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의 탐나는 올레] (19) 저지리~서광리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한다. 유년시절 불가의 출가자로, 환속해 문화재 전문 공직자로,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공직 퇴임 후에는 다시 명상 간경하는 불가의 시자로 돌아가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윤봉택 시인이 제주올레 1~26코스를 따라 그 길과 마을에 깃든 흥미로운 제주(탐라) 이야기를 격주로 집필한다. 탐라에서 제주에 이르는 설화와 전설, 신화와 역사를 넘나 드는 시인의 해박하고 담백한 언어를 올레길에서 듣는 재미에 빠져 보시라. / 편집자 글


‘문도지’ 그 이름만으로도 오름은 삼백예순날 몸살을 한다.

동산이라 불러도 좋다. 야산도 아니면서 구릉도 아닌, 외로운 섬의 오름으로 솟아나, 삼백예순날 삶 전의 어둠을 밝히려 봉화를 올리는 너의 몸짓은, 도깽이주시가 되어 온 섬 바람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다.

살다 보면 더러는 칭원한 날도 많았으리, 하여도 강쳉이처럼 불어오는 하늬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 온, 저 강인한 탐라의 후예 오름 군락을 보아라. 덧난 상흔을 안 고름 풀어 가슴에 안고, ‘웡이 자랑, 웡이 자랑, 우리 애기 재와 줍서’ 한 말씀으로 모든 아픔을 보듬어 주시었나니.

이처럼 문도지에 닿으면 기억에도 없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 하면 일순 너와 나의 거리는 사라지고, 너와 나의 아픔은 가을꽃이 되어 낮게 낮게 물봉선으로 피어 9월을 기다리나니.

문도지에 닻을 내리면 으악새가 먼저 바람을 날리고, 억새가 보다 먼저 가을을 부른다. 비양도에서, 느지리 건너 닥모르 넘기면, 문도지 지나 남송이에서 가슴 울리는 키 낮은 바람의 물결을 보아라,

그 중산간, 오목가슴 아픈 기억으로 올레를 따라 마중이오름으로 가다 보면 알못, 대빌레못, 앞새못, 뒷새못, 마중물이 있다. 이처럼 못이 많았던 이유는 방목한 우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함이다. 

동네 유지들은 이웃사촌을 위해 연못 파기 좋은 곳에 용지를 마련하여 못을 만드시니, 이 고단 인심이 샘물 솟듯이 가득 넘쳐흐른다.

열아홉 번째로 연재하는 제주올레 14-1코스는 2010년 4월 24일 개장되었다. 저지리 올레 코스 안내센터에서 저지리, 금악리, 서광리 오설록 녹차단지 까지 9.3km, 23리 올레이다.

알못. 사진=윤봉택
알못. 사진=윤봉택

올레 센터에서 동북향 마을 안길을 따라 가면, ‘성굴왓’에서 북동으로 올레가 이어지는데, 삼을 많이 재배하여 불린 ‘삼남밧’이다. 주변에 태양광 시설이 있고 뒤로는 닥모르가 훤하다. 삼남밧 올레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담장 높은 게 특징이다. 이는 그만큼 계절풍이 많이 불기에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올레를 지나면 저지리 동동이라 불렀던 자갈 많은 작짓동네이다.
‘저지알못’ 입구는 저지예술인마을로 이어지는 육거리이다. ‘알못’은 마을 아래에 있어서 불린 이름이다. 본래는 식수용으로 사용하는 ‘곤물’과 가축용으로 사용하는 ‘구진물’ 등 세 개의 쇠물통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식수용과 가축용 두 개만 남아 있고 정자 쉼터가 있다.

알못에서 300여m 나아가면 마중이오름 좌측 능선 아래에 ‘뒈빌레못·대빌레못’ 입구이다. 여기에서 길 따라 250m만 더 가면, 그 중간 지점에 청수·저지·금악·상명리 대표들이 모여 회의하였던 ‘상짓동산’이 있고, 좀 더 가면 ‘뒈빌레’라는 지경에 인공 못이 있다. 1932년 4월 조종무가 땅을 내놓아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조성한 연못인데 식수로 사용되었다. 

앞새못. 사진=윤봉택
앞새못. 사진=윤봉택

이어서 마중이오름 능선 자락 앞에 ‘앞새못’이 있는데, 이 또한 인공 못으로, 1918년 양일득이가 사재를 내놓아 조성한 연못이다. 그리고 올레 남서쪽 ‘닥모루’ 방향 500m 지점에는 망구머슬(望古洞)이 있고, 그 곁에도 ‘마중물’이 있으며, 오름 뒤에는 ‘뒷새못’이 있다.

‘강정동산’에는 방목한 우마를 물 먹이기 위해 1960년 3월에 준공한 ‘강정못’이 있고, 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 ‘강정못’을 지나면, 저지 곶자왈 시험림 구역의 임도 북쪽에 지난날 숯을 구웠던 ‘숫구남빌레·숫굽빌레’가 있다. 

이 시험림에는 식물 530종, 희귀식물 개가시낭, 제주백서향, 약난초 등 20여 종이 있고, 동물 53종 법정보호종 긴꼬리딱새, 팔색조 등 9종이 서식하고 있다.

숫구남빌레. 사진=윤봉택
숫구남빌레. 사진=윤봉택

문도지오름으로 가는 곶자왈 지역에는 2017년도에 조성한 임도가 명이동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올레 5km 지점이 오름 입구이다. 

문도지오름은 명성목장에서 말 방목지로 이용하는 곳으로, 높이 또한 260m로 그리 높지 않아 10분 이내에 등정이 가능한 오름이다. 하지만 이곳 전체가 사유지이다. 목장이기 때문에 출입할 때 문 단속을 잘하여야 한다.

문도지오름은 죽은 돼지 뭍은 모습과 같아 불린 지명이지만, 오름 형세가 반달 모습이라 더 정겹다. 오름 정상에서는 한라산부터 시작하여 제주도 서부 지역을 조망할 수가 있다. 특히 수월봉과 차귀도로 스미는 석양이 장관이다. 이 오름 주변을 목장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던 것은, ‘어둔물’을 비롯하여 주변에 봉천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도지오름. 사진=윤봉택
문도지오름. 사진=윤봉택
문도지오름. 사진=윤봉택
문도지오름. 사진=윤봉택

문도지오름에서 내리면 중간 인증삿 스탬프가 기다리고, 그 올레 따라 명이동못으로 이어지는 주가흘길 올레로 내리면, 곶자왈 사이로 2018년 12월 한경면에서 건립한 노루 쉼터 정자가 있다.

다시 올레로 이어지는 곶자왈 입구 7km 지점에는 거북선, 조운선, 테우 등 여러 종류의 배 모형을 전시한 진박물관이 있어 이색적이다.

이곳을 지나 곶자왈로 들어서면 댕댕이덩굴이 많아 ‘정동머들’이라 부르는 능선이 있고, 만리향이라고도 부르는 희귀식물인 제주백서향 군락지가 올레 끝점까지 이어진다. 

곶자왈잣질. 사진=윤봉택
곶자왈잣질. 사진=윤봉택
사진=윤봉택
백서향 군락. 사진=윤봉택

꽃말이 꿈속의 사랑인 백서향은 천리향과 비슷한 시기에 꽃을 피운다. 도내에는 선흘리와 이곳에 집단 자생하는데, 그 은은한 향기는 이른 봄 곶자왈의 심향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이곳 곶자왈 지대를 지나다 보면 유독 ‘잣담’이 많다. 이는 이곳 곶자왈이 과거에는 우마를 방목하였다는 증거이다. 일부에서는 ‘잣담’을 ‘잣성’이라고 표기하지만, ‘잣’은 ‘성城’의 한글 표기이기 때문에, ‘잣’ 또는 ‘잣담’이라고 해야 옳다.

이 ‘잣담’ 곁에 ‘볏바른궤’가 있다. 굴 입구가 남향이어서 햇볕이 바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궤’는 바위 그늘집을 나타내는 제주어이다. 이 궤는 출입구가 세 군데로 한 개의 작은 가지굴을 갖고 있다. 가까이로는 4·3 때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탄피 등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이곳 곶자왈에는 작은 궤들이 간혹 조사되기도 하는데, 곶자왈에 자라는 백서향 자생지를 따라 올레를 가면, 그 끝점에 오설록 제주올레14-1코스 종점이 있다.

사진=윤봉택
잣질. 사진=윤봉택
제주올레 14-1코스 종점. 사진=윤봉택
제주올레 14-1코스 종점. 사진=윤봉택

* [윤봉택의 탐나는 올레]는 제주의소리와 서귀포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마련한 코너로 격주로 게재합니다. 


# 윤봉택

법호 相民.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4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강정마을에서 포교활동하면서 농사 짓다가 서귀포시청 문화재 전임연구원으로 23년 공직 근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쌍계암 삼소굴에서 명상·간경·수행하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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