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12) 제주시 건입동 ‘훈민당’ 박효민 장인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부터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 또는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제주시 건입동 도로변의 아담한 1층짜리 건물. ‘수제 도장’이라는 문구가 간판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문을 열면 휠체어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박효민(62, 훈민당 대표) 장인의 모습이 보인다.

도장을 고정하는 틀과 조각칼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그의 동료들이다. 컴퓨터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고집스레 손으로 도장을 깎아온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 동안 나무와 뿔에 새긴 이름은 셀 수도 없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박효민 훈민당 대표. 그의 작업대 위에는 확대경과 조명, 40년이 넘은 제작 도구들이 늘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박효민 훈민당 대표. 그의 작업대 위에는 확대경과 조명, 40년이 넘은 제작 도구들이 늘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뛰어노는 대신 지우개를 깎다 

그는 2살 때 고열을 겪고 소아마비를 앓았다. 목발과 휠체어에 기대야 했던 그는 학창시절 그는 운동장을 뛰어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우개에 칼로 글과 그림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하는 작은 작품들은 점점 다양해졌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밖에서 노는데 나는 교실에 앉아서 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지우개를 칼로 조각하는 취미가 생겼어요. 고무판화하듯이 이름을 새겨서 도장처럼 만들었지요. 요즘도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옛날부터 지우개 도장을 파더니 이제 도장집을 하는구나’하는 얘기도 듣곤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 진학 대신 그가 향한 곳은 동네의 도장집. 기술을 가르쳐달라 졸랐지만 가게 사장님은 처음에 거절했다. 수업료까지 드리겠다며 몇 번이고 부탁한 다음에야 비로소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손재주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 사장님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가게를 내기로 마음먹는다. 5형제 중 막내의 이름 끝자인 ‘훈’과 자신의 이름의 끝자 ‘민’을 합쳤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세탁소 한 켠 작은 자리를 빌려 시작했다. 열 여덟 살 때 일이었다.

박효민 장인의 작업대 위에 놓인 도구들. 가게를 처음 열었던 열여덞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해왔다. 결과 결 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제주의소리
박효민 장인의 작업대 위에 놓인 도구들. 가게를 처음 열었던 열여덞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해왔다. 결과 결 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제주의소리

도장에 사람을 새기다

결제에 도장이 필수였던 시절, 우체국, 보험회사, 건설현장 등 각종 업체에서 그의 가게를 찾았다. 세금관련 업무에도, 원활한 사업을 위해서도 도장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1990년대 후반 도심 지역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던 시절 훈민당은 노동자들의 임금 지급용 목도장을 하루에 300개나 제작하기도 했다. 바쁘고 몸은 힘들었지만 재미와 보람도 넘치던 시기였다.

재료를 가리지 않고 그는 실력을 발휘했다. 단단해서 파기가 힘든 벽조목(霹棗木,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은 그의 예리한 손을 거치면 품격있는 도장으로 탄생했다.

시기가 흐르며 컴퓨터로 도장을 제작하는 곳이 늘었지만, 그는 수작업을 고집한다. 장인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다.

“저는 언제까지가 될 지는 몰라도, 계속 수작업으로 할 것이고 그것에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여러 글씨체를 시험해가면서 젊은이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나 연구를 합니다. 사람들이 계속 찾아주는 기쁨도 있고. 이게 훈민당의 가장 큰 보람이자 자랑이죠”

젊은 시절 박효민 장인의 모습. 그는 10대에 도장 세공의 길에 들어선 뒤 평생 천직으로 이어왔다. 맨 오른쪽 사진은 그가 스물 다섯 살 때 열린 제4회 전국장애자기능경기대회에서 인장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오른쪽의 박효민 장인, 왼쪽은 당시 가구제작 부문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제주도민 박태진 씨. ⓒ제주의소리
젊은 시절 박효민 장인의 모습. 그는 10대에 도장 세공의 길에 들어선 뒤 평생 천직으로 이어왔다. 맨 오른쪽 사진은 그가 스물 다섯 살 때 열린 제4회 전국장애자기능경기대회에서 인장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찍은 기념 사진. 사진 오른쪽의 박효민 장인, 왼쪽은 당시 가구제작 부문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제주도민 박태진 씨. ⓒ제주의소리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먼 곳에서 훈민당을 찾는 사람들도 생겼다. ‘소문을 듣고 왔다’며 상아 도장 제작을 요청한 한 할머니가 결과물을 받아들고는 ‘가보로 남기고 싶다’며 기뻐한 모습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하다. 외국인 방문객들은 자신의 한글이름을 손으로 직접 파는 그의 작품을 보고는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은 가게 안에서만 발휘되지 않는다. 세상에 재능을 나누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가게 한 켠에는 상패와 표창장이 가득하다. 2012년에는 제주지역 지체장애인협회와 장애인경제인협회 등의 설립을 주도하고 어려운 장애인과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을 도운 공로로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기도 했다.

“저는 이제까지 장애가 있어서 힘들게 살았다, 어떻게 극복을 했다... 저는 그게 아니고 단지 조금 불편하다, 남들과 걸음을 맞출 수는 없지만... 좀 천천히 가면 되고, 휠체어를 타면 바퀴를 굴러서 가면 되고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힘든 것도 모르고 항상 긍정적이에요.”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박효민 장인의 훈민당. ⓒ제주의소리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박효민 장인의 훈민당. ⓒ제주의소리

그래도 훈민당은 계속 간다 

도장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도장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전자서명이 확산되면서 도장은 점점 더 쓰임새를 잃었다. 쉴 새 없이 바쁘던 가게는 이제 한산해졌다. 그는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다”면서도 “나에겐 천직이고 인생이고 동반자인데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세상에 하나뿐인 도장을 만들기 위해 그의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수작업으로 제작된, 영구보관할 수 있는 도장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은 물어물어 이곳을 찾는다. 작품을 제작한 뒤 타 지역으로 택배를 보내는 일이 익숙한 장인이다.

수제도장 명인을 찾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나만의 고유함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장인은 가장 어울리는 도안을 머리속에 그린 뒤, 40년 넘게 함께한 도구들로 글자를 새긴다. 이름이 아니라 사람을 새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게 보이는 이유다.

어떤 것이든 복사가 쉬워진 시대. 손님 수는 줄어들었지만, 장인의 수제도장은 새로운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오늘도 손 끝을 쉴 수 없는 이유다.

훈민당 박효민 대표. ⓒ제주의소리
훈민당 박효민 대표. ⓒ제주의소리

“도장이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죠. 나랑 같이 늙어가는 거죠. 도장하면서 자식들 다 키웠고 장가도 보냈고... 예전에는 장사도 잘됐고, 지금은 좀 힘들지만 지금도 일할 수 있고. 언제까지는 도장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도장은 같이 가는 인생이자 동반자예요. 내가 눈이 안 보이고 못할 때까지 도장은 계속 할 거니까. 손님이 없어서 하루에 한 두 개를 할 수도 있지만 상관없어요. 그래도 가끔은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요.

눈이 잘 안 보이면 돋보기를 써서 안될 때까지 계속 할 거예요. 또 건강하게 계속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사는 게 인생이죠. 그렇게 살아야죠. 훈민당은 계속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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