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사이] (9) 고충석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전 총장

지난 6.1지방선거에서 제주시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국민의힘 부상일 후보가 '제주도의 전라도화'  '제주도는 전라남남도' '민주당에 20년간 가스라이팅 당한 제주도' 등의 발언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도민사회를 갈라치기 한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는 과거 해상왕국 탐라시절 부터 외부와의 활발한 교역을 벌여온 곳으로 폐쇄나 배타적이지 않은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6.1지방선거에서 제주시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국민의힘 부상일 후보가 '제주도의 전라도화'  '제주도는 전라남남도' '민주당에 20년간 가스라이팅 당한 제주도' 등의 발언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도민사회를 갈라치기 한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는 과거 해상왕국 탐라시절 부터 외부와의 활발한 교역을 벌여온 곳으로 폐쇄나 배타적이지 않은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지방선거에서 제주사회에 가장 많이 회자 된 말은 ‘제주가 전라도화되었다.’는 말이었다. 제주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보궐선거 후보로 출마한 부상일 후보가 선거 토론회에서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펴며 내놓은 발언이다.

일단 이 발언이 우발적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지만, 계산된 선거전략이었다는 주장이 나올만치 선거판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선거전략이었다는 사람들은 이 발언이 제주도민들의 지역감정과 자존심을 긁고 민주당 아성인 호남(전라도)과 제주를 분리하는 갈라치기 수법이었다고 분석하는 것 같다.

국민의힘 측과 민주당 측이 이 발언의 득실을 놓고 어떻게 셈을 하는지는 모르나, 선거 결과는 민주당 오영훈 후보가 제주도지사에 당선되고, 제주시을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 김한규 후보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여하튼,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선거에서 이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은 구태이고 지양돼야 할 것이다. 

  “제주도의 전라도화”는 제주인 정체성 폄훼 발언

이 같은 지역감정은 원대한 꿈을 품고 먼바다를 항해하며 용감한 해민(海民)으로 살았던 우리 제주인들을 폄훼한다는 점에 더욱 그러하다.

제주는 역사 이전 시대에는 거대한 해상 왕국이었다.  탐라 사람들은 교역을 위해 한반도, 일본, 중국 등과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살았다. 9세기 당나라 대문호 한 퇴치(韓愈)가 남긴 시에도 탐라인들의 삶이 나타나 있다.

중국에서도 부의 중심지대인 양쯔강 하구에 있는 주산군도는 탐모라(탐라) 해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탐라 사람들은 이곳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탐라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항해술, 조선술, 외교술, 상술이 뛰어났다. 그들은 저 무서운 동아시아 바다를 제집 드나들듯 누비고 다녔다. 그래서 탐라인들 만큼 뱃길을 훤히 꿰뚫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와서 바닷길을 완전히 폐쇄하는 해금(海禁)정책과 공도(空島)정책으로 인해 제주는 완전히 갇힌 섬이 되었다. 더욱이 1629년부터 200년간 지속된 출륙금지령으로 제주의 해양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제주 역사에 있어서 출륙금지령 기간 동안 제주경제는 피폐화되고, 제주 사람들의 삶은 가장 황폐해졌다고 한다.

제주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남해안 일대에 가서 선상생활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물길과 화포 제조 기술을 가르쳐 준 이들도 제주 출신 뱃사람들이었다.

  고립된 섬 탐라, 폐쇄 아니라 개방과 교역의 역사

제주 사람들이 배타성이 강하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럴까? 제주는 육지와 고립된 섬이다. 생필품이 부족한 제주는 육지와 교역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 한반도,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탐라의 특산품을 팔고 필요한 물자들을 사들여왔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할 때라 대체로 교역은 물물교환 형태를 취했다.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외부 경제 주체들과의 경제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존전략을 구가했다.

그렇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제주인의 정신적 바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개방성이다. 제주 사람들을 폐쇄적이니 배타적이니 평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몰라서 나온 이야기다. 

외부에 개방적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섬나라 탐라였다.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다리를 놓은 자는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돌궐제국의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에 새겨진 말이다. 개방은 제주 사람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기에 탐라 사람들은 성을 쌓는 대신 배를 지어 먼바다로 나갔다. 섬나라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했던 명분도 국가의 문을 세계를 향해 열어젖혀야 살 수 있다는 생존전략에서 나왔다.

제주에 왔던 경래관이나 유배인들은 제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대체로 제주 사람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제주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임지라고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이주 상인에 대해서도 융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서 토착 상인과 이주상인 사이에 두드러진 갈등이 노출된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제주인을 누가 배타적이라고 하겠는가!

소설가 현기영의 증언 문학 작품에서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는 『변방의 우짖는 새』에서 작중 인물을 통해서 제주에 사는 사람 모두는 성씨 불문하고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대정 화전민들이 방성칠 하루방을 장두로 받들고 일어났으니 이번엔 한번 참말로 밀어붙여사 합쥬”
“그런디----장두 하루방이 육지사람이라. 정의골 백성들이 수이 모다들지 어떨지 모를 로고.”
“어따. 벨 걱정은 다 해염고. 저 하루방들이 입도한 지 댓 해나 되었는디. 그만하면  이 섬 백성 다 된 거쥬. -------이 섬에 살면 다 제주 백성이라. 느네 장씨나 우리 오씨나 육지서 난리 피영 망명 온 자손들 아닌가. ” 

방성칠의 난, 물론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이 소설에서 난의 주동자로 추대된 사람은 제주에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제주인들은 지역을 떠나 능력과 인품을 장두의 조건으로 삼았던 것 같다. 전라도 출신, 제주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제주의 해녀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해녀 조직의 우두머리는 나이나 사적 인연으로 뽑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력이 월등한 상군 해녀라야 한다. 싱가포르 같은 나라가 취하고 있는 실적주의(meritocracy)의 복사판이다. 과거에는 이주민이 제주에서 조직의 장으로 피선된 경우도 간혹 있었다. 

20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 제주 고씨로 전남에 살았던 고세진은 17세에 제주에 이주해와 기업을 일궜고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부산 출신인데 일찍부터 제주대에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던 고장권도 제주대 총장선거에 뛰어들어 당선되었다. 

요새는 이주민이 공직 선출에 도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제주대학교에는 능력 있고 인품이 훌륭한 이주민 교수들이 꽤 있다. 그러나 최근 그들이 총장직에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매번 제일고 출신이나 오현고 출신만 총장을 하고 있다. 나는 이주민 교수들에게도 총장에 도전하라고 권한다. 동종교배 식의 총장선출로는 제주대학은 발전 가능성이 희박하다. 육지 출신이나 외국에 사는 훌륭한 학자도 제주대학교 총장을 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

배타성은 대체로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농경 문화권에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번도 타향에 가보지 않고 평생을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삶을 살았던 농민들은 운명적으로 다른 공동체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주는 엄밀한 의미에서 농경 문화권이 아니다. 제주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내신 송성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제주에는 바다 건너 수백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지와 교역과 상업활동, 그리고 어로 활동을 해 온 수많은 해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대해의 참치’처럼 그리고 ‘천하의 대붕(大鵬)’처럼 돌아다닌 열린 기층 민중이었다. 그야말로 개방성과 수용성을 생활의 덕목으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하멜이 바라본 제주인은?…4.3 등으로 비롯된 이유있는 “육짓놈, 육짓년”

제주도가 외국인에게도 얼마나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또 하나의 옛 문헌을 찾아보자. 네덜란드인 하멜은 1653년 풍랑을 맞아 제주의 대정현 차귀진 연변에 상륙했다. ‘난선제주도난파기(籣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물리는 하멜표류기에는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받는 대우보다 더 나은 대우를 우상숭배자인 제주인들에게서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은 바다에서 난파 경험이 많았던 제주 사람들은 표류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유연성을 갖고 일단은 그 사람들의 처지를 수용, 검증하는 자세를 가졌던 것 같다. 

사실 제주에서 회자되는 육짓년, 육짓놈, 밖의년, 밖의놈하는 배타적 말들 때문에 제주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규정짓고 그런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재수의 난, 제주 4·3 사건, 흉년기 육지 상인들의 매점매석 횡포, 60년대부터 시작된 밀어내기식의 대규모 개발 등으로 인해 제주는 외부자본, 외부권력에 의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난을 겪었다. 이런 사건들이 다 외발적 변수, 즉 이재수 난은 혹독한 세금부과, 4.3은 육지부에서 온 응원 경찰 때문에 촉발되었다.

따라서 육지 것 등으로 표현되는 배타적인 언어의 뒤에는 중앙에 대한 제주민의 피해의식과 방어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해서 제주인들의 성품이 배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제주 사람들은 선한 의지를 가진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수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과거 역사에서 수많은 표류 회생 자와 포착 이방인들이 제주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의 빈번한 접촉은 제주인을 배타적이기보다 오히려 수용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대양의 참치처럼 돌아다닌 제주인의 삶에서 참된 제주 정신을 찾아야 한다. 과거 바다로 진출했던 제주 선민들의 얼을 받아, 밀려오는 물결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정신(creative response)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이 곧 개방성이고 故 송성대 교수가 말하는 해민정신이다.

어느 일본의 극작가는 “침체와 질투는 땅의 산물이고, 진취와 관용은 바다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민선 8기 제주도지사로 취임하는 오영훈 지사는 진취와 관용의 정신으로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새롭게 재정의하고 그에 따른 실천계획들을 디자인하기를 바란다.    

고충석은?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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