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신화는 이야기다.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할 뿐 아니라 옛사람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이자 세계관 및 우주관이었다. 잠재력을 계발하고 정체성을 찾는 교육의 역할이기도 했다. 마고성 신화와 키르티무카 신화를 통해 먹는 행위와 생명의 실상이 내포하는 의미를 살펴보고 채식과 비거니즘이 왜 인류사회의 지속가능성 위기를 극복하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한번 탐구해 보자. 

마고성과 키르티무카 신화

부도지는 신라 시대 박제상이 집안 대대로 내려온 비서를 정리하여 저술한 책으로 1만4000년 전 파미르고원을 발원지로 펼쳐졌던 한민족의 상고 문화를 다루고 있다. 이 부도지의 마고성 신화에 따르면 그때는 우주의 음악과 빛 즉 율려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고 사람들은 대지의 젖을 마셨다고 한다. 어느 날 포도를 따 먹고 처음으로 다섯 가지 맛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생명을 먹은 최초의 일로 이때부터 재앙은 시작된다.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원래 없던 이빨이 생겨나고 피와 살이 탁해져 다툼과 분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마고성 사람들은 네 무리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인류의 4대 문명이며, 그중 한 갈래가 환국 배달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고구려의 국시가 마고성 시대의 회복을 뜻하는 다물이었다. 한다. ‘부도지’는 ‘환단고기’의 뿌리인 셈이다.

키르티무카는 인도와 네팔을 포함하여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등 전 아시아적 현상이다. 어떤 얼굴은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귀신의 얼굴 모습으로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얼굴도 있다. 특히 힌두사원이나 불교사찰에 가보면 통관 절차처럼 이 ‘영광의 얼굴’이란 뜻의 키르티무카를 볼 수 있다. 왜 ‘영광의 얼굴’인가? 신화에 따르면 인도의 시바 신은 춤을 추는 신이고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릴라‘는 이 신의 역동적 춤이다. 시바의 아내는 파바티라는 여신인데 어느 날 한 괴물이 시바 신에게 와서 파바티를 애인으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시바 신은 화가 나서 잠깐 제3의 눈을 뜬다. 그 순간 벼락이 땅을 때리고 연기가 일고 불길이 인다. 연기가 가시자 괴물의 자리 옆에 다른 괴물이 하나 더 와 있는 것이다. 이 괴물은 피골이 상접하고 사방으로 뻗어있는 머리카락은 흡사 사자 털과 같았다. 첫 번째 괴물은 두 번째 괴물이 자기를 먹으려는 것을 알고 기겁하고 시바 신의 자비에 자신을 던지겠다고 말한다.

시바 신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누가 자신의 자비 앞에 몸을 던지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래서 괴물에게 그 괴물을 먹지 말 것을 명한다. 그러자 깡마른 괴물은 배고픔을 호소하고 시바 신은 괴물 자신을 먹으라고 명한다. 괴물은 발부터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 얼굴 하나만 덩그렇게 남게 된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어 사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삶이란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없다며 기뻐하며 영광의 얼굴이란 뜻의 ‘키르티무카’라 명명한다. 누구든 이 얼굴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알거나 자신에게 올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과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귀면상 키르티무카. 사진=한국 체식문화원.<br>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과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귀면상 키르티무카. 사진=한국 체식문화원.

첫째, 신화란 영적 가능성의 실마리다. 마고성 신화는 외부적으로는 인류의 시원을 설명하는 역사적 전개 같지만 실제로는 인류 내지 인간의 내부적 잠재성을 가리킨다. 키르티무카 신화 또한 생명의 온전한 드러남을 위해서는 삶의 엄정한 현실을 회피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율려를 회복함은 본래 우주의 빛과 음악을 일상 속에서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나 신을 보는 것이요, 성스러운 일상의 회복이자 삶의 온전성 즉 우리의 삶에서 가능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열망의 온전한 실현이다. 타고르와 간디가 대양에 비유하며 자신들은 ‘그 대양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며 지극히 존경했던 까비르는 노래한다.

“하아프의 소리 들려온다 / 손도 없이 발도 없이 춤이 시작된다 / 손가락이 없이 하아프를 켠다 / 귀 없이 그 소리를 듣는다 / 그는 귀다. 동시에 그는 듣는 자이다 / 문은 굳게 닫혔다. 그러나 그 속에 향기가 있다. / 이 만남은 누구도 엿볼 수 없다. 그러나 지혜 있는 이는 이를 이해할 것이다.”

둘째. 또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명백한 교훈은 삶의 경이와 신비를 상징하는 최고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삶이 잔인한 괴물이며 그런 본성에 기뻐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그러나 삶과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고 바뀜에도 한계가 있으며 바뀌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구지 삶과 세계의 근원적 배경에는 맹목적 의지와 힘이 작용하고 있기에 인간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이기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존재이며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는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시지프스 신화‘ 등 20세기에 형성된 부조리라는 발상에 훨씬 앞서 쇼펜하우어는 중력이 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부조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은 현 국제 정치 체제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사회계약설에 기초하고 기후변화 팬데믹 등 주권 국가의 범주를 넘어선 문제들에 속수무책인 점, ‘나’라는 자아와 개인주의 또한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영향인지 공공의 이익과는 배치되는 협소하고 과격한 특성을 띠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 비교할 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신화에 따르면 세상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을 수 있는지 안다는 자들이나 사회를 먼저 바로잡고 나를 고치자고 주장하는 자들 등은 신의 평화라는 입구조차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사회는 사악하고 슬프고 불공평하며 언제까지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이러한 곳에서 어떻게 살지를 배워야 한다. 어떤 곳에 있더라도 세상의 중심을 발견하고 내면의 지복을 느낄 수 있는 즉 율려의 회복이 우선된다. 이 일은 삶의 참모습을 아는 자 그래서 기쁜 슬픔과 슬픈 기쁨 속에 사는 법을 아는 자만이 가르칠 수 있다. 행위의 과잉보다는 비행위의 행위가 오히려 세상을 돕는 데 유익하고 효과적이다.

셋째, 신화 속 옛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인간이 먹는 음식이 모두 영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복수하지 않도록 달래는 것이야말로 삶의 최대 고민이었다. 그러니 동물이건 식물이건 다른 생명을 죽여 음식을 취하는 것은 크게 불편하고 두려운 일이다. 결국은 자신이 자신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먹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삶의 전제조건이다. 내면의 신과 하나 되고 율려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고성과 키르티무카 신화는 생명이 생명을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즉 ‘먹어야 하는’ 문제의 성찰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대표적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 삶의 전제와 인간의 마음을 화해시키는 데서 특히 동물을 죽여 먹이로 삼는 두려움에서 모든 신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장식 사육, 산업적 어업 및 공장식 양식업, 대규모 단일경작, 유전자조작 등 생명이 제도적으로 파괴되고 조작 상품화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삶의 전제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의식’을 찾아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우리는 흔히 유목사회 또는 농경사회 하듯 삶의 전제에 수반되는 음식선택이 심리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인류학적으로 얼마나 중대한가를 부지불식간에 들어왔다. 인간의 문화적 심리 형태를 분석할 때 대상이 동물이냐 식물이냐는 그 인간 집단의 삶의 양태를 결정짓는 하부구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음식을 선택하고 대하는 인식과 태도는 ‘풍요냐 결핍이냐’는 삶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전제와도 직결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현재의 정치 경제의 잘못된 점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삶이 정글이라면 실제 정글이 아니라 전제로 인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정글에서 자라는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실제 정글을 현실화한다. 과시적 소비 경쟁이나 소비주의 강박증, 풍요로운 공급원을 줄이는 무한 성장에의 집착 등은 우리의 삶의 전제가 심리적 결핍에 있음을 보여준다. 

넷플릭스에서 세계적으로 흥행한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러시(Cowspiracy)_지속가능성의 음모. 사진=제작사에서 배포하는 공식 전단을 한국 채식문화원에서 번역.<br>
넷플릭스에서 세계적으로 흥행한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러시(Cowspiracy)_지속가능성의 음모. 사진=제작사에서 배포하는 공식 전단을 한국 채식문화원에서 번역.

섭생의 우주적 맥락과 비거니즘

시인이자 작가인 릴케는 노래한다.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모든 물음에 대해 인내하라 / 물음 그자체를 사랑하라 / 이제 그 물음 속에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채 / 먼 어느날 그 답을 살고 있으리라.”

깊게 살펴보면 삶의 전제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의식도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명을 위해 행동할 힘도 연결되어 있기에 얻을 수 있다. 우선 삶의 전제 즉 생명의 희생이 불가피한 엄정한 현실한계를 그대로 직시한다.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에 자책하는 데서 벗어나 세계의 생명 의지를 자신의 생명 의지 속에서 체험하고 섭생의 맥락을 우주 차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 확장을 통해서 물질적 우주의 기본토대 및 우주의 근본 속성이 먹고 먹이는 우주적 에너지 공유체계이자 상호의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한한 우주는 하나의 향연이고 우리는 이 우주적 향연의 손님이자 음식이다. 밥을 먹는 자이자 동시에 밥이며 끝없는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이 양자를 포용하고 동시에 초월한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삶과 죽음의 무상함을 통찰함으로써 삶에서 죽음, 다시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을 통해 삶과 죽음, 양자를 포용하고 동시에 초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자비와 연민이야말로 무한한 우주의 유일무이한 실재임을 자각한다. 

먹는다는 것은 우주로부터 사랑과 자양분을 받고 있으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더 큰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음식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받고 행동할 힘과 용기를 얻는다. 현재의 지구는 인간의 필요와 연대에는 충분하지만 탐욕과 독점에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비거니즘과 채식은 상호의존의 생명의 원리에 입각한 자연 질서에 맞게 불가피한 생명체에 대한 폭력을 최소한으로 배려하고 필요와 연대에 따른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인간의 복잡성에 내재한 상호의존성의 풍요로움을 일깨우며 생명과 자연을 생명이 아닌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경계한다. 

사실상 이름이 비건일 뿐 상호의존의 자각에서 우러나는 하나의 표현이며 이 자각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눈에 보이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포함한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지구와 우주공동체 속에서 공생 공영하는 철학적 문화다. 소위 모든 영적 전통과 종교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식사 의례의 경건함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것으로 모든 영적 전통과 종교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황금률의 마땅한 실천이다. 이는 아이들에게는 좁은 의미의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에서 나아가 생명의 전체적인 상호 관련성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 생명 존중의 윤리를 북돋우는 교육의 더할 나위 없는 실천적 자원이자 본보기이기도 하다. 

소피아(Sophia)의 회복

무엇보다 지속가능성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소피아의 회복이 요구된다. 우리 안의 마고할미라 할 수 있는 소피아(Sophia)는 인간 본성의 신성한 여성성을 뜻하는 단어로 양육하고 돌보고 배려하는 사람의 본성을 일컫는다.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양육과 풍요의 여신이었고 인간 내면의 여성적 힘 또는 지혜를 상징한다. 철학(Philosophy)이란 단어 PhiloㅡSophia는 ‘소피아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동물을 학대하고 죽여 먹는 육식 행위는 이 소피아를 억압하며 인간의 지성과 창의성의 발현을 근본적으로 막는다. 인간 동물 사회 등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을 원천적으로 훼손할 뿐 아니라 소비행위를 통해 고립감을 해소하고 위안을 찾으려는 왜곡 정서와 소외감을 극대화한다.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 황폐해진 생태계,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해진다.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한 ‘알아차림’

이제 인류는 밥상으로부터 시작되는 오랜 문화적 미망과 폭력으로부터 마땅히 깨어나야 한다. 밥상에 오르기 위해 연간 750억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도살당한다. 어류의 50%와 세계 농지의 80%, 물 소비의 70%와 세계 식량의 40%가 고기 생산과 가축 사료로 투입된다. 그리고 자유로운 시장의 힘이 상호작용한 결과, 연간 10억 명은 배고파서 죽어가는 반면, 15억 명은 배불러 만성질환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만성질환에 대한 신약 개발을 위해 연간 수억 마리의 동물들이 실험용으로 희생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로나19 같은 인수공통전염병은 물론 지구온난화 같은 치명적 생태계 파괴가 초래된다. 즉 ① 정치적 보조금으로 값싼 곡물 ② 그 곡물조차 구입이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 양산 ③ 값싼 곡물을 동물들에 공급하는 게 더 이익되는 기괴한 악순환 구조다. 

사실 폭력, 아동학대, 자살, 약물중독, 비만, 스트레스 등등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들도 성찰해보면 우리가 동물과 생명체들에 가한 행위들이다. 인공수정을 통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떼어놓고 오로지 이익을 좇아 고기를 빨리 살찌우고 강제 임신시키는 데 온갖 약물을 투여하는 등 공장식 사육환경과 도살과정은 현대판 홀로코스트와 다름없다.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되는 가축을 인류가 소비하고 처분하는 방식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이며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이다. 우리의 밥상에서 시작되는 이 거대한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 대한 ‘알아차림’이야말로 지속가능성과 생명의 선순환을 여는 출발점이다.

문화 패러다임의 전환 그 한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비상사태은 역사상 전례 없는 지속가능성의 위기이자 기회다. 인류는 이야기의 과도기 즉 문화 패러다임의 전환 그 한가운데 서 있다. 소비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등 문화의 밑바탕에 깔린 억압과 배제, 경쟁과 분리 그리고 단절과 결핍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낡은 이야기를 협동과 자유, 평화와 풍요 그리고 생명과 상호의존을 긍정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에 음식의 역할이 중요하다. 음식은 현대 물리학이나 환경운동의 새로운 인식들을 심화할 뿐 아니라 문화의 패러다임을 공유, 복제, 재생산하는 근본 체계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간과 지구, 밥상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밥상혁명의 순간이다. 

오늘날 우리 귓가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라는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이 외침은 우주적 본질을 이야기하는 커다란 노래의 일부이다, 전체 세포의 하나하나를 일깨우고 온전한 나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대지를 향한 노래는 인간뿐만 아니라 뭇 생명체가 저마다 아름답고 자애로운 우주의 현현임을 이야기한다. 당신의 식사가 필요 없이 무력한 동물들을 해치지 않도록, 우리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그 어딘가의 아이의 건강한 삶을 빼앗지 않도록 늘 깨어있으라. 그러는 동안 당신은 점차적으로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더욱 자각하게 될 것이다. / 한국 채식문화원 공동대표 고용석


# 고용석은?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와  미래진단 세미나 '퓨쳐비젼'을 비롯하여 2008 2009년 세계를 연결하는 3차례 지구온난화 글로벌 컨퍼런스  등 창의적이고 선구적인 프로그램들을 기획해왔다. 세계 NGO대회와 유엔회의 관련 활동에도 수십차례 참여해왔으며 방한 종교및 환경지도자의 통역일과 각종 주요신문의 컬럼리스트와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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