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사이] (11) 고충석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전 총장

 

어느덧 추석 명절이다.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자기 시대를 마감하고 작별을 고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식물의 빛깔, 풀벌레 소리에 가을이 완연하다. 철학자 니체(Niche)는 가을이 좋아 자신이 태어난 생일도 가을로 옮겨버렸다고 한다. 나도 젊은 날에는 니체만큼 가을을 좋아했다. 가난한 시대.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허름한 바바리를 입고 밤거리를 자주 돌아다녔다. 대학 때,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풍이 든다는 서울 근교 용문산에 자주 올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궁핍한 형편에서도 친구들과 보낸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그때를 같이 했던 친구들은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서울의 여의도, 송파의 석촌 호수 가을도 정말 아름답다. 그 옛날, 덕수궁 돌담길에는 만추의 은행잎이 몇 센티미터씩 쌓이곤 했다. 가을의 남이섬도 정말 아름다웠다. 대학 3학년 때인가 가을이 무르익은 그곳에 같이 놀러 갔던 소녀들, 첫눈이 내리면 명동 입구 클래식 다방인 ‘훈목’에서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던 그 소녀들도 이제는 칠순의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날, 서울 석촌호수의 가을은 방황하던 나에게 행복을 주는 안식처 중 한 곳이었다.  ⓒ픽사베이
젊은 날, 서울 석촌호수의 가을은 방황하던 나에게 행복을 주는 안식처 중 한 곳이었다.  ⓒ픽사베이

석촌 호수, 여의도, 덕수궁은 내가 고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젊은 날, 서울에 올라가면 들리곤 했던 곳이다. 힘든 여정을 지나 고향에 직장은 얻었지만 우울한 시대, 몰락한 가세, 경제적 궁핍 등 어느 것 하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때마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생각하며 소시민이 되어버린 나를 위로하며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를 스스로 묻곤 했다. 소시민으로 사는 나 자신에 반항하며 살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중략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2012년 초겨울, 오랜만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길거리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이브 몽탕(Yves Montand)이 부른 ‘고엽’을 떠올리며 그의 연인이었던 에디프 피아프(Edith Piaf)의 서러운 인생이 생각났다. 에티프 피아프, 쇼팽 등이 묻혀있는 무덤을 찾아간 기억도 새로웠다. 젊은 날 나는 두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들에 관한 책들도 찾아 읽었다. 나치 치하에 홀로코스트로 죽은 많은 유대인도 여기에 묻혀 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늦가을, 폐결핵을 앓던 쇼팽이 연상의 연인인 조루 주 상드(George Sand)와 요양지인 지중해 어느 섬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아파트를 찾아가 그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쇼팽은 조국 폴란드를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다. 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No 15 Raindrop)’을 좋아했다. 왼손 반주의 음울하게 반복되는 음이 땅에 떨어졌다 튕겨 오르는 빗방울 같다고 하여 사람들은 곡의 제목을 빗방울 전주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비 오는 날 요양지의 적막한 수도원에서 혼자 빗소리를 들으며 곡을 썼다. ‘빗방울 전주곡’엔 가을비 같은 남자의 우수가 배어있다. 언제인가 제주대학교 심희정 교수의 음악회에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연주하는 그의 명연주에 찐한 느낌이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한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에 관심이 많다. 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전공을 인물사 연구로 했다면 학문적으로 작은 업적이라도 남길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상숑 고엽은 내가 첫손가락을 꼽을 만큼 좋아했던 노래였다. 그 노랫말이 주는 의미 또한 각별한 것 같다. 파리에 같이 갔던 정세욱 교수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한국 지방자치학의 태두이다. 그는 기성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으로 독창회까지 연 아마추어 성악가이기도 하다. 그분은 고엽을 원어로 너무나 멋지게 불렀다. 이브 몽탕이 불러서 유명해진 ‘고엽(枯葉)’의 가사는 바로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의 시이다. 고엽을 들으면 인생과 사랑, 이별과 추억을 많이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어를 할줄 안다면 노래가 주는 맛을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고엽(枯葉)
                      - 자크 프레베르 -
 
오 나는 그대가 기억해주길 간절히 원해요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나날들을 
그땐, 인생은 더없이 아름답기 그지없었지!
그리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죠.
낙엽들이 무수히 많이 쌓여 있어요
봐요, 난 아직 잊지 않았어요
        … … …
추억도 미련도 함께 말이죠.-
그리고 북풍은 그것들을 모두 실어 가죠
.망각의 춥고 추운 밤 저편으로 
보세요, 난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대가 내게 불러주었던 그 노래를 
그 노래는 우리를 닮은 노래예요.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인생은 남몰래 소리도 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갈라놓아요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를 지우네요. 
헤어지는 연인들이
발자국들을              
 

           

내가 젊은 날 술자리에서 가끔 암송했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me Apollinaire)의 시 ‘미라보 다리 밑에 센 강은 흐르고’ 그렇게 시작되는 그 미라보 다리도 정교수님 안내로 찾아갔다. 

그는 파리 유학 시절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70대가 되어서 와보니 감정이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감정은 나이에 따라 색감을 달리하는 것 같다. 조금은 초라한 파리의 미라보 다리,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많은 한국 청년들에게 파리는 더욱 아름다운 도시로 각인되었다. 인생이 벌써 이렇게 많이 흘러가 버렸다고 하는 생각에 눈물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났다. 생각하면 인생에 있어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에 정교수님께서 나에게 안부 전화를 주셨다. 그분도 나이가 이제 80대 후반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고 총장을 만나면 파리에서처럼 이브 몽탕의 고엽을 멋들어지게 부를 수 있다 ”고 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도하자고 했다. 그의 대학 선배인 조문부 총장(제주대 6대 총장)의 부음을 전했더니 대번 목이 멨다. 인생의 만남이란 다 그런 것이다. 추억도 사랑도 미움도 성취도 다 세월이라는 이라는 강물 속으로 스러질 뿐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리네
내 마음속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 
       … 중략 …
사랑은 강물처럼 흐르네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 중략 …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가네
우리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르네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흘러 나도 이제는 칠순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계절의 가을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의 가을도 깊어 가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탄식하노라. [이렇게 왔다 이렇게 가는 것을 –Thus Icome and Thus I go]

영국의 계관 시인 테니슨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행복스러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다시 못 올 지난날들을 생각할 때, 눈물이 두 눈에 고인다고 노래했다. 젊었을 때는 이 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서 암송했을까? 김동길 교수가 늦가을 강의실에 와서 이 시를 칠판에 적고 멋있게 해설해주셨다. 그때는 교수님만 멋있다고 생각했지 이 시에 대한 공명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더욱이 내 인생의 늦가을에 이르고 보니 이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눈물 이어, 속절없는 눈물 이어 
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네
거룩한 절망의 심연에서 생겨나 
가슴에 솟구쳐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가을의 행복한 들판을 바라보며 
돌아오지 못할 날들을 생각할 적에(김동길 역)
Tears, idle tears, I know not what they mean.
Tears from the depth of some divine despair 
Rise in the heart, and gather to the eyes.
in Looking on the happy Autumn –fields,
And thinking of the days that are no more   

          데니슨, [가을]  / 김동길 역 

 

이 시를 옮기면서 그리운 이들이 안개처럼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제는 이들 대부분이 다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분들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 가끔 이들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애잔함이 밀려온다. 내가 제주대학교 총장 시절 학교 발전기금 모금차 20회 정도 일본을 방문해서 많은 교민을 만났다. 적잖은 성과도 올렸다. 그중에서도 일본 조총련의 거물 Y 회장과의 만남은 오늘날까지 나의 기억 속에 우울한 색조로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서귀포 법환리 출신으로 조총련의 거물이었다. 당시에도 재산이 조 단위라고 들었다. 일본에서 땅값이 최고 비싸다는 우에노 거리에 여러 채의 빌딩을 가지고 있고 큰 사업체도 운영하는 상당한 재력가였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 국회에 해당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의 의원도 겸하고 있었다. 북한 정권에 거액의 헌금을 한 공로로 북한에 Y 회장 동상도 여러 곳에 있다고 들었다. 나는 통일부에 공문을 보내 일본에 가서 요주의 인물인 Y 회장을 만나고 싶다고 사전에 신고하고 허가받았다. 고향의 정취를 느끼시라고 제주 해녀상등 이런저런 선물로 가지고 갔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분의 인생역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밀항선을 타고 친척이 사는 오사카로 왔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오무라 수용소에 잡혀갈 것을 각오하고 파출소에 가서 이실직고하고, 밥을 얻어먹었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그가 너무 어려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친척에게 인계했다. 야간 고등학교 다닐 때, 양주 등 통제품(미제품)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는 애초에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의 누이동생이 남편을 따라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가면서 인질이 되어 조총련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법환리에서 친구들하고 놀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까만 안경 너머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나도 눈물을 훔쳤다.

그 날밤 Y 회장은 자신의 단골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가서 위스키를 꽤 많이 마셨다. 술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장미 100송이를 건넸다. 그 많은 장미 송이를 건네준 의미가 뭔지를 그때 묻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때 그가 “지금은 북한의 최고인민의원 신분이라 한국을 방문할 수도 없고 조총련으로부터 회사 재정도 통제받고 있어서 제주대에 발전기금을 낼 입장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제주대에 거액의 기금을 낼 기회가 올 것이라며 자정이 넘어서야 술집을 나왔다. 다시 만나자며 뜨거운 작별의 악수를 하고 우리는 우에노 밤거리에서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 후 일본에 갔을 때,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누이동생의 안위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북한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Y 회장의 인생사는 분단이 낳은 처절한 비극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 맞는 가을은 젊었을 때 느끼는 가을의 맛이 아니다. 청춘기에는 가을에서 부활의 의미를 느꼈다면 지금 느끼는 가을은 조락(凋落) 그 자체다. 세월이 주는 거룩한 절망이라고 해두자. 그렇다고 꿈꾸는 것마저 포기하지는 말자. 사소하고 의미가 부족한 꿈이라도 가꿔나가자. 그 자체로 행복한 노년이다. 이 가을에 볼 발레리의 시구를 인용해 소박한 결심을 다져본다. ‘바람이 일어난다. 나도 이제 살아봐야겠다.’ 독자 제위께서도 한가위 보름달처럼 가득 차서 모자람 없는 명절 되시라. / 고충석 제주대 명예교수, 전 총장

고충석은?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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