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4‧3과 검찰 / 이규배 논설위원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4‧3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1개월이 지나던 1948년 5월, 악화되어 가는 제주사태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고위급 기관은 검찰이었다.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8월 초까지 검찰총장을 위시하여 다수의 검찰들이 삼엄한 제주 땅을 밟았다. 이 무렵, 일부 경찰 고위관계자들이나 극우인사들은 제주사태를 ‘공산세력의 폭동’으로 지목하던 살벌한 때였다. 과연 이들 검찰 관계자들은 제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검찰총장의 명을 받고 제주실정 조사차 가장 먼저 내도(5.6~5.17)한 사람은 광주지검의 김희주(金禧周) 검찰관이었다. 그가 주목한 제주사태의 직접 원인은 ‘5․10선거 반대였으며, 간접 원인은 ’서북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이었다. 그는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2003년)에서 4‧3의 발발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단선단정 반대’와 ‘경찰과 우익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본질적인 요소를 일찍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주사태 관련 재판을 위해서 중앙 사법부의 명을 받고 제주로 파견(5.26~6.12)된 인물은 박근영(朴根榮) 검찰관이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공산당의 지령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전제하며, “원인은 경찰이 민심과 유리”된 때문이라고 밝힌다. 극우청년단체(서북청년단)인 “사설단체를 경찰력으로 이용한데 대하여 사설단체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고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먼저 민심을 수습”해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경찰력과 행정력을 통일하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앞의 김희주 검찰관과 대동소이한 인식인 셈이다. 

이 재판의 판사는 서울지방심리원의 양원일(梁元一)이었다. 양원일 판사가 주목했던 제주사태의 원인에도 경찰과 우익단체의 ‘가혹한 행동‧혹독한 짓’이나 ‘관공리의 모리 행위’가 지적되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때문에 그는 해결책으로 미군정이 “제주도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경찰의 압박을 완화”시켜야 할 것과 “제주 도내의 관공리를 재편성”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제주사태의 원인에 대해 판검사가 일치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이 재판에는 서울에서 변호사도 참여하고 있다. 그가 제주사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것도 “근본책은 못될지언정 외지에서 들어간 사설단체를 일체 해산시키고 제주도 출신자로 신망있는 자를 치정책임 부서에 등용함으로써 도민의 감정을 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폭도들에게 준 정치적 구실의 근인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결론적으로 “우는 어린애를 운다고만 꾸중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우는지 그 울게 된 원인을 없애주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피고들의 죄를 따져야 하는 검찰이나 이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 이를 판시해야 하는 판사나 제주사태의 원인 인식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당시 중도적인 언론들이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공산당의 지령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부인하고, “이번 사건의 도화선은 물론 공산당 계열의 책동에 있다고는 하나 원인(遠因)은 경찰관의 제주도민에 대한 그릇된 행동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고 ‘단정적’ 표현의 기사를 보도한 점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이들 법조인들의 인식이 ‘오인’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가장 주목을 요하는 것은 당시 검찰 총수였던 검찰총장 이인(李仁)의 제주사태 인식이다. 이인 검찰총장을 특별히 주목하는 까닭은 그가 ‘4‧3 참극의 책임자’로 지목되는 경찰 총수 조병옥 경무부장과 더불어 보수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 창당의 핵심적인 인물인데다, 미군정에 의해 요직에 발탁된 보수우익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검찰총장도 제주도민 대다수가 ‘좌익’이거나 ‘빨갱이’라는 경찰 총수나 우익단체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제주사태의 첫 번째 원인을 ‘관공리측의 부패’에 있는 것으로 주목하며, “도민은 관리의 부정행위에 불만을 가지고 경민간에 대립”한 결과라는 견해를 밝힌다. 수습책으로 “100명의 경찰관을 보내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유능한 자를 보내어 민심수습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해법을 제시한 것도 이런 부패상에 주목했던 결과였다. 

이러한 검찰총장의 견해에 대해 경찰 총수 조병옥은 ‘검찰총장은 틀렸다.’고 이의를 제기하며 반박을 가한다. 그러나 검찰총장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 그는 조병옥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해서 관공리의 ‘청렴하고 강직한 노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경찰업무도 ‘범죄수사의 기술 경험과 지방사정을 잘 아는 수사기관이 이를 전담’해야 하는 당위성을 밀어붙인다. ‘경찰 총수는 틀렸다.’고 응대하는 모양새다.

당시의 중도적인 언론에서 “이미 중앙에서 현지를 시찰한 판검사 및 변호사 제씨가 이번 4․3사건의 한 가지 원인으로 관공리의 부패를 지적”했다고 보도했던 것은 이런 일련의 사실을 가리킨다. 이 언론이 소상히 소개하는 ‘관공리의 부패’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이들은 ‘사복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이에 가담치 않으면 ‘모조리 모략 중상’으로 자리에서 쫓아내고, 우익단체는 가택수색을 빙자하여 귀중품을 탈취하고 금품을 강요하며 불법구타 폭행을 자행한데다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모조리 ‘빨갱이’로 지목하며 온갖 박해를 가했다는 것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이 저항에 나섰던 것은 이런 부패‧폭행·탄압‧착취‧음해‧모략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고 광범위’했던 때문이었다. 당시의 언론보도도 검찰을 비롯한 법조인들의 견해를 지지한 것이 명백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바로 직전, 그리고 참혹한 강경 토벌진압의 태세를 갖추기 전인 1948년 8월 초, 제주사태에 대한 담화를 남긴 인물은 서울지방검찰청 원택연(元澤淵) 검사였다. 그의 소감은 다음처럼 단순하되 명료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적색분자의 책동보다도 일반 관공리들의 부패가 더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매우 중요한 충고를 남긴다. “이번 사건은 당국의 도민에 대한 무책임한 시정(施政)이 큰 원인”이며, 따라서 정부 수립 후에는 제주사태에 대해서 ‘특별한 조치’나 ‘심심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 것이 그것이다. 제주사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4‧3 발발 이후, 검찰 인사들은 하나같이 제주사태의 근본 원인을 제주사람이 아닌 외지에서 입도한 관리나 경찰, 우익단체의 부패와 폭력적 탄압에서 구하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사법업무를 위해 입도했던 인물이었던 관계로, 이들의 눈에 비쳤던 제주의 실상은 정치적인 의도와는 거리가 먼 공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에 근거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제주경찰감찰청장이 정직처분을 받고 제주도지사가 경질됐으니 검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까지였다.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2월 말, 일본에서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일본에 놀라울 만큼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다름 아니라 수급(首級) 전쟁범죄자 15명을 재판도 없이 특사 석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공교롭게도 제주에서는 ‘1948년 12월 군법회의’에서 동포의 손에 의해 제주인들이 사형선고를 당하고 결국 수 백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원 검사가 대한민국 신생정부에 신신당부하던 ‘특별한 조치’나 ‘심심한 고려’는 아랑곳없이 말이다. 게다가 미군은 즉결재판소에서 ‘오전에 사형을 판결 받고 오후에 처형’당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탄약이 부족할 때에는 죽창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잔인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했다는 토벌대의 보고는 숨을 막히게 한다.

도대체 이런 억울하기 짝이 없고 기가 막힌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일본제국주의 잔학한 전범도 생명을 보전해 주는 판에, 신생정부는 죄의 유무도 불분명한 제주인의 생명을 가차없이 저버렸으니, 과연 대통령이나 정부가 제 정신이었는지 묻고 싶다.

검찰의 제주사태 인식과 처방은 그 후의 참혹한 ‘대량학살’을 막을 수 있는 정당한 진단이었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과거의 권력이 저지른 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 없음은 검찰이나 사법부는 익히 인지하고 있을 터이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직권재심을 통해서 총 270명의 4‧3 희생자가 무죄 선고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앞으로도 군사재판과 일반재판 수형인에 대한 ‘특별재심’과 ‘직권재심’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때문에 오래 전 검찰이 요망했던 ‘특별한 조치’나 ‘심심한 고려’에 대한 주문은 지금의 검찰에게도 유효하다.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을 다루는 살 떨리는 ‘재심’일 수밖에 없다. 「검사 선서」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를 표방한다. 이 선언에 걸맞게, 희생자들의 행적을 ‘차갑게’ 파고들기 전에, 어떤 외부의 따뜻한 도움을 받기는커녕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고 광범위’했던 부패‧폭행·탄압‧착취‧음해‧모략에 노출된 채 외롭게 방치됐던 숱한 제주사람들의 부득이한 저항과 너무나도 힘겨웠던 처지와 고통, 죽음에 더 주목하기 바란다. 

그래서 필자는 2022년의 검찰에게 바란다. 1948년의 검찰은 틀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때 제주의 진실을 통찰했던 검찰을 기억하라고. 1948년의 검찰이 그랬던 것처럼! / 이규배 논설위원·제주4.3연구소 이사장 

# 이규배 교수

현재 제주국제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8년부터 현재까지 제주4·3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제주4·3연구소 소장과 5.18기념재단 이사, 제주4·3평화재단 이사를 역임했고, 제주MBC <시사진단> 사회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와세다대학)에서 일본정치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속칭 ‘일본통’이며 일본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제주의소리> 논설위원으로서 ‘소리시선’ 칼럼을 통해 4·3과 역사·사회 문제를 다루는 그의 깊은 통찰력을 만나게 된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