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47) 미겔 로차 비바스, 우석균·김현균 옮김, ‘아르카와 이라’, 에디투스, 2022.

미겔 로차 비바스, 우석균·김현균 옮김, ‘아르카와 이라’, 에디투스, 2022. 사진=알라딘.
미겔 로차 비바스, 우석균·김현균 옮김, ‘아르카와 이라’, 에디투스, 2022. 사진=알라딘.

1.
일상을 살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엄밀히 말해, 이 대화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뭇 존재들과 소통하는 것을 두루 아우른다. 심지어 대상과 어떤 소통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침묵도 대화의 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대화를 너무 협소하게 인색하게 경직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말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정녕, 우리는 대화를 잘 하는 일상을 사는 것일까?

2.
라틴아메리카 문학 연구자 우석균과 김현균의 유려한 번역으로 소개된 미겔 로차 비바스의 ‘아르카와 이라’는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문학 및 문화인류학적 성찰과의 대화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여기서, ‘아르카와 이라’에서 주목할 것은 시종 대화의 형식을 취하듯, 우리의 독서 행위는 이중의 작업을 자연스레 수행한다. 일반적 독서가 요구하는 잘 ‘읽기’와 함께 잘 ‘듣기’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자가 작중 화자 ‘이라크’의 입을 빌려 “글은 무엇보다 질문, 대화, 침묵, 제안, 탐색 그리고 창조야.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이 결론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또한 문장의 삽입절이기도 해. 꼭 도착하는 것은 아닌 길. 나는 대화를 나눌 때 더 편안함을 느껴.”(121쪽)라고 고백하듯이, 종래 활자화된 책을 파악하는 데 최적화된 읽기(묵독) 중심에 편중되는 게 아니라 뭇 존재들과 ‘대화적 상상력’을 펼치고 그 상상력‘들’의 향연 도정에서 ‘하나의 우주(universo)’가 아닌 ‘다중 우주(pluriverso)’에 대한 창조적 영감이 자연스레 생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의 형식으로 이뤄진 ‘아르카와 이라’의 독서의 묘미는 바로 ‘읽기와 듣기’의 이중의 수행을 적극화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를 잘 수행했을 때 “벗과 나눈 우리의 대/화가 날개를 펼치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를!”(205쪽)과 같은 희원(希願)이, 기실 작중의 두 화자 ‘아르카’와 ‘이라’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대화적 상상력 ‘사이’에 개입한 독자에게도 해당되는 셈이다. 

3.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형식을 이루는 ‘대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작중 인물의 핵심적 대화에 귀 기울여보자. 다른 주제의 대화도 그렇듯이 이 부분도 ‘아르카’와 ‘이라’의 대화는 서구의 근대학지(近代學知)가 벼려온 합리적 이성에 토대를 둔 체계적 완결성을 갖는 목적론적 탐구를 경계한다. 이것은 ‘대화’에 대한 저자의 관계적 통찰에서 절로 드러난다. 

아르카: 대화를 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음악이야.
이라: 대화는 대담이 아니라 시야.
아르카: 침묵이 존재하지 않으면 말도 음악도 대화도 존재하지 않아.
이라: 대화와 음악과 말이 없다면 침묵도 없다고.
아르카: 침묵하기는 ‘비–침묵’을 받아들이게 해. 침묵은 고주파 소리와 저주파 소리의 조하거든.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고.
아르카: 침묵과 음악을 구분하면 안 돼. ‘우주(uviverso)’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인 ‘코스모스(cosmos)’의 그리스어 어원이 질서, 조화 등이 잖아.
이라: 많은 시인에게 우주는 하나의 우주(uviverso)가 아니라 다중 우주(pluriverso)야. ‘다(lo plural)’는 음악이고, ‘하나(lo uni)’는 이를테면 승려(monje), 수도원(monasterio), 단자(單子/mónada)의 침묵 같은 것이야.

- 이상의 대화는 필자가 217-220쪽에서 주요 부분을 발췌 및 재편집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화=음악=시=침묵’이며, 이 등가의 관계는 ‘하나의 우주’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다중 우주’를 함의한다는 진실이다. 한 마디로, 저자 미겔의 경이로운 통찰이다. 여기서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대화=말=대담’으로 자명하게 인식해온 것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이해다. 바꿔 말해, 이것은 서구의 근대학지의 골격이자 중핵인 언어중심주의에 대한 저자의 래디컬한 비판적 인식을 나타낸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서구의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세계의 탐구는 명석판명한 언어의 형식을 통해 앎을 드러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이 과학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서구의 이성중심주의는 달리 말해 언어중심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바, 이러한 과학을 기반으로 성취해낸 서구의 근대세계는 지구문명에 대한 상호교류의 역사감각에 대한 무지․굴절․퇴행․왜곡․강제 속에서 ‘서구=문명’ 대 ‘비서구=미개’라는 폭력적 근대를 전횡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시선에서 포착한 우주만을 ‘(유일한)보편주의’로 내면화한다. 이렇듯이 저자의 ‘대화’에 대한 대화적 상상력은 예의 서구중심의 인식론(언어중심주의로서 맹목화된 합리적 이성)이 줄곧 내면화해온 근대세계의 앎, 즉  ‘하나의 우주=보편주의(uviversalism)’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다중 우주=다(多)보편주의(pluriversalism)’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진실을 ‘대화=음악=시=침묵’이란, ‘경이로운 발견’의 대화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4.
이 대화의 자리에서 흥미로운 것은 특정한 시공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듯, “우리를 영성으로 이끄는 길은 거리, 교통 그리고 군중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해.”(11쪽)에 담겨 있는 이른바 길 위의 자기인식의 수행이 바로 대화적 상상력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 페르소나인 ‘아르카’와 ‘이라’로 하여금 활자화된 텍스트(책)의 힘에 기대는 게 아닌, 그래서 자칫 텍스트중심주의 매트릭스에서 언어 유희에 자족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텍스트를 생성해내는 길 위에서 참된 진리를 탐문하도록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협곡, 평원, 그리고 마추픽추……. 어디 여기뿐인가. 아프리카, 아메리카, 중동, 인도 아대륙, 동아시아 등 곳곳에서 켜켜이 쌓이고 숙성되는 ‘다중 우주’의 ‘다(多)보편적 진리’를 몸소 체험하고 자기화하는 생기어린 진리 탐색을 저자는 수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주를 방문한 적 있는 저자는 그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성산일출봉의 분화구와 용두암을 관광지의 낯선 풍경 중 하나로서 볼거리가 아니라 물과 불의 원형상징 및 신화적 상상력은 물론, 일본제국의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와 포개는 대화적 상상력을 개진한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의 해녀와 돌하르방에까지 대화적 상상력을 자연스레 이어간다. 저자는 제주 해녀의 유영과 물질을 본 후 언어의 장벽 때문에 직접 말을 매개로 소통은 하지 못했으나, 해녀들이 자신을 향해 깔깔대며 웃는 모습과 그 소리로부터 저자의 경이로운 대화적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진다. 해녀들의 이 ‘가가대소(呵呵大笑)’는 흡사 “화산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161쪽), ‘이라’는 “산들바람의 단조로움을 깨트리는 가가대소였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와 목구멍에서 터지는 웃음이라 마치 용이 입으로 불길을 토하는 것 같았고.”(161쪽)라는 신화적 상상력을 겹쳐놓는다. 여기에다 ‘아르카’는 해녀들의 가가대소를 들으면서 “그 해녀가 마치 아는 사람 같았어. 아는 사람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고, 가가대소 순간의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161쪽)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르카’와 ‘이라’는 해녀들의 가가대소에 전염돼 “미친놈들처럼 웃기 시작했”(162쪽)다고 한다. 그렇게 제주의 해녀들과 저자는 언어의 장벽을 훌쩍 넘어, 아니 언어의 장벽도 넘을 필요 없이 언어의 장벽을 순간 없애버린 채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공간을 한바탕 웃음의 에너지로 채워버린 것이다. 일순간, 그 공간은 동아시아 변방의 작은 섬의 해녀와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의 문화를 공부해온 연구자를 “진정한 우애”(162쪽)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그들은 그저 서로 보고 “아무 이유도 없이”(163쪽) 웃었을 뿐인데, 그 웃음으로부터 ‘우애’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게다가 이 ‘우애의 웃음’을 돌하르방의 주술적 힘과 연결짓는 대화적 상상력으로 번진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적 상상력은 가가대소를 “하루가 저물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자의 포효”이면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의 구현일 수도 있”(169쪽)다는 통찰에 이른다. 그렇다면, 저자가 관광한 성산일출봉의 분화구와 용두암이 해저 화산 대폭발로 제주도가 생겨나면서 형성되었듯이, 이것은 제주의 해녀의 ‘가가대소’와 그 문화적 상징물로서 돌하르방의 짓는 웃음과 포개지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을 이루는 ‘다중 우주’의 진리로서 라틴아메리카 방문자도 자연스레 이들에 감응한다. 마치 처음 접하는 음악이고 시이므로 바로 그 낯선 순간 침묵이 찾아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라틴아메리카 연구자 미겔은 이내 제주의 풍정(風情) 속 음악–시–침묵에 푹 빠져들며 감동한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대화=음악=시=침묵’, 그리고 ‘우애’를 자아내는 ‘다중 우주’로서 대화적 상상력의 길은 경이롭다. 


# 고명철

<br>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