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6.1지방선거 소회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제8회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막을 내렸다. 새벽까지 이어진 개표로 잠 못 드는 한반도의 밤도 지났다. 날이 밝으면, 모든 사람은 선거와는 무관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나도 그러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쉼없이 진보와 보수의 승패 원인을 논할 테지만, 아마도 생뚱맞은 논설이 대부분일 것이다. 정작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결코 특정 진영의 일원도 아니고, 거기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와 당근이 명명백백히 구분되는 것처럼, 우리 안의 진보와 보수 성향이 그렇게 명징하게 나뉘는 것은 아닌 탓이다.

돌이켜보면 그렇다. 4년 전 제주 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에 속해있던 원희룡 도지사를 선택한 유권자가 이번에는 그 반대정당에 속해있는 오영훈 민주당 후보를 선택하고, 이와는 거꾸로 진보인사로 평가되던 이석문 교육감을 선택한 유권자가 이번에는 보수인사 김광수 후보를 선택한 것은 동일한 제주도민들이다. 전국 선거도 마찬가지다. 4년 전 민주당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가 이번에는 보수정당 후보를 선택한 것도 동일한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이다.

동해안 벨트가 붉게 물들고 서해안 벨트가 일부 파랗게 물들었지만, 처음부터 형질불변의 ‘좌한민국(左韓民國)’과 ‘우한민국(右韓民國)’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과 언론은 대한민국의 유권자를 좌나 우, 진보와 보수라는 협소한 카테고리 안에 묶어두고 싶어 하지만, 대중의 역동성은 그런 좁아터진 바구니에 얌전히 눌러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를 ‘대중의 배반’이라 명명할지도 모르지만, 애초부터 그런 구분은 허구일 따름이다. 제대로 증명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민족이 바위라면, 이데올로기는 그 위를 덮고 있는 모래”라는 100년 전의 지적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바람이 불면 모래는 날아가도 바위는 남듯이, 선거가 지나면 남는 것은 불변한 대중의 소소한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 선거를 결정짓는 것은 이런 불변하는 대중의 소소하지만 역동적인 일상의 정치적 선택인 것이다. 대중정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 비하한 것은 무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일 뿐이다. 지금 이를 들먹인들 무슨 해석의 잣대가 되겠는가? 누군가는 우매한 대중의 속절없는 ‘냄비근성’의 결과라고 해설을 해대겠지만, 그걸 가지고 무슨 온전한 선거전략이 수립이나 되겠는가?

과거에는 일부 소수만이 가졌던 지식과 정보와 부를 이제는 대중도 가지고 있다. 엄격한 판단력과 고도의 안목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주체의식도 선열하다. 이제 대중은 과거처럼 정치인이 계몽하고 지도하기에는 너무나 성장해버린 주체로 등장했다. 누군가에게 예속되지 않아도 자신의 노력으로 충분히 지위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기회가 주어져 있는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부당함 앞에 침묵하지도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런 대중의 정치적 선택이 변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4년 사이에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지지를 옮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까닭은 정치나 정치인이 변덕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은 단지 그런 변덕스러운 정치상황에 대해 ‘자연스럽게’ 변덕스러워지고 이를 심판할 따름이다. 대중을 탓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대중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악덕으로 손꼽히는 것은 과도한 탐욕과 야욕과 허영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패가망신으로 이끄는 악덕들이다. 정치인들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유혹도 이것이다. 눈을 뜬 대중은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민심에 어깃장을 노는 짓들이며, 모두가 싫어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과히 탐하지 말고, 경박하지 말며, 오만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마지막 유세장에서 유권자를 향해 남긴 절절한 호소와 약속을 기억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고향에 돌아가 마차에 치어 죽는다면, 얼마나 값싸고 허망한 죽음이겠는가? 격렬한 선거전에서 살아남아 부끄러운 악덕 앞에 무너진다면, 이 또한 얼마나 값싼 종말이겠는가?

때문에 인간의 최고미덕으로 꼽히는 신중과 겸손과 정의를 기억하라고 한다. 만인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정치의 요체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었다. 정치인의 성패도 여기에 달려있다는 의미이다. 권력을 얻는 것보다 민심을 얻는 것이 중하고, 권력을 잃는 것보다 민심을 잃는 것이 더 중하지 않겠는가? “뭣이 중한디”를 알면, 뭐를 쫓아가야 될지도 자연스레 알 터이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의로운 것을 기억하며 신중하고 겸손하게 정치를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싶은 까닭이다.

이제 ‘새로운’ 제주의 4년이 시작될 것 같다. 도지사나 도의원, 보궐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도 ‘새로운’ 얼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질서 있는 퇴진처럼이나,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제주의 역사적인 정치현장을 목격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시행착오도 있을 터이지만, 부디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공동의 이익이며, 제주의 더 나은 오늘과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도민 대중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매사에 상기하고, 정치가 잘못됐을 때 제주는 언제나 그에 대한 민주적 ‘반역’을 준비했었다는 과거의 가르침을 명심하기 바란다. 당선자들의 배신이 없다면, 대중의 배반도 반역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깊이 상심하고 있을 패자를 진정으로 위무하는 휴머니즘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행히도 패자의 흔쾌한 승복과 승자의 겸양스런 덕담이 여기저기서 오가니 참으로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닐까 한다. 열전을 치른 모든 출마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이규배는?

현재 제주국제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8년부터 현재까지 제주4·3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제주4·3연구소 소장과 5.18기념재단 이사,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고, 제주MBC <시사진단> 사회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와세다대학)에서 일본정치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속칭 ‘일본통’이며 일본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주의소리> 논설위원으로서 ‘소리시선’ 칼럼을 통해 4·3과 역사·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의 깊은 통찰력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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