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49) 신조하 외,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네오픽션, 2022.

사진=알라딘.
사진=알라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첨단기술이 출현하고 있다. 세상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바란다. SF는 ‘변화의 장르’로, 현재의 변화 추세를 통해 미래를 상상한다. 이것이 외삽(外揷, extrapolation)이라고 부르는 SF 장르 특유의 문학 기법이다. 그러니 우리는 SF를 통해 세상에는 없는 상상의 과학기술을, 하지만 어쩌면 곧 출현할 지도 모르는 그런 기술을 미리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SF가 변방의 소외된 장르에서 매력적인 문학 장르가 된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

SF 작가 프레드릭 폴(Frederik Pohl)은 “좋은 과학소설 이야기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교통 체증까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중요한 신흥 기술이 출현한다면 기술 자체의 발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가 발명되자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교통사고, 교통 법규와 신호등, 자동차 보험, 자동차 극장, 운전면허, 자동차 경주, 자동차 데이트……. 이 목록은 더 길어질 수 있다. 기술은 이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일상과 문화까지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기술에 기대하는 것이나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신진 작가 9명이 한 편씩 SF 단편소설을 수록한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기술적 조건 속에서 우리의 삶과 문화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상상한다. 각 단편마다 개성이 다르고 작품 수준 역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근미래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저마다 담고 있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인공지능이다. 이외에도 로봇, 마인드 업로딩, 인공 자궁과 같은 SF 메가텍스트(SF megatext, SF의 코드)가 출현한다.

이세형의 단편이자, 이 책의 표제작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SF 작가 필립 K. 딕(Philip Kindred Dick)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1966)를 상기시킨다. 딕의 소설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SF 영화 ‘토탈 리콜’(1990)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제목 그대로, 기억을 생성하고 삭제하는 조작 기술이 상업화된 시대를 그렸다. 딕의 전형적인 주제인 현실과 환상의 착종과 붕괴,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그린다. 

이세형의 SF는 기억의 매매 대신 감정의 매매를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삼았다. 감정을 사고 파는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인공지능 기술의 일상화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와 여자는 의뢰인 대신 이별을 통보하는 대리 알바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른바 ‘감정 대리업’에 종사했던 이들은 ‘토탈 이모션’이라고 부르는 AI 스타트업 기업으로부터 데이터 확보를 위한 직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두 번의 연이은 성공에 힘입어 ‘토탈 이모션’은 각종 상품을 출시했다. 실행과 동시에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이야기를 생성하는 소설 앱 ‘토탈 픽션’,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리를 팝, 힙합, 로큰롤, 클래식, R&B,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생성함은 물론 ASMR 기능까지 겸비한 ‘토탈 사운드’, 진짜 같은 가짜 사진과 고전적인 서양화 및 동양화부터 포스트모던 추상화까지 그려내는 ‘토탈 드로잉’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다가 역대급 작품 ‘토탈 프렌드’가 나타났다. 언제 어디서든 곁에 있어줄 아바타가 자동으로 생성되는 앱이었다. 가령 혼자 밥 먹으며 드라마를 보다가 ‘토탈 프렌드’를 실행하면,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AI가 외부를 파악한 후 함께 드라마를 보며 식사 중인 인간의 모습을 화면상으로 생성해냈다. (158쪽)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가 그리는 이야기 세계는 발전된 AI 기술이 일상생활을 급격하게 바꾸기 시작한다. ‘토탈 이모션’의 첫 번째 AI 서비스인 ‘토탈 텍스트’는 문자메시지를 자동생성해주는 것으로 사람이 쓴 것처럼 호소력 있는 텍스트를 생성해서 발송하는 앱이다. 만약, 소설 밖에서 이런 서비스가 있다 해도 그 성공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토탈 ARS’라는 두 번째 서비스는 자동화된 상담 전화로, 실제로도 현재 AI 챗봇과 자동응답 서비스가 상당히 많은 인간의 상담 업무를 대체하고 있다. 

‘토탈 픽션’, ‘토탈 사운드’, ‘토탈 드로잉’ 등의 서비스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AI의 예술과 문화 콘텐츠 생성 능력을 볼 때 곧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AI가 단순히 수준 높고 흥미로운 문화 예술 콘텐츠를 생성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개별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가 사용자의 이용 경력을 분석한 알고리즘으로 콘텐츠를 추천하듯이, 언젠가 AI는 개별 맞춤형 콘텐츠를 생성하고 콘텐츠 이용자는 이를 다시 적당히 조정하여 생성한 뒤 즐기게 될 것이다. 주인공의 세부 사항이나 이야기의 세부가 다른 수만 편의 다른 ‘오징어 게임’을 즐길 날도 올 수 있다. 아니, 이용자들이 완전히 새롭고 다른 이야기들을 즐기게 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대중문화가 나타날 수도 있겠다. 창작자와 수용자는 사실상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예견하듯, AI 예술의 독창성과 주체성을 둘러싼 지금의 미학적, 철학적 논란은 기술 자본에 의한 독점 문제에 비하면 한가로운 토론 주제일지도 모른다. “이제 모든 예술 분야를 AI가 장악한 시대였고, 그래서 인간 예술가가 벌던 돈을 AI 회사가 벌어들이는 시대였다.”(161쪽) 또한, 자동화된 시대에는 인간적 감정 경험이 가장 귀중한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 작가의 중요한 메시지다. 다시 말해 AI는 인간 삶의 가치들을 새롭게 규정하고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 단편은 어떤 대목들을 과장되거나 허술한 상상력도 엿보이지만, AI 기술의 일상화를 그리는 부분들은 꽤 설득력 있다. 

변호사 겸 작가인 신조하의 ‘인간의 대리인’은 이 작품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게 읽은 단편이다. 무뇌증으로 태어나 인공 두개골과 '투명 뇌'를 장착하며 살아가는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판사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된 지 10년이 지났다. 주인공은 좀비처럼 변해버린 알츠하이머 의약 임상시험 참여자의 '죽을 권리'를 변호한다. 로펌 대표는 수족이 모두 보철(prosthesis)인 사이보그(cyborg)이며, 좀비처럼 변해버린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인간인 동시에 인간 이하의(subhuman) 존재이다. 이처럼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한 인간 범주를 벗어난 존재이나, 그렇다고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들은 포스트휴먼(posthuman) 주체다. 소설은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주제,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됨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질문은 포스트휴머니즘 문학의 일반적인 질문이지만, 이를 형상화하는 문학적 방식이 노련하다. 

스키마 리셋터로 사람들의 스키마를 바꾸려는 실험을 이야기하는 ‘스키마 리셋터’, 인공자궁을 둘러싼 정치적 암투를 이야기하는 ‘대통령의 자장가’, 도덕을 파는 미래 사회를 그린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마인드업로드 실험-연구에 대한 이야기인 ‘정신의 작용’도 인간 향상이나 생명의학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명암을 상상한다. 휴머노이드와 할머니의 상호 이해를 그린 ‘나와 올퓌’,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휴머노이드를 이야기하는 ‘영원’은 기술적인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post-relation)를 상상한다. SF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이 우리들의 현재를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가 되기를 바란다. 


# 노대원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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