대, 뒤죽박죽인 시대, 문제 있고 혼란한 시대”(7쪽)으로 이해한다. 특히, 우리 시대는 인류세(Anthropocene)나 자본세(Capitalocene),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불리는 생태적 위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인간이 방사능과 플라스틱, 닭뼈와 같은 것들이 지금의 지층적 특징이라고 할 만큼, 인류가 지구의 지질학적 힘으로 작용하는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의 파괴적 힘을 자성하기 위해 제안된 긴급한 용어이다.

나아가 생태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기원한다는 점에서,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노예 플랜테이션 시스템이 종종 인류세를 만든 변곡점이라고 언급되는 탐욕스러운 탄소와 기계 기반 공장 시스템의 모델이자 원동력”(292쪽 미주 5.)이라는 점에서 해러웨이와 동료들은 플랜테이션세(Plantationocene)라는 이름을 제안하기도 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생태 위기의 원인으로 보편적 인류를 상정한다. 그러나 생태 위기를 만들어낸 책임이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문제의식도 있다. 실제로 미국, 중국, 한국과 같은 산업 국가들과 저개발 국가가 똑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인류세 담론은 점점 널리 알려지면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그에 따라 계속 인류세에 대한 대안적인 명명법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생태 위기와 기후 위기의 시대를 호명하는가 하는 문제는 위기에 대한 인식과 원인 분석, 대안적 실천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나 플랜테이션세와 같은 명명을 선호한다. 게다가 이것도 부족했는지 하나의 이름을 또 제안한다. ‘쑬루세’(Chthulucene)라는 이상한 발음과 철자의 이름을. “이것은 그리스어 크톤khthôn과 카이노스kainos의 합성어로, 손상된 땅 위에서 응답-능력을 키워 살기와 죽기라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배우는 일종의 시공간을 가리킨다. 카이노스는 지금, 시작의 시간, 계속을 위한 시간, 새로움을 위한 시간을 의미한다.”(8쪽) 

쑬루세는 해러웨이가 캘리포니아 삼나무숲에서 만난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라는 거미에서 이름을 따 왔다. 이 이름에 ‘땅’(크톤)이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고, chthonic(땅에 사는, 지하 신들의)이란 단어의 발음[θɑ́nik]을 따른다. 피모아 크툴루의 이름이 호러와 SF 작가인 H. P. 러브크래프트의 신적인 괴물 크툴루에서 왔지만, 이 작가의 여성 혐오와 인종주의를 꺼려 살짝 철자를 바꿨다. 

쑬루세라는 단어로 해러웨이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그녀는 인류세(Anthropocene)와 자본세(Capitalocene) 문제에 대한 두 가지 방식의 반응에 대해 비판한다. 첫 번째는 기술적 해법에 대한 믿음이고, 두 번째 반응은 이미 ‘게임 종료’라는 식의 비관주의이다.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 올바른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쑬루세는 인류세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실천이자 희망을 담은 용어이다. 

쑬루세의 주인공들은 이 땅 밑에 살아가는 존재, 땅에 뿌리박은 것들이다. 땅과 흙은 지구와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포스트휴머니즘이란 기호 아래 학문적 실천을 해왔지만, 다른 용어를 유희적으로 제안한다.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아니라 퇴비(compost)를, 인문학(humanities) 대신에 부식토학(humusities)이다. 이 책의 사상을 요약하면 ‘쑬루세의 퇴비주의’가 되겠다. 

“‘대학의 자본주의 구조조정 속 인문학의 미래’에 관한 학술대회가 아니라 ‘거주가능한 복수종들의 뒤죽박죽을 위한 부식토학의 힘’에 관한 학술대회를 상상하라!” (국역본 61쪽을 참조하고 수정하여 원서의 32쪽 내용을 서평자가 번역)

흙 속에는 뒤죽박죽 여러 생명체들이 뒤엉켜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흙에서 왔다. 이 삶과 죽음은 모노드라마가 아니다. 흙 속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함께 이어나가는 이야기이다. 함께 이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나가는 실뜨기 놀이(string figures)와 같다. “실뜨기는 이야기를 닮았다. 실뜨기는 참여자들이 취약하고 상처 입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든 패턴을 제안하고 실행한다.”(21쪽)

해러웨이는 쑬루세 시대의 공생적인(sympoietic; 이 책은 심포이에시스sympoiesis를 ‘공-산’으로 번역했다.) 실천을 다채로운 의미를 함축하는 SF로 명명한다. SF는 해러웨이가 좋아하고  대안적 사유의 원천으로 삼는 과학소설의 약어이기도 하다. (해러웨이는 2011년에 SF연구협회로부터 SF 학술 분야의 평생 공헌에 주어지는 순례자 상을 받았다.) 하지만 단순히 특정 문학 장르나 장르 텍스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SF는 또한 동시에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지금까지so far”(10쪽)를 의미한다. 과학-예술이자 스토리텔링으로서 쑬루세 시대에 함께 살아나가기 위한 다양한 사유이자 실천을 의미한다.

이 책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에 이은 ‘쑬루세 선언’이다. 해러웨이는 실천적/유희적 사상가답게 각각의 선언문에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번 슬로건은 ‘아기가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이다. (이 책은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로 번역했다.) 인간들이 넘쳐나 지구 행성 시스템이 고장나버린 쑬루세의 회복을 위한 대안적 실천 구호다. 여기서 친족이란 혈연관계로 이어진 일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혈연이 아닌 대안적 가족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지하의, 혹은 퇴비 속에 온갖 생명체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현장을 생각해 보자. 지구 행성 위에 우리는 서로에게 반려종들(companion species)이다. “식탁에서 함께 빵을 나누는Cum panis 반려종.”(52쪽) 인간 너머 다양한 생명체들, 그리고 사이보그까지 우리의 친족이자 식구들로 확장된다. 지구적/생태적 괸당 만들기가 이 책의 궁리 대상이다.

이 책의 5장 「카밀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SF 소설 형식으로 쓴 SF(쑬루세의 실뜨기)의 실천 이론이다. 해러웨이는 이 사변적 상상력을, 과학소설의 팬 픽션이 아니라 공생 소설(sym fiction)로 부른다. 이 소설적 이론, 이론적 소설에서, 퇴비의 아이들은 동물 공생자(sym-biont)를 선택하여 함께 살아간다. 그들은 지구를 위해 인구 부담을 줄이고, 생태적 삶의 실천을 위해 과학과 예술과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이야기는 해러웨이가 쑬루세에 스토리텔링이 어째서 중요한지 보여준다. 우리는 뒤엉켜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며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 위해 이야기가 필요하다. 더 멋진, 더 새로운, 더 생명력 있는 이야기가.

# 노대원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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