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유해진 지사①] 서북청년단과 내도...3.1절 파업 세력 '검거숙정'

초대 도정을 이끌었던 제주출신 박경훈 지사가 1947년에 발생한 '3.1사건'으로 전격 사임하자 미군정청은 한독당 노농(勞農)부장으로 있던 전라북도 출신의 유해진(柳海辰.43세)을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탁했다.

미군정청은 3.1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그해 2월10일 인사업무를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인 민정장관에 국민당과 한독당 당수 출신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을 발령한 상태했다.

유해진이 안재홍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은 1947년 4월8일이었다. 그러니까 박경훈 지사가 안재홍으로부터 사표가 수리됐다는 통보를 받기 하루 전이었다.

안재홍과 유해진은 당시 우익계열의 대표적 정당인 국민당과 한독당의 창당 동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해방전 일본 유학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안재홍은 유해진에게 제주도지사로 가야겠다는 통보하고 "지금 제주도는 모든 행정기관이 좌익의 책동에 의해 총파업을 하고 있어서 사태수습이 시급한 실정이다"고 말하고 "유 부장이 그 막중한 책임을 맡아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안재홍은 이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제주 땅에 좌익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민생안정과 치안유지에 모든 힘을 기울여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안재홍이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내정한 것은 제주지방에서 준동하고 있는 좌익 세력을 전면적으로 척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오백 그루 나무의 주인 '우월 주의자' 유해진

유해진은 일본 중앙대학 시절에 안재홍을 만났다. 안재홍은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한 후에 중앙대학 학감으로 잠시 재직하고 있었다. 유해진은 이러한 이유로 해방 후에 안재홍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국민당을 창당하는 일을 도와주며 동거동락해 온 막역한 사이였다. 또 안재홍이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한국독립당을 통합하여 한독당을 출범할 때에도 창당주역으로 활동했다

유해진은 1904년 5월25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석전리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중동학교 시절 여러 차례 퇴교위기를 맞았으나 가까스로 졸업한 그는 집안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완주군의 만석지주의 2남인 유해진은 철저한 우월주의자였다. 경제형편이 풍족했던 그는 일본유학 시절에 영국인 가정교사를 두어 영어교육을 받을 만큼 귀족의식과 선민(選民)의식이 대단했으며 기차를 타도 침대 칸이나 일등 칸만을 고집했다.

심지어 일본 북해도로부터 직접 말을 사들여 승마를 배웠으며 당시 서민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서양식인 토스트를 상식할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영향으로 자신의 호를 오백주인(五白株人)과 우계(友溪)였다. 나무 오백 그루의 주인이라는 뜻의 오백주인은 바로 그의 풍족한 경제와 엘리트 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유해진은 일본에서 중앙대학을 졸업한 후 경도제대(京都帝大)에 들어갔으나 일본 유학생들의 지하지(地下誌)였던 「흙」사건에 연류돼 2년여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되기도 했다.

신임 유해진 지사는 제주에 부임하기 전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출신 인사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나는 한독당 당원이다. 그러나 내가 지향하는 바는 극좌 극우를 배제하고 중앙노선에 입각한 정치이념에서 우러난 행정을 추진하는 데에 있다. 나는 제주도에 대해서는 전연 백지상태이므로 앞으로 재경 제주출신자들의 절대적인 협력과 후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유해진 지사가 부임한 것은 4월20일이었다.
유 지사는 제주도내 각급 기관장과 도청 직원들이 참석한 취임식에서 "지금은 미군정시대이지만 하루빨리 우리 정부가 수립돼야할 시기가 됐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고 "따라서 각 기관에서는 파업을 조속히 수습하여 민생안정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촉구했다.

유 지사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제주도 일원에 대한 순시에 나섰다. 제주가 처음 그로서는 현지실정과 주민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 지사는 며칠동안의 순시를 마친 후에 가진 관계기관 파업수습대책회의에서 "파업을 주동한 좌익계를 뿌리째 뽑아내는 일만이 이번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고 말하고 파업 주동자 색출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도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3.1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차에 새로 부임한 유 지사마저 파업 주동자 색출을 지시하고 나서자 또다시 일어날 칼바람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유 지사는 부임할 때 자신의 경호원 격으로서 서북청년단원 7명을 대동하고 왔는가 하면 야간에는 그들에게 도지사 관사를 경비하도록 하는 등 제주도에 대한 선입견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제주도내 우익진영은 제주출신 박경훈 지사에 이어 부임한 후임 도지사가 타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모두 불만을 가졌지만 유 지사가 자신들의 후원세력인 한독당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미군정청 쪽에 드러 내놓고 불평을 하지 못했다.

도청 공무원 90명 중 40명이 구속 파면...광복청년회 곳곳에서 테러 자행

4월15일 파업주동자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경찰에 내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청직원들에 대해 다소 미온적이었던 경찰은 임관호 산업국장을 포함하여 도청 파업을 주동했거나 동조했던 간부직원들을 모두 구속했다.

임 국장은 3.1파업 당시 도청파업투쟁위원장을 맡은 혐의였다. 파업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전 도적으로 엄청난 숫자에 달했다. 경찰서 유치장은 이들로 크게 비좁아 구속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 지사는 이어 도내 각 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 중에 불온사상을 가지고 파업에 동조한 사람들도 모두 숙정하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숙정작업은 도청과 군청, 경찰, 운수, 체신 등 모든 행정기관에 걸쳐 대대적으로 단행됐다. 당시 도청직원의 숫자는 90명이었으나 숙정작업으로 상당수가 파면됨에 따라 50여명이 겨우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 지사의 숙정조치는 교육계에도 불어 닥쳤다. 학교마다 10여명의 교사가 한꺼번에 파면되는 바람에 수업을 할 수 없었으며 업무가 마비됐다. 이 때문에 각 기관에서는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사상과 신분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우선 채용부터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에서는 부족한 교사를 채우기 위해 도청 직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관공서마다 자질이 떨어지는 직원들을 채용하다보니 공문서에 「李氏」를 「二氏」로, 「吳氏」를 「五氏」로 작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좌익이나 파업 주동자로 몰려 파면된 사람들은 졸지에 직장을 잃는 바람에 미군정청과 경찰, 행정기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나중 한라산과 지하로 잠적하여 4.3사건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 지사는 우익 진영의 각 청년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좌익계를 철저히 색출하여 검거하라는 엄명을 계속 내려보냈다. 심지어 학생연맹을 학교마다 조직하여 활동비를 지원하는 등 당시 동문로에 있는 운주당을 학련의 사무실로 제공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원성은 더욱 심해갔으며, 사회 곳곳에는 테러행위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김인선(金仁善)이 단장을 맡고 있는 광복청년회는 지금의 칠성로 아리랑백화점 자리에 사무실을 설치한 뒤에도 그때까지도 파업을 풀지 않고 있는 기관과 단체들을 대상으로 주동자 색출작업을 벌였다.

이처럼 좌익에 대한 탄압이 날로 강화되자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단체에서는 유 지사를 비롯한 도청 간부들과 광복청년단장 제거계획을 세우고 이들을 암살하는 자에 대해서는 현상금을 주겠다는 전단까지 붙일 정도였다. 전단에는 유 지사 암살에 1만원, 김인선 단장 암살에 1만50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잇었다. 도지사보다 광복단장 암살에 현상금이 더 많았던 것은 당시 좌익계에 대한 우익단체들의 색출작업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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