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48)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지음, ‘시골시인-J’, 걷는사람 출판사, 2022.

 

 재명齋名도 예쁜 「차 보금자리」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시집이다. 『시골 시인-J』
도시도 아니고 제주도 아니며 그렇다고 산촌이나 농촌도 아닌 시골의 시인은 누구인가? 급기야 이니셜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궁금했다. 얼른 들어 슬쩍 읽어보았는데, 아차 싶었다.

견고한 은유의 껍질 

시인은 “달빛 환한 봄날 / 절름발이 개와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신다.”(고주희, 「로이 하그로브에게 인사를!」)고 하면서 “누가 내 사물함에 죽은 토끼를 넣었어요.”(「조로아스터교식 화장」)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 있다. 
“걸음이 느린 나는 / 모서리를 걷는 사람”(김애리샤, 「모서리를 걸어요」)이라고 단정하고 애써 “당신과 나란히 걷지 못하는 나는 / 일부러 천천히 걷는 사람 / 그대만 모르게 그대를 사랑하는 느린 사람”이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축축한 무덤 위에서 모가지 잘린 수선화 입에 물고 바드득바드득 부리를 갈아대고 있는 까마귀가 가엾다 하현달은 서둘러 몸을 사린다 나는 독한 년 천칭자리를 가진 년 당신의 허벅지 살을 저며내어 측량한다.”(「윤달」)고 시어를 독하게 씹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상처가 몸의 중심이었다.”(허유미, 「움딸」)고 고백한 시인은 “딸기에 가려면 /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 설익은 말부터 챙겨야 한다.”(「엇갈리는 말」)고 헷갈리는 말을 뚝뚝 흘린다. 딸기는 곧 수박이 되기도 한다. “절벽이었지? / 아니 수박이야”(「외로운 아이의 버릇」) 사실 절벽이든 수박이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싶은데, 시인은 반박한다. “동정하는 것 같아 수박이었지? / 아니 절벽이야.” 
시집의 네 번째 자리에 좌정하고 “새는 라디오처럼 고백할 줄 모르고 / 라디오는 새처럼 울지 못”한다고 하면서 “아, 유월만 살고 말 사람처럼 짖고 싶어라.”(김효선, 「라디오가 새의 목소리를 가진다면」)고 작게 읊조리는 시인은 스물다섯 살 먹은 낙타처럼 “늦은 밤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 마루에 털썩 눕더니 코피를 흘리며 엉엉 운다.”(김효선, 「고독한 찌개」)

시인의 속내가 견고하게 꽈리를 튼 은유의 장막에 가려 어둡기만 하다. 무엇일까? 그들을 단단하게 얽어맨, 어쩌면 의도되거나 어쩔 수 없는 장막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서 또는 약간의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섬에서 섬으로 흘러들었어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난 운명적으로 섬의 외로움을 타고난 걸요. 섬이란 게 그렇잖아요. 가도 가도 안이고 또 가도 가도 바깥이잖아요. 안에선 만질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쓸쓸한 가시처럼 언제나 생겨나고요. 바깥에선 섬 내부의 온도를 부추기는 공기들이 들고 나기를 반복하죠. 그 경계에서 섬의 외로움이 철썩철썩 생겨나는 것 같아요.”(김애리샤, 산문, 「나의 사주는 섬」)

“섬과 나는 반복되는 두려운 기억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허유미, 산문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외로움이 가득한 사주라서 어디든 흘러들어야만 / 완성이 되는 물의 사주”(고주희, 「흙의 날」)

“섬 안에서의 태생도 동서남북으로 갈린다. 동쪽과 서쪽은 날씨만큼이나 사람들 성향이나 말투까지도 다르다. 서쪽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자주 고독했고 우울했다. 가진 것 없이 모든 걸 비워내야 하는 저녁 하늘처럼.”(김효선, 산문, 「서쪽은 서쪽의 심장을 매달고」)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삼관왕(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생물권보전지역)의 제주, 국제적인 자유를 표방한 국제자유도시 제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호텔과 쭉쭉 뻗은 길, 도시의 숲을 이루는 아파트와 리조트, 럭셔리 풀빌라, 무엇보다 매년 수백 수천만 명이 방문한다는 관광의 메카 제주에서 그네들은 왜 스스로 ‘시골 시인’이라 자처하면서 자주 고독하고 우울한가? 왜 두려운 기억을 속삭이는가? 외로움이 사주이기 때문인가? “내 몸에 물을 간직한 섬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과 무리 사이 / 불안한 거리에서 / 은유는 시작된 것 아닌지 골몰하다. / 노트 속에 남은 새들의 발자국 / 무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허유미, 「본래」)

그래서 시인은 솔직히 고백한다. “은유가 끝까지 다정했던 적이 있었는가 / 잠시 망설이면 타인이 된다.” 비정한 은유는 그의 고독, 그가 자초한 불안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들의 은유가 왜 이리도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는지. 

섬, 우수憂愁이거나 그리움

사람들은 섬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외로움을 숙명처럼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는 고금이 동일하다. 조선시대 왕족인 해원군海原君 이건李健은 「장난삼아 둘째 형의 시에 차운하며(戱次仲兄韻)」에서 이렇게 읊었다. “영주의 꽃과 달에는 어찌 이리 수심이 많은가(瀛州花月幾多愁).”
섬에서 섬으로 이주한 시인(김애리샤)에겐 더욱 더 그러하다. 태생적으로 “외로움이 가득한 사주라서 어디든 흘러들어야만 / 완성이 되는 물의 사주”(「흙의 날」)라는 시인 고주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김애리샤가 읊은 것처럼 섬은 “가도 가도 안이고 또 가도 가도 바깥이”기에 “안에선 만질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쓸쓸한 가시처럼 언제나 생겨”난다. 그래서 그녀는 “해석할 수 없는 말들에 푹 젖어 / 그네 타는 상상을 해요 / 답을 알고 있는 하늘이 될지도 모르니까요”(「그네를 타다가 떨어졌는데 그 바닥이 바다였어요」)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녀에게 “시는 만신창이 세계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동시에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치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고주희, 산문, 「사라봉-한밤의 산토끼」) 그네들의 시는 어둠을 몰아내고 상처를 치유하며, 고독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 쓰기란 어둠의 균형을 찾는 일입니다. 어둠에 더 깊게 침투하고 어둠의 압박을 느끼며 삶의 공포와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시 쓰기는 불안도 아니고 허무도 아닙니다.……나의 존재를 살찌우고 싶은 욕망이면서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허유미, 산문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상처가 몸의 중심이었다.”(허유미, 「움딸」)는 그녀는 마네킹을 마주 보면서 자신이 거의 마네킹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마네킹이 사는 목표는 오로지 / 조금 남은 우울과 명랑을 붙들고 / 중심 잡고 나를 바라보는 일 / 쓸쓸함도 위로가 된다는 걸 마네킹에게 배운 사랑”(「마네킹을」)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마주한 공간에서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마음이 애잔하다. 그 애잔함은 그녀의 눈빛을 사라지는 것(「요양원」의 “긴 다리가 부러지듯 이빨이 뽑힌” “기린의 늘어진 고독”의 노인)이나 「길안에 길」을 지팡이를 짚고 가는 이(아마도 시각장애자)에게 보내는 마음과 같은 것 같다. 따뜻함이거나 보드라움이다.     

세상에 섬이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제주는 섬이다. 하지만 어디 제주만 섬이랴. 제아무리 큰 대륙이라 자처해도 그보다 큰 바다에 떠 있는 것일 따름이니 생물치고 섬에 살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으랴? 하여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처연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막막한 지평선의 끝 또한 바다이니 그 외로움이 같지 않겠는가?(소동파, 「시필자서試筆自書」 참고) 그럼에도 섬은 제주이다. 아니 제주는 ‘섬’이다. 시인들에게. 그녀들을 잠시 떠나 또 다른 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과 통하기 위해.  

시를 만나러 가는 길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들은 교과서를 통해 시를 만난다. 지금도 절반쯤은 외우고 있을 몇몇 시인들의 시를 통해 우리는 ‘시’라는 것을 배웠다. 참고서는 그 ‘시’를 발가벗기고 자로 재며, 해부도를 제시한다. 그렇게 우리는 운율도 상상도 사라진 채 주제만 남거나 형식만 남은 시의 뼈다귀만 슬쩍슬쩍 핥으며 살았다. 그나마 외우기라도 했다면 다행이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만난(선배가 사 준) 시집은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창작과 비평사 시선, 1977)였다. 아, 이런 것도 시구나. 나는 너무 늦게 시가 내가 모르는 세상을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창비시선이 지겨울 때쯤, 아니 그것만으로 기갈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군대 시절 선임인 정 병장이 건네 준 한 권의 시집, 김광규의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그 시집을 통해 황동규와 정현종, 마종기로 이어지는 또 다른 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후 나는 시에 관한 한 닥치는 대로 읽는 일종의 다식증에 걸린 듯했다. 정점은 역시 김수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시선, 1989)을 끝으로 한동안 한국 현대시에서 멀어졌다. 무엇보다 내 전공(중국문학이론)을 학습하는 데 허덕이느라 마음이 다급했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시를 읽은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힘듦을 넘어서기에 여유가 없었고, 낯설기 하기에 지쳐 자꾸만 낯설어졌다. 시가.  
어쩌면 내 인생에서 시를 통해 위로받고 싶었을 때, 시가 잠자고 있던 내 열정을 격동시켰을 때, 시의 어느 구절이 내 연애편지의 중요한 인용구가 되었을 때, 시인 아니 시를 통해 세상 만물을 새롭게 볼 수 있었을 때, 시를 읽고 난 후의 여미餘味가 며칠이고 내 심장의 촉각을 건드리고 있을 때, 나는 시에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시를 통해 눈빛을 반짝이고, 내 서러움을 위로받으며,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널널한 시집의 빈 터에 채워 넣고, 혼자 푸른 하늘을 쳐다보거나 때로 낄낄대기도 하고 때로 훌쩍이기도 했던 것 같다. 

시를 읽을 때 가장 낭패감을 느끼는 경우는 시의 맥락을 찾았다싶어 시인의 사로思路를 따라 신나게 가다가 갑자기 돌변한 시어의 절벽에 도달할 때이다. 돌아보면 분명 온 길이 맞는 듯한데,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다. 이는 애당초 길을 잘못 들었거나 시인이 샛길로 빠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혼자만 희희낙락한 경우, 또는 드물지만 시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도 모르게 이탈한 경우이다. 보통 이럴 때는 그냥 페이지를 넘기기 마련이다. 시를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시론을 전공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 집착하지 않기 마련이다.

지금은 드라마와 영화, 가끔은 소설이 시를 대체한 듯하다. 스릴과 서스펜스, 잘 짜인 각본과 구성, 탁월한 연출력 또는 상상력, 폭포수와 같은 웅장함과 스포츠카와 같은 속도감. 분명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음을 눈치 채고 있기는 한데 어제나 오늘,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똑같이 배분된 시간에서 시집을 잡을 시간이 없다. 나의 문제인가? 아니면 시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문제인가?

마지막 한 마디

필자는 고릿적 먼 중원에서 나온 ‘흥관군원興觀群怨’(『논어·양화』)이란 말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에서 오랜 세월 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 시의 효용, 창작과 감상의 원칙 등에 응용되었는데, 물론 고대 중국의 한시漢詩에 관한 것이나 지금의 시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정감의 발흥, 사물에 대한 남다른 시각, 무리와의 소통(동감, 교류), 그리고 원망의 발설(슬픔과 고통, 비판 토로)을 의미하는 ‘흥관군원’은 중국 시론에서 ‘시언지’와 ‘음영정성’, 즉 시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을 발설함이라는 가장 대표적인 정의와 연결되며, ‘정경교융情景交融’이나 ‘불평즉명不平則鳴’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듯 ‘흥관군원’은 한시漢詩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가란 분기와 파생은 존재하되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서정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뜬금없이 기원전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독자로서 시골 시인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공유하고 ‘치유’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시가의 효용성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할 수 없다. 시란 본시 개인의 독백일 수 있다고, 그리하여 가장 개인적이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눈을 흘길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네 명의 시인들이 속삭이는 섬의 외롭고 때로 적막한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을 따름이다. 필자가 그들에게 은유의 장막을 조금 걷어줄 것을 요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책명: 시골시인-J
출판사: 걷는사람
지음: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발행일자: 2022년 5월 6일 1판 1쇄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shim42start@hanmail.net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