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의 탐나는 올레] (16) 무릉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한다. 유년시절 불가의 출가자로, 환속해 문화재 전문 공직자로,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공직 퇴임 후에는 다시 명상 간경하는 불가의 시자로 돌아가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윤봉택 시인이 제주올레 1~26코스를 따라 그 길과 마을에 깃든 흥미로운 제주(탐라) 이야기를 격주로 집필한다. 탐라에서 제주에 이르는 설화와 전설, 신화와 역사를 넘나 드는 시인의 해박하고 담백한 언어를 올레길에서 듣는 재미에 빠져 보시라. / 편집자 글

올레는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모으고, 사물을 통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 혼자 걸을 때는 혼자만의 멋으로, 둘이 걸을 때는 둘의 멋으로, 셋이 걸을 때는 셋의 멋스러움으로 순례하다 보면, 돌담에서 느끼는 이 땅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머언 말씀부터, 해변에서 만나지는 머흐러진 바람 소리와 벌판에서 수런거리는 풀잎 구르는 전설까지, 오름마다 봉화 올리는 낮달의 미소를 기억하는 올레 삼촌의 뜨거운 이야기가 퐁낭 그늘케가 되어, 순례의 걸음을 잠시 쉬어가게 한다.

올레는 이처럼 사물에 현혹되어 신기루를 따르는 무리를 경고하고, 물질에 오염된 어리석음을 질타하며, 더 낮게, 더 느리게 기다리라고 한다.

조선조 문학가인 유몽인(1559-1623)은 그의 저서 『어우집』 권4 「금강산 삼장암 사미 자중에게 준 서」에서 “옛사람은 세상을 널리 유람하며 박처럼 한 모퉁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께서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되,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다 여기고,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고자 했으며, 구이에서 살고자 하셨다. 이는 그 도를 실천하기를 구한 것이니 안주하는 데 구애받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년에 필시 풍년이 들 것이니, 내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앞내창, 고세미내. 사진=윤봉택.
앞내창, 고세미내. 사진=윤봉택.
녹남봉. 사진=윤봉택.
녹남봉. 사진=윤봉택.

그렇다 삶의 풍년을 안겨주는 제주올레를 떠나 다시 어느 길을 걸으려 하심인가. 이렇게 바람처럼 낮게 더 느리게 순례하다 보면, 신도리·고산리는 실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귀포시와 제주시로 경계가 나눠지지만, 신도리에서는 ‘앞내창’, 한장동에서는 ‘고세미내’라고 부르는 물골에 닿으면, 모든 사물의 경계가 일순 사라진다.

무릉마을을 건너 제3도원마을 신도리 모동장을 지나 녹남봉에 오르면, 곶자왈을 지나온 바람이 수월봉에 닻을 내리며 차귀도를 안아 왠종일 몸살을 한다. 녹고물의 진한 슬픔을 어루만지며 당산에 닿으면, 오래전 고산 벌판에 삶을 내린 선사인들의 함성이 이랑마다 노를 저으며 다가오신다. 

아마 이쯤이 아니었을까, 성 김대건 신부가 서품 후 첫 발자국을 내디딘 갯바위, 이번 열여섯 번째로 순례하는 제주올레 12코스는 2009. 3. 28. 개장되었다. 무릉2리 좌기동·평지동·신도1리·신도2리·한장동·수월봉·고산리·차귀포구·당산·용수리포구 까지 17.5km. 44리이다.

제주올레 12코스 간새 출발점은 무릉외갓집이 장소 이동됨에 따라 1993년에 폐교된 무릉동초등학교(제주자연생태체험골)로 옮겨졌다. 출발점 앞동산이 ‘왕개동산’이다. 왕씨 성을 지닌 테우리(목동)가 살았던 동산이라 불려진 지명으로 4·3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어서 ‘사기수’라 부르는 좌기동은 마을 지형이 마치 뱀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겁에 질린 개구리를 발견하고, 그 개구리를 먹으려고 머리를 치켜든 형세라 불려진 지명이다. 

수월봉. 사진=윤봉택.
수월봉. 사진=윤봉택.
수월봉, 차귀도. 사진=윤봉택.
수월봉, 차귀도. 사진=윤봉택.

‘앞밭’, ‘굴동산’을 지나면 ‘먼모둥이’이다. 모동장에서 멀리 있는 지경이라는 의미이다. 모동장은 대정현 관할로서, 신도리 녹남봉과 영락리 돈두미오름을 중심으로 고산리 칠전동까지 넓은 목장지대였지만, 이제는 지명으로나 살필 수밖에 없다.

‘고바치’ 고전동이라 부르는 곳은 주변보다 지형이 높아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후에 평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평지동에서 나고 자란 이시찬(병술생) 올레 삼촌을 만났다. 평지동에 대한 많은 말씀을 주셨다. 

대정현 서부지역에 속하는 평지동에는 지난날 대정현청의 객사 건물을 이설하여 향사 건물로 세운 우진각 형태의 전면 5칸, 측면 3칸의 15칸 집이 있다. 이곳에서는 모동장 동쪽 지경을 ‘섯병듸’라고 하는데, 이는 마을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생태연못 가기 전, 올레 동쪽으로 ‘천녀의보’가 있는데, 모동장이 목장에서 논으로 개간될 당시 "천양이"라는 사람이 보를 쌓았다고 하여, '천양이'를 '천녀의'라 부르고 있다.

‘된개’, ‘둔포’라 부르는 신도리는 제주도에서 세 번째로 살기 좋은 고단이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제1강정, 제2도원, 제3번내라고 한다. ‘살체기도’를 지나면 바로 녹나무가 많은 ‘녹남봉’이며,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도 서부지역을 모두 바라볼 수가 있다. 농포제단을 내려서면 지난날 신도초등학교(산경도예)가 있는데, 여기에서 중간 인증샷을 하면, 바로 찻길 건너에 제남선생 김일영기념비가 있다.

‘앞동산, 왕소왓, 군물’지나면 해안가 못 미쳐 신도2리 고인돌이 있고, 해안선으로 내리면 ‘도구리알, 하멜난파희생자위령비’가 있다. 답미동이라 부르는 ‘논깍’ 지역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된 신도2리에는 ‘멜캐원’과 신도포구가 출어를 준비하고 있다.

‘방애왓동네’를 지나면 서귀포시와 제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앞내창, 고새미내’이다. ‘너븐밧동네’ 한장동을 지나, ‘앞밧, 진밧’을 오르면 수월봉 영산비가 있다. 수월봉의 수월정은 삼매봉 남성정과 함께 도내에서는 근대사에 최초로 세워진 정자이기도 하지만, 1967년에 처음 세워진 이 정자는 2016년에 새롭게 건축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12-12-차귀포구, 죽도, 와도. 사진=윤봉택.
12-12-차귀포구, 죽도, 와도. 사진=윤봉택.
차귀도 준치. 사진=윤봉택.
차귀도 준치. 사진=윤봉택.

오름에 오르면 대섬·와도라 부르는 차귀도가 절경이다. 호종단의 전설이 남겨진 해안에는 ‘수월이’와 ‘녹고’라는 오누이의 애잔함이 서려 있고, 그 아래에는 전쟁 광 일본이 파 놓은 동굴진지가 흉물스럽게 서 있다.

‘자구내’ 지나 ‘웃머리’ 건너면, 신석기시대 고산유물 산포지가 넓게 펼쳐진다. 바람에 날리는 준치올레 따라 자구내포구에 닿으면 고산포구에 등명대가 기다리고, 포구 내 선왕당을 지나면, 당산봉수로 오르는 당산올레가 손짓을 한다.

당산 알오름 지나 ‘칼도리’ 건너면 ‘생이기정’인데, 오름 능선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대섬과 와도를 바라보는 하나만으로도 제주올레 12코스의 방점을 찍는다. 

‘옹수알’ 건너 ‘사니코지’ 지나 ‘천제단’에 이르면, 1845. 9. 28. 풍랑으로 표류하다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라파엘호, 청년 성 김대건 신부가 서품 후 첫 발자국을 내디딘 갯바위가 저게 아니었을까. 그 밀물이 해안 가득 차오르고 있다.

‘매조재기’ 용수리방사탑 2호를 지나면, 와포·쉐머릿개·지사포라 부르는 용수포구이다. 그 첫 머리에서 제주올레 12코스가 다시금 13코스로 이어진다.

용수리 방사탑. 사진=윤봉택.
용수리 방사탑. 사진=윤봉택.
고산포구 등명대. 사진=윤봉택.
고산포구 등명대. 사진=윤봉택.

* [윤봉택의 탐나는 올레]는 제주의소리와 서귀포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마련한 코너로 격주로 게재합니다. 

# 필자 윤봉택 시인은

법호 相民.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4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강정마을에서 포교활동하면서 농사 짓다가 서귀포시청 문화재 전임연구원으로 23년 공직 근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쌍계암 삼소굴에서 명상·간경·수행하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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