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88) 김동현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6월은 보훈의 달이다. 매년 이맘때면 국립현충원을 찾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호국’은 중요한 가치로 추앙된다. 전쟁 당시 남북한 합쳐 4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쟁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로 본다면 호국은 공산주의에 맞선 의로운 죽음이다.

하지만 전쟁의 모든 비극이 온전히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른바 ‘무력화 작전’으로 학살당한 100여 명의 민간인들의 죽음이나 한국전쟁 직후 남해 용초도에 구금되었던 7800여명의 국군 귀환포로들의 삶은 여전히 기억의 공백으로 존재한다. 월미도 주민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비석에는 ‘미군 폭격’이라는 단어조차 빠져 있다. ‘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을 신격화하는 사이에 정작 비극적인 죽음은 기억되지 않는다. 남해 용초도에 수감되었던 국군 귀환포로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학자인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의 <작은 ‘한국전쟁들’>에는 용초도 국군 귀환포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휴전 직후 1953년 8월과 9월 판문점 ‘자유의 문’을 통해 풀려난 국군 귀환포로들은 열렬한 환영식이 끝난 이후 그들의 사상을 증명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세뇌’ 교육을 받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즉결처분을 받거나 희생당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과 북의 적대적 대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았던 미군 폭격은 수많은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그 숱한 죽음 앞에서 ‘전쟁 승리’라는 명분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호국이 아니라 반전의 가치를 말해 한다. 해방 이후 남북의 평화적 통일과 자주 독립을 외쳤던,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목소리’들을 다시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52년 6월 24일 오사카 국철 스이타 조차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인 1천여명을 비롯한 시위대들은 조차장을 점거했다. 시위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학생과 노동자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들의 요구는 간명했다. 전쟁 물자 조달 반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군의 병참기지가 되었다. 패전 직후 고사 위기에 놓여있었던 일본 산업계는 전쟁 특수를 만난 셈이었다. 전후 일본의 부흥이 이웃나라 조선의 전쟁 때문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52년 일본에서 벌어진 스이타 반전 투쟁을 보도한 세카이 잡지. 사진=일본 위키디피아.
1952년 일본에서 벌어진 스이타 반전 투쟁을 보도한 세카이 잡지. 사진=일본 위키디피아.
1952년 일본에서 벌어진 스이타 반전 투쟁을 보도한 세카이 잡지. 사진=일본 위키디피아.
1952년 일본에서 벌어진 스이타 반전 투쟁을 보도한 세카이 잡지. 사진=일본 위키디피아.

재일조선인들은 전후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일본이 오히려 전쟁으로 경제적 특수를 누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군폭격 등으로 고향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군수 물자를 실은 전차의 발차를 1시간만 지연시키더라고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일명 ‘스이타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 현지에서 벌어진 중요한 반전 투쟁이었다. 

스이타 반전 투쟁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제주 출신인 부덕수도 있었다. 1929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제주 출신의 선장이었고 어머니는 해녀로 청진에서 물질을 했다. 9살에 제주도에서 기미가요마루를 타고 오사카로 이주한 그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했다. 스이타 반전 투쟁의 현장을 지킨 이 중에 한 명이 김시종 시인이다. 김시종은 시인은 스이타 반전 투쟁을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들이의 분출이자, 전쟁의 비극을 막고자 하는 저항의 몸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시집 <니이가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내리찍는/경찰 곤봉의/빗속에서/피거품이 된/ 동족애가/비명을 지르고/사산(四散)했다/나는/바야흐로/빛나는/포로/변기가/보장된/혈거에 있으면서도/여전히 변통(便痛)할 수 없는/개운치 않게/웅크리고 있는/스이타(吹田) 피고다 

일본 경찰의 곤봉 세례에도 전쟁을 막고자 했던 외침들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스이타 사건 20년이 지난 후였다. 일본 재판부는 당시 소요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일조선인으로 조선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을 막고자했던 그들의 저항이야말로 6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이다. 모든 윤리성을 소각해버리는 전쟁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 중국어 원고는 추후 게재됩니다. 


# 김동현

문학평론가. 제주에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국민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 《제주, 화산도를 말하다》(공저),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문화지리》(공저) 등이 있다. 한때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 오키나와를 중심에 두고 지역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제주MBC, 제주 CBS 등 지역 방송 프로그램에서 시사평론가로, 경희대학교 글로벌 류큐·오키나와연구소 연구원으로, 제주민예총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吹田反戦闘争70周年に憶う
キム・ドンヒョン

6月は報勲の月だ。毎年この時期になると人々は国立顕忠院を訪れる。済州も例外ではない。解放と分断、そして戦争へとつながる時間の中で「護国」は重要な価値として崇められる。戦争当時、南北合わせて400万を超える被害者が発生した。戦争を「共産主義」と「自由民主主義」の対決と見るなら、護国は共産主義に対抗した有徳の死だ。

しかし、戦争のすべての悲劇が完全に記憶されるわけではない。仁川上陸作戦当時、いわゆる「武力化作戦」で虐殺された100人余りの民間人の死や、韓戦争直後、南海龍草島に拘禁された7800人余りの国軍帰還捕虜の人生は依然として記憶の空白として存在する。月尾島住民の犠牲を称える碑石には「米軍爆撃」という単語さえ抜けている。「戦争の英雄マッカーサー将軍」を神格化する一方で、悲劇的な死は記憶されない。休戦直後、1953年8月と9月に板門店「自由の門」を通って解放された国軍帰還捕虜たちは熱烈な歓迎式が終わった後、彼らの思想を証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境遇となった。大韓民国は、彼らが共産主義洗脳教育を受けたのではという疑いのまなざしを緩めなかった。その過程で多くの人々が即決処分されるか犠牲になるなどした。

それだけではない。南と北の敵対的対決、軍人と民間人を区別しなかった米軍爆撃は数多くの死の原因となった。その無数の死の前で「戦争勝利」という名分ほど虚しいものはない。戦争が起きなかったら極めて平凡な日常を生きていけた人々だったのだ。

彼らの死を前にして、私たちは護国でなく反戦の価値を語る。解放以後、南北の平和的統一と自主独立を叫んだ、結果的には「失敗した声」を再びのぞきこまねばならない理由もここにある。

1952年6月24日、大阪の国鉄吹田操車場で大規模デモが起きた。朝鮮人1千人余りをはじめとするデモ隊は操車場を占拠した。デモ隊には朝鮮人だけでなく日本人学生と労働者たちも共にいた。彼らの要求は簡単だった。戦争物資調達反対だ。朝鮮戦争が勃発すると、日本は米軍の兵站基地となった。敗戦直後、瀕死の危機に置かれた日本の産業界は、戦争特需に出会ったわけだ。戦後日本の復興が、隣国朝鮮の戦争のおかげだったとは、歴史のアイロニーに違いない。

画像 : 1952年、吹田反戦闘争を報じた雑誌『世界』  写真=ウィキペディア・ジャパン

在日朝鮮人は、戦後に敗戦の責任を負うべきはずの日本が、逆に戦争による経済的特需を享受することが理解できなかった。さらに、米軍爆撃などで故郷の人々が死ぬことを容認できなかった。軍需物資を積んだ列車の発車を1時間遅らせるだけでも数千人の命を救うことができると彼らは考えた。「吹田事件」は朝鮮戦争当時、日本現地で起きた重要な反戦闘争だった。

吹田反戦闘争を主導した人物には済州出身のブ・ドクスもいた。1929に生まれた彼の父親は済州出身の船長で、母親は清津で漁をする海女だった。9歳で済州島から大阪に移住した彼は、夜間学校に通ううちに民族意識に目覚めたという。吹田反戦闘争の現場を守った一人が詩人の金時鐘だ。金は、「吹田反戦闘争は平和を念願する声の噴出であり、戦争の悲劇を防ごうとする抵抗の身振りだ」と評価した。彼は詩集『新潟』で当時の状況を歌っている。

日本警察の棍棒の洗礼にもひるまずに戦争を阻止しようとした叫びに対して、無罪判決が下されたのは、事件から20年が過ぎた後だった。日本の裁判所は当時、騒擾容疑に対して無罪とした。在日朝鮮人として、朝鮮の地で起きる戦争の惨禍を防ごうとした彼らの抵抗こそ、6月に我々が思い起こすべき歴史である。すべての倫理性を消却してしまう戦争を拒否することこそ、人間の尊厳を守るための出発点だからだ。 


Remembering the Suita anti-war struggle, June 1952
KIM Dong-hyun.

June is the month of rewarding patriotic soldiers. Every year at this time, people visit the National Hyeonchungwon. Jeju is no exception. In the time leading up to liberation, division and war, 'national defence' is revered as an important value. During the war,  there were over four million victims in the north and south of the country. If the war is seen as a confrontation between 'communism' and 'liberal democracy', the 'defence of the country' is the death of virtue against communism.

However, not all the tragedies of the war are fully remembered. The deaths of some 100 civilians massacred in the so-called 'armorization operation' at the time of the Incheon landings and the lives of some 7,800 returned POWs detained on Yongcho Island in the South Sea immediately after the war remain a void in memory. Even the words 'US bombing' are missing from the inscription stone commemorating the sacrifices of the residents of Wolmi Island. While the 'war hero General MacArthur' is deified, the tragic deaths are not remembered. Immediately after the armistice, the returned POWs of the National Army who were liberated through Panmunjom 'Freedom Gate' in August and September 1953 were forced to prove their ideology after the enthusiastic welcoming ceremony. The Republic of Korea did not relax its suspicions that they had been subjected to communist brainwashing and education. In the process, many were summarily executed or sacrificed.

That is not all. Hostile confrontations between the South and the North, and US bombings that made no distinction between military and civilian personnel, were responsible for numerous deaths. In the face of these countless deaths, there is nothing more empty than the name of 'war victory'. These were people who would have been able to live extremely ordinary lives had the war not occurred.

In the face of their deaths, we speak of the value of anti-war, not patriotism. This is also why we have to look again at the consequent 'failed voices' which, since liberation, have called for peaceful reunification and independence of North and South Korea.

On 24 June 1952, a mass demonstration took place at the Suita Yard of the Japanese National Railways in Osaka. The demonstrators, including some 1,000 Koreans, occupied the yard. 
The demonstrators included not only Koreans but also Japanese students and workers. Their demands were simple. They were against the procurement of war materials.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Japan became a logistics base for the US military. So Japanese industry, which had been on the verge of death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defeat, was met with special war supplies. It must be an irony of history to suggest that Japan's post-war recovery was thanks to the war in neighbouring Korea.

Image : Japanese magazine ‘World’(sekai) reporting on the Suita anti-war struggle in 1952 Photo: Wikipedia Japan

Zainichi Koreans could not understand that Japan, which should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ir defeat after the war, conversely enjoyed economic special procurement due to the war. Furthermore, they could not tolerate the deaths of people in their homeland due to US military bombing and other reasons. They believed that just delaying the departure of trains loaded with munitions for an hour could save thousands of lives. The Suita Incident, was an important local anti-war struggle in Japan at the time of the Korean War.

Among those who led the Suita anti-war struggle was BU Deok-soo from Jeju, born in 1929, whose father was a sea captain from Jeju and mother a haenyeo (woman diver) who fished in Cheongjin, who moved from Jeju to Osaka at the age of nine and who, while attending night school, became aware of his national identity. One of the defenders of the Suita anti-war struggle was the poet KIM Ji-jong. Kim described the Suita Anti-War Struggle as an outpouring of voices yearning for peace and a gesture of resistance to prevent the tragedy of war. He describes the situation at the time in his poetry collection “Niigata”.

It was not until 20 years after the incident that a verdict of acquittal was passed against them for shouting to stop the war without flinching under the club of the Japanese police. At the time, Japanese courts acquitted them of the disturbance charges. As zainichi Koreans, their resistance to prevent the horrors of war on Korean soil is the history we should remember in June. For the rejection of war, which obliterates all morality, is the starting point for the defence of human dig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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