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10) 기억 속의 내 어머니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 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이제 여름입니다. 

처음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을 시작할 때는, 제 마음 속 꽁꽁 쟁여두었던, 아픔이나 상처까지도 토해내겠노라 마음먹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다 써둔 글을, 오로지 제 마음이 동하지 않아, 내 검열로 여러분들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많습니다. 

이 편지도 벌써, 벌써 다 써 놓았지만, ‘제주의소리’ 편집국에 차마 보내지 못하고 마음만 갈팡질팡 하고 있었습니다. 힘든 과거를 지났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잘못한 게 아닌데, 아직도 저는 심리적 방어기저가 작용하나 봅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쓴 편지에, 기회가 되면 어머니 얘기를 쓰겠노라 했습니다. 오래전에 쓴 어머니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이 편지에 씁니다. 그때는 제 마음을 썼다면,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씁니다. 이제 스스로 내 마음 속 검열을 조금씩 해제하려고 합니다. 괜찮겠지요?

엄마는 늘 땀에 전 쉰내가 났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집에 있을 때도, 늘 땀에 전 쉰내가 났습니다. 제대로 쉬는 시간이 없었던 어머니, 늘 땀이 날만도 했습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해 질 무렵, 혼자 검질(김) 매러 밭에 갔다 오는 길. 어머니는 머리 위 몇 뼘이나 봉긋 솟아오른 지들커(땔감)를 등짐 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점심으로는 아침에 갖고 간 찐 고구마 두 어 개가 다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서둘러 저녁밥을 하고, 고단했던 하루를 잠시 쉬어 갈 틈도 없이 집안일은 끝이 없어, 맘 놓고 앉아 있는 시간이 채 몇 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를 넘기는 깊은 어둠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에 흠뻑 적셔진 솜이불처럼 고단한 몸을 가난한 짧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동트기 전 제일 먼저 일어나 불려놓은 보리를, 아버지 몫의 흰쌀 주위에 두르고 아침밥을 지었습니다. 그 시절 제주의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어머니는 늘 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늘 궁핍했습니다. 모든 돈을 다 아버지가 관리했고, 어머니는 단 돈 십 원 한 장 없었습니다. 반찬거리 사는 것도, 쌀을 사는 것도, 도시락 반찬 사는 것도 그때그때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남의 밭에 검질(김)매러 가면 품삯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싫어하셔서 그마저도 눈치 보며 다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이미 9살, 5살, 3살 딸 셋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 속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제 배다른 누나들에게 욕을 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누나들이 커가면서 조금만 기분 나쁘면, 입에 달고 어머니에게 “나 납디가?”(나를 낳았어요?)라고 쏘아붙여도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작 “기여게 다 나 따문이여게”(그래 다 나 때문이다) 하는 게 다였습니다. 

그럴 때면 집 뒤, 우영팥(텃밭)에 있는 커다란 나스미깡낭(하귤나무) 밑에 앉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숨죽여 울었고 “하아…” 길고 긴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담 뒤에서 몰래 보기만 했습니다. 에구구, 그러네요. 그때 어머니를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어린 나는, 어이없게도 내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만, 집안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을 대신한 유일한 사진입니다. 사진 뒷면에는 1965, 2. 17  아버지의 글씨로 씌여 있습니다. 이 사진을 물어보면 정작 어머니는 얼굴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싫어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이상하게 크게 나온 건 맞습니다. 어쩌면 이때 어머니는 살집이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속 아버지도 참 젊고 잘 생겼습니다. 사진=강충민.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을 대신한 유일한 사진입니다. 사진 뒷면에는 1965, 2. 17  아버지의 글씨로 씌여 있습니다. 이 사진을 물어보면 정작 어머니는 얼굴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싫어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이상하게 크게 나온 건 맞습니다. 어쩌면 이때 어머니는 살집이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속 아버지도 참 젊고 잘 생겼습니다. 사진=강충민.

엄마는 밥물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그 해 3월에 둘째 누나가 육지로 시집갔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재혼 한지, 두 달 지난 후에 도저히 못 살 것 같아, 태흥리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신효 앞동산 차부(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섯 살 둘째딸이 맨발로 달려와 보따리를 낚아챘습니다. 그 다섯 살 아이가 “어멍 가지마, 어멍 가지마…” 하고 보따리를 절대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다섯 살 둘째 딸은 그 후로도 졸졸 어머니의 뒤를 따랐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어멍 아무디도 안 가키여게…”( 엄마 아무 곳도 안 갈게…) 하면 비로소 안심하고 밖에 놀러나갔습니다. 
그 다섯 살 아이가 커서 시집을 간다고, 그때 일이 생각나서,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해서, 낳은 어멍(생모)이 아니라 미안해서, 울었다 했습니다. 

둘째 누나 결혼식이 끝나고 한 달쯤 지난 무렵부터 밥이 아주 설익거나, 질거나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고사리를 꺾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쌀을 씻어 솥에 넣고는 마루에 앉아 있는 나를 불렀습니다.  

“물이 손 우트로 잘 맞차져시냐?”(물이 손 위로 잘 맞춰졌니?)

아, 어머니는 밥물을 당신 스스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밥이 설익고 질었습니다. 진밥을 싫어하는 아버지의 역정이 두려워, 그 즈음부터 나에게, 내 동생에게 밥물을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장마가 시작되던 즈음, 마당 앞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 어머니는 비로소 조용히 나에게 얘기했습니다. 

“나 이제 눈이 점점 안 보염쪄….” (나 이제는 눈이 점점 안 보인다….)

사실 나는 어머니의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아니기를... 어느 날 아침이면 어머니 눈이 활짝 잘 보여서 “이젠 어떵 안허다”(이젠 아무렇지 않다) 라고 말하고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감기 한 번 앓았던 것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나는 나를 낳진 않았지만, 내가 그 분의 아들로 되어 있는 큰어머니 무덤에 자주 갔습니다. 큰 어머니 무덤 앞에서 어머니 시력이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눈은 나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내게 “눈이 점점 안 보염쪄” 할 때만 해도 내가 손가락을 두 개 들고 “엄마 이거 몇 개우꽈?” 물어보면 어렴풋하게 흐린 감각으로 오랜 시간 뒤에 “두 개!” 하고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손뼉 치며 좋아하고, 어머니를 칭찬하고, 딱 이 만큼만 이라도…, 어머니의 시력이 남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자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내 손가락 개수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나도 더 이상 어머니에게 내 손가락 개수를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떤 스트레스가 엄마를 눈 멀게 했을까요?

서울대병원 안과에 어렵게 어머니 진료 예약이 잡혔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겨우 예약되었다고 알려주면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내 기억 속 늘 친절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서울대 병원 가민 나슨다. 걱정허지 말라.” (서울대 병원 가면 낫는다.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아버지는 서울대 병원에 가기 전, 서둘러 심방을 불렀습니다. 심방 대여섯 명이 와서 3일 동안 굿을 했고, 굿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아버지는 친척들, 동네사람들 앞에서 “꼭 나상 오쿠다”(꼭 나아서 오겠습니다) 했습니다. 

아. 나는 참 좋았습니다. 이제 정말로 어머니의 어둠이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대 병원으로 가려고 아버지와 집을 나서는 날, 어머니는 난생 처음 굽 낮은 꽤 좋은 구두를 신었습니다. 잘 다녀오라고 동네 친한 이모가 사준 구두였습니다. 연분홍색에 발등 위에 보리수열매 같은 두 알이 앙증맞게 달려 있는 구두였습니다. 그 구두에 감청색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처음 맞춤 양장과 구두를 신었습니다. 당신 병원 진료가는 날에야 비로소 말이지요. 

아! 어머니는 서울에서 너무 빨리 돌아왔습니다. 

서울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수술을 하게 되면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올라간 바로 다음 날 내려왔습니다. 어머니의 서울행은 허무하게도 끝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서울 갈 때 신고 갔던, 보리수 열매 같은 두 알이 리본 끝에 달려 있는 연분홍색 굽 낮은 구두를 벗어 신발장 가장 안 쪽 끝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궁금해서 집에 온 친척들에게 시신경이 마비되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서울대 병원 의사의 얘기를 전했습니다. 안구를 기증받아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원인이 뭐냐는 친척의 물음에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얘기했습니다. 

“참 벨나우다. 스트레스 받을게 뭐가 이서그네. 스트레스도 원인이랜 마씀. 의사도 고를 말 어시난 촘….” (참 유별납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어서요. 스트레스도 원인이라네요. 의사도 할 말 없으니까 참….)

하지만 의사에게 들은 실명의 원인이 스트레스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의사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실명으로, 어머니의 부재에 이제부터 겪고 나가야 하는 탄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겪게 될 절망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머니에게 위로 건네지 않았습니다. 제일 힘든 사람은 우리 어머니였는데두요. 

서울에 다녀오고, 어머니는 낮에는 늘 나스미깡낭(하귤나무) 아래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누가 볼새라 눈물을 훔치며 “하아…” 긴 한숨을 내 쉬던 곳이 마치 원래부터 그녀만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초점없이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요?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밥은 잘 먹으라고 얘기하지 않았고, 잠은 잘 자는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겨우 그때 내가 한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집 뒤 우영팥(텃밭) 나스미깡낭(하귤나무) 있는 곳까지 가다가 발이 걸려 넘어질까 하여 큰 돌, 작은 돌 하나 없게 치워 놓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멀리서 보며 나는 그때부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아 어떤 스트레스가 어머니의 눈을 멀게 했을까?”

나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 때문입니다. 내가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눈이 멀었습니다. 어머니의 나이 오십이었습니다. 

다음 편지에, 그 후 이야기 전하겠습니다. 

2022년 6월 16일 목요일   
강충민 올림

덧붙이며 : 부끄러운 이야기를 이렇게 잘도 써 놓고, 몇 일 동안은 인터넷 접속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끄러움은 제 몫입니다. 


# 강충민 시민기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사회 보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의소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 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좋아하는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라초등학교 인근에서 독서논술교실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jejungo.net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강충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강충민시민기자 블로그 가기 ⇒ http://blog.naver.com/som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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