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지역 4.3순례 동행취재](하) 억울하게 형무소 끌려가 ‘사라진 제주 4·3행불인들’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 제사상을 마련한 뒤 4.3행불인 영령을 기리고 있는 유족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지난 21일부터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 앞에 제사상을 마련한 뒤 4.3행불인 영령을 기리고 있는 유족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지난 21일부터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한국전쟁을 제외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잔혹한 7년여(1948~1954년)의 제주4.3 기간, 도민들은 셀 수도 없이 내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었다.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중산간 마을에 있었다거나 건장한 청년이라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한라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학살을 위한 ‘빌미’에 불과했다. 그렇게 3만여 명에 달하는 도민들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죽임당하거나 고초를 겪고,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부터 3일간 형무소를 비롯한 4.3행불인 순례를 진행 중이다. 순례는 제주4.3유족회 경인위원회가 주관했다.

지난 21일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현 서울서부지방법원), 인천형무소(현 인천지방법원)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마친 이들은 22일 인천시 강화군 평화전망대로 향했다. 

순례단은 강화 평화전망대에 올라 2km 남짓 떨어진 북한 개풍군 일대를 바라보며 행방불명된 누군가의 가족을 떠올렸다. 실제로 4.3 당시 형무소에 붙잡혀간 수형인들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북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최남단 제주에서 올라와 대한민국 영토 최북단까지 올라온 순례단은 북으로 간 4.3행불인을 위해 간소하게 묵념하고 마음을 다해 한스러운 이들의 영면을 기렸다.

4.3 당시 형무소에 끌려간 뒤 의지와 상관 없이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 행방불명인을 위로하는 묵념 중인 순례단.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4.3 당시 형무소에 끌려간 뒤 의지와 상관 없이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 행방불명인을 위로하는 묵념 중인 순례단.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인천시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일대. 4.3 당시 이유도 모른채 붙잡혀 형무소에 끌려간 수형인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생존수형인과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증언으로 밝혀졌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인천시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일대. 4.3 당시 이유도 모른채 붙잡혀 형무소에 끌려간 수형인들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생존수형인과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증언으로 밝혀졌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4.3이 발생한 이후 불법 군법회의로 수형 생활을 한 피해자는 2530명으로 파악된다.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 4.3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군법회의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정부기록보존소 ‘군법회의 명령’ 수형인명부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4.3의 기점이 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까지 4.3 관련 사법부 재판을 통해 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4.3 당시에는 군인과 군속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가 수차례 열렸는데 민간인을 대상으로도 열리면서 피해자가 속출했다. 

군법회의는 크게 ‘1948년 군법회의’와 ‘1949년 군법회의’로 나뉜다. 

1948년 군법회의는 12월 3일부터 12월 27일까지 12차례 열렸고 871명이 유죄가 됐다. 대상자는 △사형 39명 △무기징역 67명 △징역 20년 97명 △징역 15년 262명 △징역 5년 222명 △징역 3년 4명 △징역 1년 180명 등을 선고받았다.

1949년 군법회의는 한라산에 피신해 있다가 하산해 도내 각지 수용소에 감금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열린 것으로 파악된다. 군법회의 명령에 의하면 194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총 10차례 개최됐다. 

대상자 1659명은 △사형 345명 △무기징역 238명 △징역 15년 308명 △징역 7년 706명 △징역 5년 13명 △징역 3년 25명 △징역 1년 22명 △미확인 2명 등을 선고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1948년 군법회의 당시 사형과 무기징역은 12.1%였는데 1949년 군법회의에서는 사형과 무기징역 비율이 그 두 배가 넘는 35.1%에 달했다. 

군법회의 대상자들 중 벌금형이나 구류, 집행유예 등을 언도 받은 사람은 풀려나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금고나 징역 등 실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은 제주에 형무소가 없어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1948년에는 제주도 중산간지대 소개령으로 시작된 ‘초토화작전’ 당시 단지 마을에 있었다는 이유로 군부대에 체포당한 무고한 주민들이 제주농업학교 등 수용소에 임시 수감됐고, 무장대와의 관련 여부를 가리기 위한 조사를 받았다. 

애초에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는 내용의 제9연대 대량학살계획이 있었기에 주민들은 죄 없이 잡혀와 군법회의에 회부 됐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4.3 피해자들의 이름 등이 기재된 희생자 명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군법회의에 회부된 4.3 피해자들의 이름 등이 기재된 희생자 명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군법회의와 관련된 군집행지휘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군법회의와 관련된 군집행지휘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1949년에는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선무작전이 이뤄졌고, 이에 속은 주민들이 대거 하산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으로 파악된다. 강력한 진압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민간인들이 선무작전 방침에 따라 내려온 뒤 강경 처리로 희생당한 것.

당시 군 당국의 방침은 여자·어린이·노인들은 피난민으로 분류하고, 전투 가능 나이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를 부여하기 전에 철저히 검색, 교육한다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군 당국은 ‘국방경비법’을 적용, 이들을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버렸다. 군법회의 대상자 중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살아 돌아온 희생자들은 당시 재판을 받지 않고 수감됐다거나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형식적인 재판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군법회의에 집단적으로 회부된 경우는 △가시리 여성 집단 검속사건 △가시리 주민 집단 검속사건 △조천면 자수사건 검속 △애월면 서부지역 외도지서 장작 노역 동원 사건 검속 △금덕리 물거리 검속 △가시리 청년 집단 검속 등이 있다. 

도내 곳곳에서 군경에 검속된 4.3 관련 혐의자들은 각 경찰서나 수용소 등에 수감돼 조사를 받은 뒤 형무소로 끌려갔다. 이때 성인 남성의 경우 목포와 마포, 대구형무소로 복형이 결정됐으며, 소년수는 인천소년형무소 보내졌다. 여성은 전주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수감됐다.

이들은 형기를 채우고 출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열악한 형무소에서 옥사, 학살당했으며 6.25 한국전쟁 당시엔 총살로 목숨을 잃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 당국은 형무소 별 불순분자 처리 방침을 세우고 상당수를 총살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형무소 문이 열린 틈을 타 사방으로 흩어진 뒤 행방불명됐다.

서울 서대문, 마포형무소와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은 북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장악함에 따라 출소, 각지로 흩어진 뒤 행방불명된 경우가 많았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한 4.3 수형인 생존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또 4.3 관련 재소자 중 열악한 수용 환경으로 인해 병사하거나 미결수로 재판 대기 중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인천에서는 이질 전염병이 유행해 많은 재소자가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같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생존한 사람 증언에 의하면 많은 제주 수형인들이 질병으로 숨지기도 했다. 제주4.3사건추가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옥사자는 61명에 달했다.

수많은 사람이 불법 군법회의에 따라 희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한 사례는 얼마 없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군사재판 2530명 가운데 직권재심이나 유족회, 도민연대, 개인소송 등으로 공소기각 또는 무죄를 받은 사람은 6월 14일 기준 530명이다.

158명은 현재 재판 절차를 진행 중이며, 전체의 약 70%가 넘는 비율인 1842명은 아직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억울한 죄의 누명을 쓴 그대로다. 이는 제주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아직도 각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가족을 둔 유족들은 그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다. 순례단이 형무소 터를 찾아간 날, “나 와수다”라는 말로 시작된 눈물은 함부로 닦아내기 힘든 응축된 한(恨)의 덩어리였다. 제주4.3은 아직 갈 길이 멀다. / 인천=김찬우 기자

제주4.3재심 사건의 발단이 된 4.3수형인 명부.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사 보관창고에서 찾은 국가 문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재심 사건의 발단이 된 4.3수형인 명부.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사 보관창고에서 찾은 국가 문서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1일 서울과 인천지역에 형무소에 수감 됐던 불법 군법회의 수형 피해자들을 기리는 순례를 진행했다. [사진=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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