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한라도서관 강요배 북토크...“예술 창작하기 뛰어난 제주, 경쟁력 있다”

2일 한라도서관이 주관한 강요배 화백 북토크가 제주문학관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2일 한라도서관이 주관한 강요배 화백 북토크가 제주문학관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저는 그림보다 더 큰 인생을 살고 싶어요. 그림은 인생을 사는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인생에서 하나의 소품 밖에 안돼요.”

50여년을 ‘그림 그리는 직업’으로 살아온 강요배 화백(70)은 무심한 듯 그러나 담백하게 털어놨다. 붓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제주를 대표하는 미술작가로 평가 받지만, 그럼에도 예술과 역사에 겸손한 자세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부단한 자기 쇄신을 중요히 여겼다.

지난 2일 오후 2시, 제주문학관에서 열린 제주시 한라도서관 주관 북토크 ‘풍경의 깊이’는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강요배 화백의 인생관·예술관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날 진행은 평소 막걸리를 나누는 절친한 선·후배 관계인 김수열 시인이 맡았다. 김수열 시인은 “내 시집은 평생 1쇄를 넘긴 적이 없는데, 강요배 화백의 ‘풍경의 깊이’는 어느새 1만권 이상 팔렸다”고 소개했다.

2020년 펴낸 강요배의 예술 산문집 ‘풍경의 깊이’(돌베개)는 저자가 20대 시절부터 써온 여러 가지 글과 그림 작품들을 함께 실은 책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BTS의 리더 ‘랩몬스터’가 자신의 SNS에 이 책을 소개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북토크는 김수열 시인이 ‘풍경의 깊이’에서 인상 깊은 대목을 소개하고 강요배 화백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림 속 두부와 오이를 어떤 이유에서 그렸는지 같은 비교적 사소한 질문부터, 빼놓을 수 없는 4.3에 대한 의견, 그리고 책에는 없지만 예술과 인생에 대한 고찰까지 두루두루 아울렀다. 이 과정에서 강요배 화백은 “진행자가 교사 출신이라 북토크를 수업하듯 진행한다”고 농담 섞인 핀잔을 주기도 했다.

북토크는 김수열 시인(오른쪽)이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북토크는 김수열 시인(오른쪽)이 진행했다. ⓒ제주의소리
북토크 현장. ⓒ제주의소리
북토크 현장. ⓒ제주의소리

강요배 화백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20대 어릴 시절에는 선과 악 같은 굵은 개념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고민에 빠졌고 관념적인 세계에 대해 빠져 있었다. 30대는 사회가 어떻게 됐나,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라는 질문에 집중했다. 나와 사회의 관계, 앞으로 내가 공부할 부분,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고, 요새 유행하는 예술과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고민했다. 그 결론이 30대 후반에 매진했던 4.3 공부였다. 40대에 들어서는 자연 공부였다. 답사를 통해 진짜 자연을 만나고자 했다. 50대부터 지금까지는 내적인 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미술 활동에 대해서는 “울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나 스페인 알타미라 벽화를 봐도 그때부터 인간은 상당한 미술적 재현을 보여줬다. 글자도 없던 시대부터 이미 그렇게 했던 것이다. 현대에 오면서 추상적이고 액션적인 것들이 가미됐기 보다는 이미 수 만 년전부터 인간의 예술적 표현은 재현적, 추상적, 행동적으로 몸을 써서 만들었다. 이것을 얼마든지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표현을 잘 써서 나타나는 좋은 작품을 볼 때, 관람객은 ‘아~’하는 감탄과 함께 느낌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좋은 작품에 좋은 감상이 뒤따른다”고 설명했다.

강요배는 예술 창작자들이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근면하면 잘한 것인가? 하루 종일 그림 그리고 작업하고 글을 썼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좋은가? 열심히 하면 됐지 하는 생각은 슬쩍 사진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다. 찜찜하지만 ‘이만하면 됐지, 누가 이렇게 열심히 해’라는 생각은 올바르게 부합하는 평가인가?”라고 물었다.

이어 “예술 창작은 저녁보다는 아침에 냉정하게 평가내리는 것이 좋겠다. 저녁은 피곤하기도 하고 핑계를 많이 만든다. 단점을 많이 잡아내야 개선하지 않겠냐”면서 “혹독한 아전이 꼬집듯 자기를 혹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추사 김정희의 말을 빌렸다.

강요배는 “검토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런 점을 솔직하지 못했구나’라고 알 수 있다. 이때는 적어도 더 이상 판단하지 말고 묶어두는 것이 좋다. 그림을 그려도 한 달 정도 지나서 꺼내보면 ‘내가 뭘 한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자기 객관화를 강조했다.

특히 "내가 나라고 주장할 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그 안에는 이미 지나온 각종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다. 이게 진정 나인지 물을 수 밖에 없다"면서 "문화, 습관을 포함해 나를 감싸는 하나의 보호막에서 해방시켜 나가보자. 나라는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성찰하고 나서 진정한 나를 만들어가자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강요배는 4.3 역사 연작으로 4.3예술의 한 축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4.3에 대해 연구자마다 접근하는 사람마다 강조하는 것이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그렇기에 각자 입장에서 정답이라고 제시할 수도 없는 것”이라며 “(4.3연작도) 어디까지나 강요배라는 부족한 사람이 여러 자료를 뒤적이며 상상력으로 편견 없이 해보려고 했는데 부족했다”고 자세를 낮췄다.

또한 “예술 창작자 입장에서는 지나간 사건을 추려내서 중요한 것을 뽑아 의미를 찾고 미래를 사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런 과정과 결과물이 아주 주관적이라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면서 “(예술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역사 속에서 찾아내길 바란다. 그러면 과실을 발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 신화 속 인물 ‘자청비’를 그린 작품을 소개하면서는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제주 여성들 스스로가 가장 뛰어나게 형상화한 여신이 자청비”라며 “설문대할망은 이야기 자체를 볼 때 (설화를 만든) 화자가 남성이 아닐까 추정한다. 과대해서 자랑하려는 것이 많이 드러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설문대보다는 자청비가 더 현대적이고 겸손하고 자유롭고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는 의견을 냈다.

강요배 화백. ⓒ제주의소리
강요배 화백. ⓒ제주의소리

‘달(月)’ 작품을 자주 그린다는 질문에는 “단순하면서 그리기 쉽다. 복잡한 그림을 그리기 싫을 때는 달을 그린다”고 미소 지었다. 이어 “금방 뜬 달이나 지평선에 걸친 달은 상당히 붉다. 늦봄 서쪽 안개가 자욱할 때는 뽀얗게 동그란 흰 달을 보기도 한다. 자연은 같을 때가 거의 없기에, 볼 때마다 상당히 놀랍고 공부하게 된다. 그래서 인상적인 구조를 가지면 과장하거나 생략해서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두부 한 모와 오이 두 개만을 그린 작품은 “추사 선생의 작품 ‘大烹豆腐(대팽두부)’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제가 좋아하는 막걸리 안주”라고 웃으며 답했다.

최근 들어 크기가 큰 작품을 제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집도, 미술관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에 걸맞게 작품이 커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강요당하고 학대당하고 있다”고 재치 있게 넘겼다. 

‘풍경의 깊이’에는 ‘휘파람새’ 울음 소리를 악보 형태로 옮긴 그림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강요배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봄철 휘파람새 우는 소리다. 이 소리만큼 사람 마음을 평화롭고 따스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라는 취향을 밝혔다.

강요배 화백은 ‘지금까지 그린 작품 2000여점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 하나, 괜히 그렸다고 생각한 것 하나가 있을까’라는 김수열 시인의 질문을 받았다. 화백은 “그림보다 더 큰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림은 인생을 사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림들은 인생에서 하나의 소품 밖에 안된다”고 응답했다.

더불어 “비겁하기도 하겠지만, 예술가가 하는 말은 전부 반어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예술이 되겠나’하는 식이다. 그런 전제를 깐다면 (나는) 미술만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에 김수열 시인은 “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정말 시인”이라고 화답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났던 강요배는 1992년 고향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그는 “정 많은 사람들, 노동을 상당히 존중하는 사회, 바다의 자연적인 조건을 위해 진화한 공동체 문화, 여성들 간의 우정 등이 제주에 있다. 제주가 지닌 여러 환경이 미래를 위해 개척하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주다움을 강조했다.

강요배는 “난 제주에 왔을 때 변두리로 간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너무 타이트한 도심 속 보다는 자연과 섞인 곳이 공부하고 협력하고 창작하기 좋은 공간이다. 헬조선이라는 평가 속에 외국으로 나갔던 시대가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 오히려 평가가 뒤바뀌지 않았나. 제주야 말로 서울보다 창작하기 뛰어난 장소”라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강요배 화백이 '풍경의 깊이'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강요배 화백이 '풍경의 깊이'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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