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말다툼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 그리고 축제의 필수 과정 / 신강협

추석을 통해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내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축제를 이제 즐기기 시작한 셈은 아닐까 싶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추석을 통해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내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축제를 이제 즐기기 시작한 셈은 아닐까 싶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설 명절도 그러하지만, 추석 명절에도 어김없이 어른들의 말다툼이 이어진다. 별것 아닌것 같은데 여러 절차를 가지고 어른들은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추석 차례를 지낼 때마다 어른들의 말다툼은 어김없이 벌어진다. 사실 추석 명절 때, 그냥 조용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오래된 영화가 하나 있다. 1996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축제’가 있다. 영화의 제목을 축제이지만 실상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할머니의 장례식 풍경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장례식 내내 말썽이었고, 마지막 가족사진 찍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가족 한 사람을 가족사진 속으로 초대한다. 사진사가 웃으라는 이야기에 모두가 계면쩍어한다. 사진사가 농담 한마디 던진다.

‘웃어요, 웃어, 어디 초상났어요?’

그러자 모든 가족이 활짝 웃으면 영화는 끝이 난다. 장례식 영화인데 제목은 ‘축제’이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온 가족의 웃음’이다. 영화는 사실 할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을 통해 그동안 서로에 대해 품었던 가족들 간의 감정의 골을 보여준다. 갈등이 표출되고, 싸움이 벌어진다. 1900년대 중반만 해도 장례식 절차가 참 복잡도 하다. 아무튼, 그러한 다툼의 과정에서 가족들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죽음은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 않는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 큰 싸움이 되기 전에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며 서로 싸웠다, 물러섰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장례가 끝나는 장면에서 모두가 함께 웃는다. 영화 제목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화해하는 과정과 가족들의 함박웃음이 바로 축제의 모습이지 않은가?

필자도 나이가 어느 정도 지긋이 들었고, 내 어렸을 적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도 생겼고,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어르신들의 말다툼은 이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 말다툼의 한 주체가 되었다. 말다툼이 힘들기는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괸당들의 생각과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하고 다 수긍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내년에도 여전히 말다툼이 있을 것 같다. 조상님의 영정사진을 모셔놓고 막무가내로 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이런저런 불만이 있지만, 더 나은 내년을 생각하면서 올해는 이런대로 참고 지내자는 생각이 모든 괸당들의 머릿속을 지나쳤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축제’를 생각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다른 어떤 면에서는 서로 크게 반목하는 형제들이지만, 돌아가신 조상님들 덕에 우리 괸당들이 끊임없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추석을 지내면서 까다로운 절차에 짜증이 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절차와 행동을 강요하는 듯 하는 추석, 자신의 견해만을 강조하는 다른 괸당의 언행에 늘 다툼이 발생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조상님 덕에 매해 만날 기회를 얻고, 상황을 파탄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조상님들 덕으로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모두가 다 한 가족으로 큰 사진 한 장에 모두가 다 웃으며 앉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추석은 궁극적으로 ‘축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가족 내 말다툼은 사실 자연스러운 서로 간의 소통 자체이며,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생각이 다르고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니 당연히 공동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조정하며 서로 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이 점잖게 상대방을 잘 알고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배려함과 동시에,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대가 이야기 해주기 전에 또는 약간의 언성을 겸하여 화를 내기 전에는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간의 말다툼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추석 때 어른들이 말다툼하다가 가끔 이런 말도 나온다.

“아 기구나! 겅허난 경했구나!”(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데 이런 말다툼의 결론은 말다툼 당사자들이 내리는 경우가 많지 않다. 말다툼의 당사자는 열심히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고 때로는 상대를 달래기도 하고,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의 논리를 완전히 누르고 내가 원하는 결론을 완벽하게 상대로부터 동의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말다툼의 결론은 그 말다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내린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른 가족들은 그들의 말다툼을 보면서 이 사람 이야기도 이해하고 저 사람 이야기도 이해하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말다툼의 끝에 주방과 거실 중간에 앉아 계시던 제일 웃 여편삼촌(여자삼춘의 제주어)이 한 마디 한다.

‘겅허민, 이추룩 해불민 되컨게! 막 싸울일도 아닌게!(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막 싸울 일도 아니구만!)’

말다툼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가족들이 대부분 동의하면 그 다툼은 끝!

사회적 논쟁을 사회적 갈등으로 이해하고, 사회적 논쟁의 당사자를 사회적 분란자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쟁을 회피하는 것은 더 큰 사회적 갈등을 키우고, 그 갈등이 터져 나오면 수습도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논쟁은 분란도 아니다. 논쟁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점과 다른 생각을 꺼내놓고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한 공동의 생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진다. 제도와 절차만을 강조하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도외시하면 그 관계에는 비인격적 관계가 된다. 즉 전혀 인간적이지 않으며 인간보다 제도가 우선하는 형식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형식이 사람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인권에 있어서 세계인권선언문 제30조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권리는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나의 권리는 그럼 어떻게 실현해야 할까? 세계인권선언 29조에 나온다.

‘권리는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충족된다.’

즉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중함으로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 간의 말다툼은 서로 이해해 가는 과정의 기초과정이자 필수 과정이 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인간적 유대가, 또 추석 명절에는 조상님의 삶에 대한 공경심으로 말다툼을 증오로 치닫지 않게 하고, 또다시 내년 명절의 만남을 기약하며 대화를 지속하게 만든다. 추석을 통해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내 이야기도 나누며 서로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축제를 이제 즐기기 시작한 셈은 아닐까 싶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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