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7) 할망장터에서 만난 김갑순 어르신 이야기②

김갑순 어르신을 제주시민속오일장에서 만난 그 계절은 바야흐로 하귤철이었다. 오일장에 들어서면 맞이하는 노란빛의 하귤과 팔삭이 풍기는 특유의 알싸하고 상큼한 향은 그 해의 5월과 6월을 기억하기에 너무나 매력적인 향이었다. 전통시장의 매대나 좌판에서 늦봄과 초여름을 잇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제주의 귤인데 내가 김갑순 어르신의 팔삭 앞에서 멈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친정엄마와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에 팔삭을 한아름 샀다고 한다면 오히려 평범했다. 그 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김갑순 어르신의 다정함과 따뜻한 응대 속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이었다. 마치 오랜 단골이 온 듯 반가운 미소로 어르신은 내게 이것도 맛있으니 하나 먹어보라며 말씀하시고는 팔삭 옆 여름귤 하나를 집어 장바구니에 쏙 넣어주셨다. 그 귤에는 아마나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응? 하귤은 나스미깡이라고 하지 않나?”

아마나스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내가 모르는 귤 종류가 또 있었나? 팔삭과 하귤(夏橘, 나스미깡, 후라이깡)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김갑순 어르신은, 아니 제주시오일장은 제주의 여름귤 중 하나인 감하귤(甘夏橘, 아마나스)까지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나스미깡보다 아마나스가 더 달아서 아마나스가 좀 더 상품으로 쳐 줘요. 팔삭과 아마나스가 겉으로만 보면 구별이 잘 안되잖아요? 그런데 여기를 잘 보면 생각보다 구별하기 쉬워요. 여기가 푹 들어갔죠? 이게 팔삭이고 들어가지 않은 건 바로 아마나스지요. 우린 이렇게 구분해요.”

좌 아마나스, 우 팔삭. ⓒ김진경
좌 아마나스, 우 팔삭. ⓒ김진경
서귀포오일장 매대의 팔삭. ⓒ김진경
서귀포오일장 매대의 팔삭. ⓒ김진경

지금에야 제주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과거에는 당유자나 하귤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다양한 만감류들의 등장과 수입과일들이 유입되면서 하귤은 환금작물로서 가치가 낮아지면서 점차 생산량도 줄었고 소위 고급과일이라고 불리는 과일들에게 제사상 자리도 양보해 주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집마다 당유자나무나 하귤나무는 한그루씩은 꼭 있었다. 지금은 그저 쓰고 신 과일로 치부될 수도 있는데 날이 따뜻해 지고 자칫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의 초입에서 적당한 쓴맛과 새콤함을 주는 제주의 귤들을 먹어본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왜 이 시기에 이 귤들이 나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제주시 중앙로 한짓골 골목 어느 집의 하귤나무. 지나가던 어르신이 귀뜸해주신다. 당신도 옛날 기억에 아버지 술 드시면 어머니가 하귤에 설탕과 시원한 물 섞어 드렸었다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 어른들은 하귤을 '나쓰미깡'이라고 불렀다. 여름(なつ, 夏)을 뜻하는 일본어 나쓰와 감귤(みかん, 蜜柑)을 뜻하는 미깡이 합쳐진 말이다.   ⓒ김진경
제주시 중앙로 한짓골 골목 어느 집의 하귤나무. 지나가던 어르신이 귀뜸해주신다. 당신도 옛날 기억에 아버지 술 드시면 어머니가 하귤에 설탕과 시원한 물 섞어 드렸었다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 어른들은 하귤을 '나쓰미깡'이라고 불렀다. 여름(なつ, 夏)을 뜻하는 일본어 나쓰와 감귤(みかん, 蜜柑)을 뜻하는 미깡이 합쳐진 말이다.   ⓒ김진경

“나쓰미깡이나 아마나스, 팔삭의 알맹이만 발라내 시원한 물에 꿀만 조금 타서 마셔봐, 그렇게 맛있을 수 없어요.”

제주시오일장 할망장터의 다른 어르신이 가지고 오신 세미놀. 세미놀은 1960년대 초반 환금작물로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하던 초창기 도입된 종자이다. 세미놀 역시 여름에 수확하는 제주의 여름귤이다. ⓒ김진경
제주시오일장 할망장터의 다른 어르신이 가지고 오신 세미놀. 세미놀은 1960년대 초반 환금작물로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하던 초창기 도입된 종자이다. 세미놀 역시 여름에 수확하는 제주의 여름귤이다. ⓒ김진경

풍족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던 김갑순어르신이 왜 여기 할망장에 나와 계시는 지 나는 더 궁금해졌다.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서귀포로 돌아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따라다니던 어르신은 중매가 아닌 오랜 기간 연애를 했던 지금의 남편분과 26살에 혼인을 하게 된다. 친정아버지가 원하셨던 중매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친정 아버지의 실망은 크셨단다. 애지중지 사랑으로 업어 키운 큰 딸이 가장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셨던 마음이 커서였을까. 아버지의 뜻대로 혼인이 성사되지 않은 속상한 마음이 크셨는지 결혼 후 딸과의 관계는 잠시 소원해지기도 했다. 김갑순어르신이 부모님에게 독립하여 한 가정을 꾸려 살기에는 세상은 생각보다 지켜가야할 것도, 만들어 나가야 할 것도 많았다.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던 손은 당장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결혼하고 정말 안해본 게 없을 정도에요. 집세라는 것도 결혼하고 처음 내 봤어요. 그리고는 깨달았지요. 해마다 집세를 낼 돈이 필요하구나. 전 그 사실을 그때야 알았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었어요. 피아노레슨도 했었고 동방생명에서 보험소장도 했었어요. 그렇게 돈을 버는 방법을 다시 배웠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풀어가는 지도 배웠어요. 물론 녹록치 않았어요. 아뇨. 힘들었어요. 하지만 돌이켜 보니 인생에서 아주 중요했고 소중한 삶들이었어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해 봐도 쉽게 살림이 나아지지 않을 찰나, 좋은 기회로 1975년 오픈한 서귀포 동명백화점 3층에서 예식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남편분이 예식장을 맡아서 운영하고 어르신은 1층에서 드레스대여와 잡화점을 하셨다. 어르신 내외가 운영했던 동명예식장과 잡화점은 호황을 이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물건을 부산에서 해 오는데 저는 서울로 갔어요. 내가 가지고 오는 패션우산은 정말 불티나게 팔렸어요. 일반적인 우산이 아닌 패션우산인데 비가 오기만 하면 우산은 순식간에 동이 나기 일쑤였죠. 당시 그 우산이 만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만원짜리 우산은 정말 고가였는데도 없어서 못팔았어요. 어느날 우산을 사러 종로에 갔는데 인도에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가만히 서 있는 거였어요. 왜 저 여자는 인도에 드레스를 입고 꼼짝을 안 하네 라며 가까이 가 봤더니 마네킹이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마네킹 두 개와 드레스를 사서 제주로 내려왔지요. 그리고 동명드레스를 열었죠. 내가 데리고 온 마네킹과 드레스는 아마 제주에서 제가 처음이었을거에요. 제가 갖고 오는 드레스는 서귀포 사람들은 물론 제주시 사람들에게도 유명했어요. 그렇게 결혼식 드레스 임대를 하다 우연히 한 병원 원장님의 시누이께서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를 대여하지 않고 맞췄어요. 당시 대여료가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였는데 60만원 짜리 드레스를 제작한 거예요. 그 소문을 듣고 또 유명해져서 결혼 드레스로 돈을 꽤 많이 벌었어요.”

제주시 사람들도 다른 곳은 몰라도 동명백화점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서귀포시의 가장 번화가로 손꼽혔던 이곳에서의 김갑순 어르신의 삶은 이렇게 나아지는 가 싶었단다. 남편과 예식장과 드레스대여점을 하면서 인근에 동양카페리 선박표와 항공권을 매표해주는 대리매표업도 확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웨딩홀에 화재가 나면서 어르신의 삶이 또 달라졌다. 화재 후 짐들을 정리하고 보니 김갑순어르신에게는 오히려 빚더미만 남아있었다. 다시 앞이 깜깜해졌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가 계신 일본으로 넘어가 공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5년동안 일본에서 번 돈으로 빚을 다 갚았다. 일본에서 티비로 88올림픽을 보던 그 해, 김갑순 어르신의 나이는 44살. 지금의 내 나이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르신은 제주로 돌아와 모든 빚을 청산하고 다시 동명백화점 일층으로 들어가 장사를 이어나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백화점을 정리한다며 임차인들은 다 나가달라는 건물주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많은 재고들을 안고 서귀포동문로터리 근처 작은 점포를 얻어 장사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외로 재고를 팔며 번 돈들이 쏠쏠했고 그 수익으로 밭을 조금씩 사게 되었다. 그제서야 살아생전 처음 밭도 사고 내 집도 마련했다. 

“땅을 사고 집을 지어서 그 집에 딱 들어갔는데 그게 내가 50이 좀 넘었을 때였나? 아주 으리으리하고 호화로운 집은 아니었지만 내가 스스로 일궈낸 집이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내 집인데 호텔 같네.’라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물론 친정부모님께서 도와주실 수도 있었지만 도와주셨다면 지금의 나는 또 없었을 것 같네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어르신은 젊었을 때 꿈꿨던 대학에 50대에 늦깎이 대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법관이 되려던 십대의 꿈은 아니지만 성인이 된 후 내가 힘들었을 시기 나의 삶에 지탱이 되어 준 신앙을 음악으로 좀 더 공부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다. 그렇게 50대에 대학에서 지휘과를 전공하며 못 다한 학업의 꿈도 이뤘다. 어르신이 흘린 땀으로 구입한 밭에 감귤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 60대가 되서는 다시 한번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입학을 했다. 동기 중 제일 나이 많은 62세 만학도로 입학해 65세에 수석졸업을 하면서 배움의 즐거움도 경험하게 되었단다.

젊었을 시절, 손마디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어르신의 손. 지금의 손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진경
젊었을 시절, 손마디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는 어르신의 손. 지금의 손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진경
할망장(할머니 장터)에 가면 삼춘(삼촌)들이 직접 키워 가져오신 가지각색의 먹거리들이 있습니다. 싱싱한 그것들보다 알록달록 이쁘게 차려입으신 삼춘들이 더 싱그러워 보였던 건 왜였을까요?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할망장(할머니 장터)에 가면 삼춘(삼촌)들이 직접 키워 가져오신 가지각색의 먹거리들이 있습니다. 싱싱한 그것들보다 알록달록 이쁘게 차려입으신 삼춘들이 더 싱그러워 보였던 건 왜였을까요? /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장사꾼이셨던 친정아버지는 나이가 들자 제주시오일장 할망장터에 10여년 정도 소일거리로 나오셨다. 김갑순어르신의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90세가 다 되어서도 할망장에 어머니와 함께 나오셨다고 한다. 친정부모님께서 더 이상 할망장터에 나오기가 어려워지게 되자 그 자리를 비워주게 되는 상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김갑순 어르신은 비상품 귤을 합리적인 금액으로 사람들에게 팔아보겠다며 친정아버지의 자리를 본인이 맡아보겠다고 말했다.

당시 동생들이 언니가 아쉬운 것이 뭐가 있길래 오일장에 나가냐고도 했지만 김갑순어르신은 이상하게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의 흔적이 가득한 오일장 자리를 그냥 내어주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할망장터에 나오자니 뻘쭘했다. 그러나 비상품 귤과 걱정을 함께 안고 나온 첫 오일장할망장은 의외였다. 북적이는 시장의 활기도, 사람들과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분위기도, 농사로 인해 지친 몸도 이상하게 할망장터에서는 회복이 되고 힐링이었다. 어르신의 인생에서 친정아버지의 영향도 컸지만 친정어머니가  한평생 보여줬던 감사드리는 삶, 노래로 기도하는 삶도 영향이 컸다. 친정어머니의 영향은 김갑순어르신이 할망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항상 미소와 좋은 에너지를 주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고 회고하셨다.

“사실은 농사만 지으면 몸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오일장에 오면 그 힘듦이 눈 녹듯 사라지더라고요. 제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은 정말 신기하게 다들 너무 좋은 분들만 오세요. 손님들이 저에게 ‘아줌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 ‘고마워요.’, ‘아줌마 이렇게 많이 주시면 손해봐요.’라는 말 정말 많이 해주는데 이런 오고가는 말들과 미소에서 삶에 대한 감사와 행복을 느껴요. 제 물건을 사러 오시면서도 저에게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꼭 해주시는데요 이 말을 해 주시는 손님이 저에게 온다는 사실이 벅차도록 행복해요. 저는 단지 제가 농사지은 과일을 주는데 말이죠. 시장은 제게 너무 행복한 곳이에요.”

김갑순 어르신은 할망장터를 통해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이 무엇인지, 행복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 지 분명히 알고 계신 듯 하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내 삶, 사실 더한 일도 여럿 있었어요. 그때마다 그 상황을 선한 양심과 선한 마음으로 이겨냈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드니 지금 살아 계셨다면 102세가 되셨을 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모님께서 노후에 계셨던 이 오일장 할망장터에 제가 대신 나와 소소한 행복을 사람들과 나누며 제 여생을 보내는 것을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어머니도 흐뭇해하실 것 같아요. 장하다고 하실 것만 같아요.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할망장터에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너무 행복한 일이에요.”

김갑순 어르신의 말을 듣고 할망장터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순간 할망장터는 이때까지 왔던 어느날의 시장보다 가장 활기차 있었고 밝은 에너지로, 행복한 공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할망장터의 어르신들의 표정도 이제껏 내가 알고 있었던 할망장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들이었다. 삼춘들이 무심코 좌판에 깔아 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른들이 삶의 일부를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그 음식은 어떻게 해서 먹냐고 여쭤보면 그 어르신이 살아오며 축적해 온 삶의 레시피를 알려주신다. 계절별로 시시각각 바뀌는 제주의 음식이야기를 한보따리 들고 5일마다 나서는 장날은 이분들께는 얼마나 소풍 같은 날일까. 할망장터는 어르신들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하나의 매개체였고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대화의 장이었다. 나이 들어감이 초라한 것이 아닌 제주의 어른으로서 존경받고 존중받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김갑순 어르신은 남편분과 함께 친정부모님의 자리를 이어받아 할망장터의 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계셨다.

서귀포할망장터의 한 할머니가 먼저 다가와 호두과자를 함께 나누어 주었다. 며칠 지나 굳어버린 호두과자였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컴퓨터 모니터 아래 놓고 두고두고 보며 먼저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한다. ⓒ김진경
서귀포할망장터의 한 할머니가 먼저 다가와 호두과자를 함께 나누어 주었다. 며칠 지나 굳어버린 호두과자였지만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컴퓨터 모니터 아래 놓고 두고두고 보며 먼저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한다. ⓒ김진경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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