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규의 film·筆·feel] (22) 고립된 평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양동규. 그의 예술은 ‘학살로서의 4.3’을 살피는 일에서 출발했다. 카메라를 든 그의 시선은 늘 제주 땅과 사람에 고정돼있다. 그러나 섬의 항쟁과 학살이라는 특수성의 조명은 결국 한반도와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평화라는 보편성으로 확장하기 위한 평화예술의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실천적 작가다. 매주 한차례 [양동규의 필·필·필 film·筆·feel]을 통해 행동주의 예술가로서의 그만의 시각언어와 서사를 만날 수 있다. / 편집자 글


고립된 평안_18, 2018 / ⓒ2022. 양동규
고립된 평안_18, 2018 / ⓒ2022. 양동규

멈춰 선 시간이다. 찬바람이 불던 겨울은 한참 전에 지나갔다. 햇살은 뜨겁다. 햇살이 비치지 못하는 그늘은 서늘하다. 이제 곧 여름이다. 텅 빈 방에는 작은 옷걸이 몇 개가 붙어있다. 그중 하나의 옷걸이에 걸려있는 겨우내 쓰고 지냈던 모자 하나. 

방에 앉아있던 모자의 주인이 손님을 맞는다. 손님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찾아온 낯선 이들이다. 반가움과 부끄러움, 불안함 같은 것들이 깊은 주름과 함께 주인의 얼굴에 새겨진다. 주인은 살아온 이야기를 전한다. 깊게 파인 주름은 다양한 기억을 새기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오래전 이야기다. 이미 지워졌을 이야기다. 지워냈을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 겪었던 당신의 이야기를 손님에게 전한다. 10대 소녀의 이야기다. 10대 소녀는 예뻤다. 오빠들이 예뻐했다. 산으로 숨어야 했다. 추운 겨울을 산에서 보냈다. 오빠들은 그때 다 떠났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힘들었던 기억은 애써 지워냈다. 예뻤던 소녀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방에 앉아있는 노인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노인은 노인의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며 스스로를 가둬둔 방에 앉아있는 노인의 표정은 평안하다. 스스로를 고립시켜버린 노인은 10대 소녀의 당신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 양동규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20대에 흑백카메라를 들고 제주를 떠돌며 사진을 배우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골프장 개발문제, 해군기지 건설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접하며 그로 인해 변화되어가는 제주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사진과 영상을 기반으로 진행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섬의 하루」, 「잼다큐 강정-범섬에 부는 바람」 등을 연출, 제작했다. 개인전 「터」(2021), 「양동규 기획 초대전 섬, 썸」을 개최했고 작품집 「제주시점」(도서출판 각)을 출판했다. 제주민예총 회원으로 「4.3예술제」를 기획·진행했고 탐라미술인협회 회원으로 2012년부터 「4.3미술제」에 참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