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80) 산 태작과 보리 태작은 해도 서방 태작은 못한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태작 : 타작(打作). 막대나 몽둥이 따위로 두드리는 일(짓)

태작(타작)은 막대기로 거둬들인 보리나 조, 산도나 콩 등을 두드려 알맹이가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타작기가 있어 아예 밭에서 곡식 장만이 손쉽게 이뤄졌지만, 옛날에는 집 마당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도리깨질로 타작(打作)을 했다. 순전히 팔과 어깨의 힘을 이용해 그 많은 곡식을 장만했으니, 이만저만 중노동이 아니었다.

깨는 멍석 같은 것을 마당에 깔고 그 위에서 두드려 알맹이를 털어냈다. 마당에서 이뤄지므로 이런 일련의 작업을 뭉뚱그려 ‘마당질’이라고도 했다.

간혹 마음속에 큰 아픔이 있거나, 좋지 않은 감정이 앙금으로 남아있다가 와락 끓어오를 때,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산을 두드려 분풀이를 했을지 모른다. 어지간히 힘이 들어가는 행위가 타작질이다. 힘을 다해 되우 두들겨 패는 동작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촬영한 제주 보리타작. 사진=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1970년대 촬영한 제주 보리타작. 사진=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한데 이 타작질을 산이나 곡물에는 해도, 차마 제 서방에게는 하지 못한다 함이다. 아무리 눈에 나서 미워도 남편에게 타작질만은 못한다고 실토하고 있다. 적당히 귀 흘려들어 될 게 아니다. 막무가내하게 내뱉는 말이 아닌가.

봉건제도 하에서는 남존여비의 관념이 뚜렷해,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도 부인이 그 남편을 홀대해선 안됐던 것이다. 평생 남편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 요조숙녀의 부덕이요 법도라 여겼던 때문에.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실제 실천에 옮겼다. 

혹여 인간적인 도리를 저버려 망난이 같은 짓을 할지언정 손대지 못한다는 남성 제일주의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은 오히려 여성이 남성 위에 존재한다 해서 여성상위 시대라 한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됐다.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남편이 부인에게 옛날식으로 자신을 무조건적 요구한다면, 그 가정은 그날로 파산되고 말 것이다.

부부의 이혼율이 상당히 높은 오늘날이다. 혹여 지금도 남편 쪽에 부인을 업신여기는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가 남아 있어 그렇다면, 자신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시대 낙오적 사고는 당장에 버려야 한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소중한 가정과 사회,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남성을 절대적인 존재로 떠받들던 것은 먼 옛날 조선 시대의 얘기일 뿐, 지금은 남녀노소가 모두 평등한 세상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