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91) 아기 짐과 미역 짐은 무거워도 안 버린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매역 : 미역
* 베여도 : 무거워도
* 내분다 : 버린다. 안 내분다→ 안 버린다, 내버리지 않는다

아기를 업고 해녀 엄마를 마중하는 아이. 1968년 서재철 작가가 제주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아기를 업고 해녀 엄마를 마중하는 아이. 1968년 서재철 작가가 제주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서재철, 제주학연구센터.

이처럼 올바르고 절박한 속담은 흔치 않을 것이다. 당연한 소리 같아도 속담 속에서 대하니 진정성에 절로 고개 숙이게 된다. 혈연의 소중함과 존엄함 그리고 강인한 생활력….

옛날 여동생이 커 올 때, 베개를 등에 업고 아기를 업었노라고 들추며 좋아하던 장면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얼마나 스스로 대견했을까. 여자애에게는 어릴 적부터 아기를 품거나 업는 모성 본능이 있는지 모른다. 

두 살 아래만 되면 저 몸뚱이만한 아기를 지렝이(무게에 겨워 아래로 축 늘어지게) 업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저가 그렇게 좋아서 업은 아기인데, 무겁다고 쉽게 부려버릴까. 어림없는 일이다. 어깨에 벌겋게 금이 파이도록 업어선 우는 아기를 들추며 달래곤 했다.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을 테다. 집안의 혈통을 이을 귀한 핏줄임을 왜 몰랐겠는가. 다섯 살배기 아기 업게가 돌 지난 제 동생을 업고 둘 다 코를 흘리며 서 있던 모습이 오랜 회상의 공간으로 떠오른다. 추억 속의 흑백사진 같다.

또 하나. 철이 되면 해녀들이 바당(바다)에 나가 자맥질해 깊이 들어가 미역을 캔다. 그것들을 캐는 족족 망사리에 잔뜩 담아 넣는다. 특별한 도구도 없이 태왁을 짚고 옆에 망사리를 끼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바다 속으로 숨벼 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나잠업(裸潛業)이 곧, 해녀의 물질이다.

물속에 2~3분, 숨 쉴 수 있는 한도의 짧은 시간에 해산물을 캐어야 한다. 바닷물과 해녀와의 한바탕 치열한 싸움이다. 해녀가 망사리에 담고 나온 미역이야말로 해녀가 그 싸움에서 얻어낸 전리품(戰利品)이 아닌가. 지옥을 수차례 넘나들었을 것이다.

망사리를 어깨에 메고 나와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미역을 집까지 지어 날라야 한다. 미역 반 바닷물 반이라 엄청나게 무겁다. 무겁다고 내불(내버릴) 것인가. 어떻게 캔 것인데, 목숨을 걸고 채취한 게 아닌가.

‘애기 짐광 매역 잠은 배여도 안 내분다’

백번 맞는 말이다. 아기는 집안의 핏줄이라 귀한 자손이고, 매역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캔 것. 무겁다고 부려버릴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해녀들만의 몫이었지만,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남자들이 거들어 나선다. 마차나 리어커로 실어 나르다 양이 많을 때는 화물차가 등장하는 세상이다. 

미역이 좀 비싼가.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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