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8) 무릉리 이응춘 어르신 이야기

이응춘 어르신과 부인은 단둘이 배를 타며 35년 어부 부부로 사셨다. ⓒ김진경<br>
이응춘 어르신과 부인은 단둘이 배를 타며 35년 어부 부부로 사셨다. ⓒ김진경

“가파도 운동 날 마을 사람들 모두 운동장으로 갔지. 그때 상동에 노 젓는 배 하나가 보여 그 배를 타고 도망가서 부산으로 갔어.”

6월의 어느 날, 조용하고 평화로운 무릉1리의 한 가정집에서 어르신을 만났다. 나는 어르신이 당연히 무릉리에서 태어난 토박이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르신의 고향은 뜻밖에도 가파도. 나의 외가가 가파도인지라 나는 어르신이 유독 반가워 어르신의 청춘의 흔적에서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조각이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응. 강태익 형님 잘 알지. 잘도 좋으신 분이라. 그런데 너무 일찍 돌아가셔부난 막 안타까원.”

1942년 10월 출생인 이응춘 어르신은 가파도에서 3남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르신의 기억에 어머니는 가파도에서 대상군이었고 아버지는 뱃사공이었단다. 어머니 망사리에는 다른 해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실한 전복들이 가득 차 있었고, 뱃사공인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올 정도였단다. 어르신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배에 태우고 대마도로 출가물질을 자주 다녀오셨다고 했다. 대마도로 출가물질을 갔다 돌아오는 배에 기와를 가득 싣고 오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기와집은 가파국민학교와 우리집밖에 어서났지. 우리 아버지가 대마도에서 기와를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 초가집을 다시 기와집으로 지었거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어르신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런데 어르신이 6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폐렴으로 돌아가시고 일 년 후 어머니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셨다. 의지할 사람은 형제들밖에 없었던 십대 시절 둘째 누나가 17살에 세상을 떠났고 큰 누나의 남편인 매형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형도 해병대에 지원해 버리면서 형제들마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이응춘 어르신은 샛아빠(둘째아빠)의 손에서 자랐단다. 가파초등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1954년 개교한 가파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공부로 달래보려 했지만 일 년 못가 학교가 없어져버려 더 이상 공부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샛아빠가 우리를 돌봐 주시다 형이 군대 가 버리니까 샛아빠가 안거리에 들어오시고 난 밖거리 방을 꾸며서 밖거리에서 살았어. 큰고모가 보리쌀이랑 감저빼때기도 주셨고 육촌 형님도 많은 도움을 줬지.” 

가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없이 사는 어르신이 딱했는지 마을이장님이 우체국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배를 타고 모슬포 우체국으로 나가서 가파도에 들어오는 편지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일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다른 돈벌이가 필요했던 어르신은 자릿배에 올랐다. 

“자릿배에 자리를 가득 뜨고 모슬포 포구로 들어와. 뱃고동을 왕~ 부르면 사람들이 ‘자릿배 왔져’하며 다들 뛰어오지. 우린 그렇게 자리로 먹고 살아나서. 사람들은 자리로 자리물회영 자리구이영 자리강회영 자리젓 담가서 먹기도 해. 이쪽 모슬포 사람들한테 자리는 일년 동안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인거지.”

그렇게 어르신이 자릿배를 타서 받은 삯은 보리쌀이었다. 돈이 귀했던 그 시절, 돈 대신 받은 보리쌀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 보리쌀마저도 이응춘 어르신에게는 귀한 음식이었다. 아무리 친척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먹을 것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어르신은 보리쌀로 가을에 수확하는 생고구마(물고구마)를 장만했단다. 그 고구마로 빼때기를 만들어 집 옆에 땅을 파서 빼때기를 묻고는 겨울철과 봄철까지 그 빼때기로 끼니를 때웠다. 먹기 지긋지긋하다고 누군가는 투정할 수도 있는 빼때기지만 어르신에게는 소중하고 귀한 양식이었다. 하루에 두 끼 보리쌀을 먹으면 무척 잘 먹은 거라고, 하루에 한 끼를 먹을 때가 많았고 그 한 끼도 쌀이 아닌 빼때기인 경우가 허다했다.  

“가파도 사람들은 보리장 많이 해나서. 콩에 보리쌀 틔워서 발효시켜 만든 보리된장 많이 만들었지. 밥은 그저 보리밥에 보리된장에 자리젓, 멜젓이었지.”  

일찍 여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은 친척들의 보살핌만으로는 채울 수가 없었다. 형제들도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려 외로운 그 시절에 어르신이 의지한 사람은 동네 친구 수현이었다. 수현이 역시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혼자가 돼 버린 탓에 비슷한 처지의 어르신과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둘이 어르신의 방에서 살며 동고동락하고 의지했다.

그런 수현이가 어느 날 배를 타고 도망을 가 버렸다. 그리고는 곧 어르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지금 부산에 와 있으니까 배 타고 부산으로 와서 같이 돈 벌자고. 어르신은 고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편지를 받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파초등학교 운동장에 운동회 하러 간 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그때 어르신의 나이 21살이었다.

그렇게 부산으로 건너가 수현이를 만나고 부산 중앙로 시온다방 앞에서 구두닦이 생활을 했다. 부산 와서 펴질 것 같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비가 오면 구두닦이 벌이가 없어 왕초에게 매를 맞기 일쑤였고 왕초가 마련해 준 집에서 밥을 먹으려면 돈을 또 내야하는데 그 돈이 없으면 또 두드려 맞았다. 그러면서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노숙도 하며 수현이와 함께 밤새 펑펑 울면서도 어떻게든 부산에서 정착해 돈을 벌고 성공하자고 말했다. 

어느 날 광복동 야시장에 놀러갔는데 어떤 남자가 어르신의 뒷덜미를 콱 잡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서귀포 남해여관 삼춘이었다. 삼춘은 가파도 해녀들이 작업한 물건들을 부산에 와서 팔았는데 가파도에서 응춘이가 부산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연히 야시장에서 어르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수현이는 도망가고 어르신만 잡혀서 남해여관 삼춘배로 끌려갔다. 배를 타고 제주로 오는 바다에 위에서 삼춘이 어르신에게 물었다.

“너 서귀포 머구리배(잠수기선) 탈래? 여관에서 일할래?”

배는 죽어도 타기 싫었던 어르신은 삼춘의 남해여관에서 2년 정도 일을 하며 서귀포에서 살았다. 여관손님들 심부름도 하고 잡일도 하며 살던 때, 가파도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수현이가 가파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한달음에 가파도로 들어가 수현이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어쩌면 형제보다 가까이 지냈던, 동고동락하고 함께 외로움을 나눈 사이였다. 부모 없는 고향 가파도도, 더 외롭고 두려웠던 타지의 부산도 수현이와 함께였다. 이후 어르신은 남의 배에 기관사로 일하며 살았단다.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돈이 쉽게 모이지 않아 혼기도 놓치고 점점 나이도 들었다. 그러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는지 해병대를 전역하고 결혼 후 무릉에 살고 있었던 형님이 처가친척이 소개해주셨다며 무릉 아가씨를 소개해줬다. 그렇게 31살의 나이에 늦장가를 가고 서귀포항 근처에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당시 어르신은 남의 배를 타고 있었고 부인은 해녀였다. 운명처럼 이응춘 어르신의 부모님과 같았다.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무릉리로 돌아와 살았던 초가집 앞에서 찍은 사진, 여전히 이응춘 어르신은 이 집터에 살고 계시다. ⓒ김진경

어르신에게는 가족이 생겼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이제껏 느꼈던 외로움과 가족 없는 슬픔을 달랠 따뜻한 내 보금자리도 생겼다. 비록 생활을 어려웠지만 남의 나룻배타고 번 돈으로 아내와 힘을 합쳐 살며 두 딸을 얻었다. 다시 또 남의 배 기관사로 배를 타며 겨우 먹을거리만 해결하는 삶이 고생스럽고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이응춘 어르신은 행복했다. 마음 붙일 사람 하나 없이 텅빈 집에 살았던 어르신에게 이제는 아이들 소리로 꽉 채운 작지만 소중한 보금자리가 있었고 책임져야 할 소중한 가족이 생겼다. 더 젊었던 시절에는 머구리배와 호텔일 중에서 호텔일을 선택할 정도로 배 타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치 운명처럼 배를 타는 일은 어르신의 생업이 되었고 바다는 가족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터전이 되었다. 그렇게 바다는 어르신의 삶이자 어르신 가족의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서귀포수협 중매권을 가진 윤한경이라는 부산 분이 모슬포에 와서 배를 샀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그리고는 어르신과 어르신의 친한 형님을 찾아와 일본사람들이 복어를 최고로 쳐 주니까 돈이 좀 될 것이다, 나랑 같이 부산에서 복어를 해 보자고 제안을 했단다. 친한 형님은 난 가족 두고 못 가겠다고 거절을 했고 어르신은 돈을 벌 수 있다면야 못 갈 이유가 없었다. 15살에 고산리로 혼자 와 소테우리를 하고 있던 경기도 포천출신 장석봉을 설득해 그와 함께 다시 부산으로 넘어갔다. 모슬포에서 윤한경씨가 산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착해 처음엔 당장 잘 곳이 없어 배에서 자다가 나중에는 방을 얻어서 석봉씨와 살았다. 복어배는 부산에서만 복어잡이를 한 것이 아니라 서귀포, 마라도 앞까지 와서 조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좀 덜했다. 일본인들이 최고로 쳐 준다는 복어가 제주바다에서 나는 복어라고 생각하니 어르신은 제주바다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또, 부산에 살지만 내 삶의 터전은 제주바다라고 생각했다.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이응춘 어르신은 배 운영권도 맡게 되고 선원관리도 하게 되었다. 벌이도 조금씩 나아져 서귀포에 있는 부인과 두 딸을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부산에서 가족이 완전히 모였다. 어르신은 부산에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낳았고 그 사이에 석봉씨도 참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어르신의 와이프가 7개월 된 셋째 딸을 등에 업고 여기저기 다니며 송도에 집도 구해주고 신혼집도 꾸며주었다. 솥이며 그릇이며 이불이며 이응춘 어르신이 다 장만해 주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무작정 어린 나이에 제주에 내려와 소테우리를 하며 고생하며 살았던 고아 석봉씨가 남 같지 않았다. 그렇게 가파도 고향친구 수현이나 고산리 소테우리 석봉씨는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의 복어조업 덕택에 그나마 힘들었던 살림이 조금이나마 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복어작업을 하러 부산에서 마라도로 출발했고 며칠 씩 타는 배를 콤파스와 시계만 가지고 마라도까지 찾아가는 길은 늘 같은 일정임에도 매번 예민하고 피곤한 항해였다. 뭍에 잠깐 정박하여 미끼를 사고 그물작업을 하고 다시 마라도쪽으로 가다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새벽4시 지꾸도(남원읍 위미리 지역의 무인 섬인 지귀도를 일컫는 말)에 전복되었다. 지꾸도에 선원들이 모두 올라가서 나무깡에 헝겊을 덧대 불을 붙여 신호를 보냈고 곧 구조를 하러 작업배들이 왔다. 위미 뭍으로 도달해 보니 위미어촌계에서 톳작업을 하던 초가집이 있어 도움을 요청하려고 들어갔다고 한다. 들어가니 당시 해녀들이 깜짝 놀라 소리지르니 당시 표선사람이었던 기관장과 어르신이

“간첩 아니우다. 간첩아니우다. 도와줍써.” 

라고 간청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해녀들은 안심하며 선원들을 도와줬다고 한다.

그렇게 부산 선원들을 다시 부산으로 보냈다. 하지만 난파 된 배를 수습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부산에서 배를 타며 모은 돈을 조금씩 큰 처남에게 보냈었고 그 돈으로 사고수습에 필요한 비용을 보탰다. 그리고 다시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돌아오고는 다시 남의 배를 타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고향도 아닌 타지에서 딸 넷을 키우며 배를 타러 나간 남편이 혹여나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삶이여서였을까. 부인분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다시 남의 배를 타며 버는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 이상 부산에서 살 이유가 없어졌다. 무릉리 형수에게 제주에서 살 집을 구해달라고 말 한 뒤 부인과 딸 넷을 데리고 다시 아내의 고향인 무릉리로 돌아왔다. 그때가 어르신이 38~39세가 되던 무렵이었다고 한다. 

가파도, 부산, 서귀포를 오가며 떠돌이처럼 지냈던 어르신의 팔십 인생 전반부의 삶 이후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정착한 무릉리의 초가집은 지금 81세 이응춘 어르신이 살고 있는 집터였다. 마흔 이후 무릉리에 정착해 살아오신 이응춘 어르신의 삶의 터전은 어디였을까? 나는 어르신께 물어보았다.

“나? 당연히 바다지. 제주에 내려온 다음부터 집은 무릉이었지만 내 집은 바다고 배였어. 우리 와이프와 함께 35년 동안 배를 탔는걸.”

나는 인생 후반부의 어르신의 삶의 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해졌다.

평생 남의 배를 타시다가 처음으로 내 배를 샀던 그날 어르신의 미소는 어땠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일러스트=色色
평생 남의 배를 타시다가 처음으로 내 배를 샀던 그날 어르신의 미소는 어땠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일러스트=色色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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