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터뷰] 좌남수 의장 “퇴임 후? 천성이 노동운동가, 쓴소리 계속 낼 것 같다”

 

의원배지를 처음 단 게 2006년, 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였다. 이때부터 네 번 연속 제주도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4선 의원에 의장까지. 순탄했을 것 같지만, 사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1991년 지방자치 부활과 함께 제도권 입성을 노렸지만, 벽은 높았다. 의원 배지를 달기까지는 그로부터 15년 후. 비례대표로 8대 의회에 입성했다.

4년 후에는 지역구에서 당선됐지만,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의 일이 또 발목을 잡았다. 사회단체 보조금 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의사당을 떠나야 했다. 그래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 와신상담, 절치부심 끝에 10대에 이어 11대까지 연속 당선됐고, 결국 의장 자리에 올랐다. 

좌남수 의장(한경면·추자면)의 얘기다. 그의 입은 거칠다. 세련된 정치인의 언어가 아닌 거리에서 쓰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내는 그런 소리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호소력이 있다.

대표적인 게 도청 앞 천막촌 사람들과의 대화다. 의장에 당선된 후 매일 같이 천막촌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했다. 제주시장이 행정대집행에 나섰을 때 결사적으로 맞섰던 이들인데, 좌 의장이 대화를 시작하고 나서 제2공항 관련 천막을 제외하고는 전부 자진 철거했다. 

‘미스터 쓴소리’. 좌 의장에게 따라붙는 별명이다.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정치를 시작한 후 위정자들을 향해 그는 ‘쓴소리’를 건네는데 마다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그의 ‘쓴소리’는 계속될 듯하다. 퇴임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지만, 저는 천성이 노동운동가다. 도민 편에 서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선 쓴소리를 하면서 살려고 한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12대 의회, 후배 의원들에게는 “초심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치을 하려는 이유, 도의원이 되려고 한 이유를 계속 되뇌어야 괴물이 되지 않는다”는 충고였다.

인터뷰는 지난 23일 오후 의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 ⓒ제주의소리
좌남수 제주도의회 의장. ⓒ제주의소리

Q. 405회 임시회를 끝으로 14년간 드나들었던 정든 의사당을 떠나게 된다.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14년 동안 내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것 같다. 어느 시인의 이야기처럼 떠날 때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을 명심해서 도민들에게 떠날 때 아름다운 모습인지 아닌지는 도민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졌으면 좋겠다. 

Q. ‘도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의정’을 표방했던 11대 의회 후반기 의정, 2년을 돌아보는 소회는?
- 도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의정을 슬로건으로 내건 이유는 도민들 속에서 도민 의견을 충분히 도정에 반영시키고 또 진정이나 민원을 도민 스스로가 해결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도민들이 제가 생각한 것만큼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도민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그리고 도의회에서 전국 처음으로 코로나 특위를 구성해서 운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산을 많이 증액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자라다. 우리가 나름대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했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Q. 정치라는 게 참 냉혹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도 되는 게 정치인데, 정치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좌남수 의장. ⓒ제주의소리
좌남수 의장. ⓒ제주의소리

- 사회생활을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체질에 맞지도 않고 해서 그만두고, 어린 나이지만 제3공화국 시대부터 노동운동을 했다. 제가 27살 때, 78년도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는데 왜 했느냐면 동료들이 거의 운전기사나 한전 전봇대 올라간다거나 그런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래서 노동운동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하다 보니 사회도 그렇지만 도정에서 노동자를 보는 시선이 상당히 왜곡돼 있었다. 노동의 신성함을 몰라서 노동자는 시끄러운 존재, 공산당 하는 놈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91년도 지방자치제 부활할 때 처음으로 출마했다. 당시는 명문가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중심으로 도의원에 출마했었는데 저는 노동자로 출마했는데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자 목소리를 도정에 반영시켜야겠다. 우리가 머리띠를 둘러서 도청 앞에 가서 농성하고 시위하고, 심지어 우리 동지 한 분이 1998년도에 분신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이는 도저히 어떤 경우라도 지방정치를 해서 노동자의 애로사항을 타파하겠다는 의지로 한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하는 목적 다 다르겠지만 저는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 

Q. 의원 생활을 의장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큰 영광이다. 후반기 의정 2년을 이끌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
- 의장으로 보람된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4.3특별법 개정 문제를 꼽겠다. 전국 17개 시·도를 전부 방문했다. 그때마다 박수를 받았고, 우리 애로사항을 충분히 듣고 각 시도에서 4.3특별법 개정 촉구 결의안을 내준 것에 대해 상당히 보람을 느낀다. 문재인 대통령이 4.3행사 때 와서 4.3특별법을 개정하는데 전국 시도에서 촉구 결의안을 내준 것이 많은 힘이 됐다는 말을 했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도 하지 않았나?) 저는 시위가 전문이니 아무 어려움 없었지만, 특별법 개정은 도민의 한이 서린 것 아니냐. 심지어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도 원희룡 지사와 함께 만났고, 당시 여당인 민주당 당대표도 만났다. 그들로부터 고생한다는 말 들었을 때 상당히 뿌듯함을 느꼈다. 

Q. 많은 성과도 있었겠지만 아쉬운 것들도 많을 거라 본다. 어떤 점이 아쉬움으로 남나?
- 상당히 많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다. 제2공항 문제나 비자림로, 하수종말처리장, 쓰레기, 특히 저는 특별자치도를 반납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특별자치도 되면서 특별행정기관 7개가 이관됐다. 그중에서도 항만청, 도로관리청, 중소기업청은 받아선 안되는 거였다. 지금 도로를 넓히려고 해도 국가에서 지원을 안해준다. 전부 지방비로 해야 한다. 제가 한경면에서 제주시 출퇴근하는데 2006년 당시에는 40분이 걸렸다. 지금은 거의 100분 걸린다. 차가 많아졌다는 결론이다. 엊그제 원희룡 국토부 장관과 통화하면서 ‘이제 국토부 장관 됐으니 제주도 도로 문제 신경 써달라’고 했다. 그리고 항만청 관계, 항만청이 없기 때문에 제주항만이 포화상태인데 신항만을 못하고 있다. 신항만 개발하겠다는 고시는 했는데 돈이 없어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청이 제주로 이관됐는데 중소기업 문제도 통상진흥원 대신 만든게 전부다. 이런 식으로 방치하면 안 된다. 오영훈 당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하고 잘 해결하리라 보는데 예산을 충분히 가져오거나 아니면 기관을 반납하거나 강수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주의소리와 '이슈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좌남수 의장.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와 '이슈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좌남수 의장. ⓒ제주의소리

Q.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한번 더 하고 싶은 미련은 없나.
- 전직 의장들이 의장을 끝으로 다 그만뒀다. 12대 의원 선출 당시 한경면 추자도 어르신들은 한 번 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의장도 했고 나이도 있고 후배들한테 물려줘야 저보다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도민의 한 사람으로, 노동운동할 때처럼 확실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겠다.

Q. 6월 말로 임기가 끝난다. 퇴임 이후 삶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 쓴소리를 하는 게 제가 할 일이다. 일반 도민으로 돌아가면 그래도 무게감 있게 잘못된 부분이나 해야 될 부분 열심히 할 것이고 사회적 갈등에 대해 제가 할 부분 있다면 가서 열심히 설득하겠다. 제가 의장에 당선된 이후 도청 앞 천막이 10개가 있었는데 그 분들 만나서 그분들 목소리를 충분히 들었다. 그래서 제2공항 제외하고는 다 자진 철거했다. 제주시장이 강제 철거하려고 해도 못하던 것을 대화로 푼 것이다. 우리 제주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

Q. 의원 생활을 하면서 가정에 매우 소홀했을 것 같다. 가족들을 위한 계획은 없나.
- 가장 미안한 부분이 있다면 노동운동 때부터 제대로 집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거다. 이제 손주도 2명이나 생겼는데 손주들하고도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고 애들하고도 여행 한번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래도 애들 무럭무럭 자라서 직장도 갖고 공부도 잘해 안심은 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동안 가족에 소홀했던 만큼 많이 투자하려고 한다.

Q. 퇴임 후 당적은 계속 유지할 생각인가.
- 우리 제주는 당적 유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의원도 정당이 있긴 하지만, 의정활동을 하면서는 다 용광로처럼 녹여져 민주당, 국민의힘 내세우는 것이 거의 없다. 퇴임하고 당장 탈당하면, 당을 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당적은 유지하려고 한다. 당적 유모를 떠나 제 할 수 있는 역할은 열심히 하겠다.

Q. 7월부터는 이곳 의사당에 불 밝힐 주역들도 많이 바뀐다. 12대 의회, 후배 의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도 많을 것 같다.
- 당부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저는 노동자, 사회적 약자 목소리 내겠다고 해서 정치했는데, 끝까지 지켰다. 노동환경도 나아졌고 해녀 문제나 농민수당 문제, 어민수당 문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성과도 냈다. 해녀 문제만 해도 제가 8대 도의회 들어와 보니 토론문화가 없더라. 노동조합에서는 어떤 사안이 있으면 토론을 치열하게 한다. 그래서 제가 사비를 들여 토론회도 개최하면서 계속 토론문화를 만들어냈다. 2006년도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성사되는데 10년 넘게 걸렸다.

Q. 도민들의 사랑이 없었으면 지난 13년 치열하게 살지 못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치열한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도민 여러분, 정말 고맙다는 말씀 드린다. 그리고 감사하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도민들의 사랑, 채찍이 아니었나 싶다. 평의원에서 상임위원장, 예결위원장 등등 하며 의장까지 했다. 의장 하면서 마음속에서는 항상 도민이 있었다. 도민들한테 명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나보다 잘난 분이 도민이라 생각해서 존경하고 베풀면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변함 없는 사랑과 지지, 성원, 지도편달을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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