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79) 삼 년 가물어도 할 일 다 못한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고물아도 : (비가 안 와) 가물어도

한국의 농촌은 바쁘다. 사시사철 바쁘다. 이렇게 말하면 웃을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추수해 갈무리해 놓고 나면 겨울 한철 한가하다고 헤서 농한기가 아닌가고.

하지만 아니다. 

이것은 우리 농촌 실정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다. 농촌에서 검질(김) 매고 조 베고 보리와 산디(산도) 베고, 그것들을 집 마당에 놓고 도리깨로 타작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농촌을 알겠는다. 물론 봄 여름 가을처럼 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매고 거둬들이는 농번기와는 다르지만 한가하지 않았다.

밭 일하는 소와 부부. 1991년도 제주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밭 일하는 소와 부부. 1991년도 제주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노인은 산도짚으로 맥이나 멍석을 졸고(멱서리나 멍석을 짜고) 더 부지런한 이는 짚신짝을 삼아 오일장에 내다 팔아 가용(家用)에 보탰다. 그런가 하면 여인들은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물질해 소득을 올렸다. 물질을 못하는 여자도 집에서 이불 위나 뒹굴지 않고, 바닷가에 나가 듬북(밭에 밑거름하던 해조류)을 건져 말렸다. 하다못해 낡은 그릇을 고치고 닦아 쟁였다. 

마굿간에서 우걱우걱 촐(꼴)을 씹는 마소에게 하루 한 번 담수가 솟아 나올 물때를 보아 끌고 가 타는 목을 축여 주어야 한다. 마소가 일고여덜 마리가 되면 끌고 갔다 왔다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시켜서 될 일이 따로 있다. 

농번기만 바쁘지 않고 농한기는 농한기대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게 우리의 농촌이고, 농민들의 삶이다.

‘삼 년 고물아도 헐 일 다 못헌다.’

삼 년은 가물어도 할 일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보다 더 확대해 표현한 향대과장법에 의한 표현으로, 그렇게 농촌이 바쁘다는 것을 극한에서 나타내려 한 것이다. 아무리 가문다 한들 삼 년을 비가 안 오면 농사짓고 사는 농부들은 살지 못할 게 아닌가. 그렇게 바쁘다고 빗댄 것이다.

요즘 우리 농촌은 이농현상으로 일손이 없어 최악의 상황이다. 게다가 농촌에 아기 울음솔가 사라진 지 몇 년인가. 젊은이들이 너나없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떠나갔지 않은가..노인들이 농사짓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근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마저 뜸해 농민들의 수심이 깊다.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다리 뻗고 앉아 쉴 틈 없이 일하는 우리 농민들이 휜 허리 펴고 잠시 쉬면서 살 날이 언제면 올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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