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생각] 아흔 번째 / 이문호 교수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돌아가신 분이 마지막 저승(Afterlife)으로 가는 이승(This Life) 길에서 어제까지 살던 집을 돌아 하직할 때, 동네 괸당들이 소주와 미음(米飮)을 뿌리며, ‘잘 갑서’ 인사를 한다. 요즘에도 조상 산소에 성묘하거나, 소분(掃墳) 할 때도 돌아가신 주위 묘소를 향해 술 한 잔을 올리며 ‘잘 드시라’고 한다. 식사 때 동네 삼춘이 찾아오면, “밥 먹엉 갑서” 식사를 권한다. 언제부터 “밥 먹엉 갑서” 풍속이 생겨난 것일까. 추측하건데, 제주 3대 대기근(饑饉) 때인 1670년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못 먹고 굶어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 사람들이 보리밥에 물 말아 올리며 ‘밥 먹엉 갑서’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굶어 죽은 사람 영혼 앞에서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말, ‘미음(米飮) 들고 갑서.’ 이 말(言)이 식사 때, 집에 삼춘이 찾아오면, ‘밥 먹엉 갑서’ 인사말로 말한다. 이제, 이 말(言)은 제주사람들 입(口)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입(口)에 달고 사는 세상이 됐다. 예전에 집에 네 말 지기 넙게오름 밭이 있었는데, 이름이 개다리왓이다. 대기근 흉년에 개다리 하나와 바꿨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개다리 왓(田) 밭고랑이 오름 경사에 따라 오르고 내려 바람 길은 터주고 물길은 막아줬다. 밭을 갈 때는 평지밭에 비해 배가 힘들었다. 이때, 같이 사용되는 말이 ‘식게 먹으레’이다. 식게의 어원은 식가(式暇)의 변음으로 관원(官員)에게 주던 규정된 휴가로 집안의 제사(祭祀) 따위가 있을 때 주는 제도에서 왔다. ‘먹으레’는 밥을 잘 못 먹을 때라 ‘잔치 먹으레’, ‘영장(靈藏) 먹으레’ 등 ‘밥 먹엉 갑서’와 같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제주말(語)이 됐다. 육지에서는 ’식게‘란 말은 안쓰고 ’제사(祭祀)‘로 쓴다. ’먹으레‘는 죽음의 섬, 제주의 역사적 열악한 환경이 빚은 말(言)이다. 

죽음의 섬, 제주도

몽고 원나라가 제주 지배 100년(1273-1373)년 후, 제주에는 3대 대기근이 불어 닥쳤다. 경술(1670)에서 임자(1672)까지 경임 대기근은 제주 인구 4만2000명 중 1만3122명이 사망했다. 계정 대기근은 계사(1713)에서 정유(1717)로 1만 여명이 사망했고, 임을 대기근은 임자(1792)에서 을묘(1795)까지 제주총인구 6만2698명중 24%인 1만4963명이 사망했다. 

당시 흉년을 이기지 못해 뭍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제주도민의 출국 금지령이 200년간(1629-1823) 내려졌고, 1910-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거쳤다. 1948년 4.3(1948-1956), 피눈물 나는 사건 때는 제주 인구 30만중 3만이 죽임을 당했고 중산간 마을 130여 곳이 불에 탔다. 제주는 죽음의 섬이었다. 김오진교장의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에서 밝힌 내용이다. 제주 3대 대기근 때, 유명한 분은 김만덕 의인과 김명헌 호조참판 이다.

김만덕(1739-1812) ‘의인(義人)’

1795년(정조 19) 큰 흉년 때에 제주도의 백성들이 전염병과 기근으로 굶어죽게 되자 당시 거상이었던 김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육지에서 쌀을 사다가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였다. 이후 김만덕이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당시 백성들을 구휼한 김만덕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812년(순조 12) 11월 21일에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고 그 후에 사라봉에 큰 공덕비가 세워졌다.

81세 급제 김명헌 호조참판(戶曹參判)

81세에 호조참판에 오른 김명헌(중문·회수리), 1794년 행년구구 낙제삼삼(行年九九 落第三三)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명헌은 대정현감 변경붕(대정, 신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1794년 제주 대기근으로 심낙수 어사가 내도해 열린 과거에서 제자 변경붕은 논(論)에 급제했으나, 스승인 김명헌은 책(策)에서 2등에 머물렀다. 81세 나이로 과거에 응시했던 김명헌이 지은 책 가운데 ‘行年九九 落第三三(행년구구 낙제삼삼, 지금 나이 81세에 낙제는 9번 했구나)’라는 구절을 가상히 여긴 정조임금이 특별히 제주 최고령으로 합격시켰다는 말이 회자(膾炙)된다. 고령의 김명헌이 교지를 받으러 한양에 갈 수 없게 되자 임금이 제주목으로 교지를 내렸으나, 이듬해 2월 교지를 받기 전에 김명헌 공은 숨을 거두었다. 교지를 가져온 관원이 교지를 고인의 관 위에 올리는 순간, 관(棺)이 부르르 떨면서 교지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전한다. 김명헌이 과거시험 답안지에 대흉년이 언급된다. ‘1732년과 1733년 연이어 제주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접한 영조대왕께서 어사를 보내시고 곡식을 옮겨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제주백성들에게 이르기를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성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이기를 바라고 있노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도다’라고 되어있다. 김명헌의 비(碑)는 지금 중문 회수리에 있다.

군산 나리포창, 나주 제민창, 해남 갈두진창

조선 후기 군산 나포·임피에 설치한 제주(濟州) 구제(救濟) 전담 기구, 나리포창은 1720년(숙종 46)에 금강 일대의 상인 활동의 불편 해소를 위해 설치하였다. 이후 제주 대기근 진휼을 위한 전담 식량 창고이고, 전남 나주에 제민창과 해남 땅끝 마을에도 갈두진창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1963년 대학 1학년 5월 중순 때, 군산 임피에 있는 섬유공학과 조승무 친구 집에 갔었다. 임피는 김제만경평야로 이어지는 곡창지대이다. 기름기가 쫙 흐르는 쌀밥을 처음 먹어 봤고, 나리포창 이야기도 들었다.

제주사람들에게 ‘밥 먹엉 살게’ 해준다는 오영훈 지사의 공약이다. 과연, 무슨 정책으로 먹여 살릴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사람들에게 ‘밥 먹엉 살게’ 해준다는 오영훈 지사의 공약이다. 과연, 무슨 정책으로 먹여 살릴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오영훈 지사의 ‘밥 먹엉 살게’

지난 5월 31일 오영훈 당시 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나온 말이다.

“전국 평균 1인당 국민소득이 3700만원입니다. 제주도 1인당 국민소득 얼마 되는지 아십니까. 2900만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국 평균에 비해 한 없이 모자랍니다. 이건 누구의 책임입니까. 지금까지 제주도정을 잘못 이끌어왔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전국 평균 수준의 소득도 보장하지 못하는 제주에 살면서 어떻게 자긍심을 갖고 어떻게 대한민국을 리드 하겠다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 오영훈은 약속합니다. 임기 4년 안에 전국 평균 3700만원 수준의 1인당 국민(도민) 소득 반드시 만들어내겠습니다.” 

제주사람들에게 ‘밥 먹엉 살게’ 해준다는 오영훈 지사의 공약이다. 과연, 무슨 정책으로 먹여 살릴까?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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