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98)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9월 초순 필자가 기획한 전시 ‘오키나와인’이 기타나카죠 마을에 있는 갤러리 라파예트에서 개최되었다. 오키오키 미 해병대 기지 사령부가 있는 캠프 즈켈런과 매우 가까운 장소에서의 미술전시 치고는 색다른 ‘오키나와인’이라는 타이틀은 현지인들을 다소 놀라게 한 듯하다. 오키나와의 섬들에 뿌리를 둔 인간이라도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오키나와인’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면, 일본에서 ‘오키나와인’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에서 ‘제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어딘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본다. 오키나와나 제주나 그 땅의 이름 자체가 무거운 역사의 각인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땅의 인간임은 이미 역사의 그늘을 떠맡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와 일본, 제주와 한반도 사이의 내국 식민지의 역사, 그리고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구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오키나와인’이라는 호칭은 ‘일본인’과 다른 존재를 암시 혹은 주장하는 울림을 포함한다. 그래서 마음씨 좋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인’이라는 논쟁적인 자칭 대신에, ‘오키나와현민’ 등의 애매한 주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제주와 다른 점 중 하나는 ‘오키나와’라는 개념이 고작 140년 정도의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근대 일본이 1879년 류큐 왕국의 병합을 완성해 이 섬들에 오키나와 현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때 섬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오키나와 현민이 되었다. 이족인 일본인의 지배에 대한 저항도 점차 줄어들어 과거 류큐인은 일본인에게 실질적으로 동화하는 길을 갔지만 1945년 처참한 전쟁터에서 그것이 완전한 재앙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후 오키나와의 통치자가 된 미국은 일제의 각인을 지우기 위해 ‘류큐인(Ryukyuan)이라는 호칭을 선호했다. 일제병합 이전의 역사를 상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섬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조리한 미군 지배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인‘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다. 1972년 5월 15일 미국이 일본에 오키나와를 반환하기 전까지 27년간 섬 사람은 일본 국민도 오키나와 현민도 미국 국민도 아니었다. 미군 점령기에 ’오키나와인‘이란 조국 없는 오키나와의 허공에 매달린 시간을 표상하는 자칭, 그리고 ’광복‘ 전의 ’조선인‘이나 ’대만인‘이라는 말이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의 질곡을 표현한 호칭이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오키나와인’은 어디에 있을까. ‘오키나와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져 국민 통합된 ‘일본인’의 완성형으로 향할 뿐인가. 아니면 ‘오키나와인’이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문득 떠오르는 성흔처럼 섬사람의 피부의 심층으로 파고드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원래 ‘오키나와인’이란, 정말로 존재하고 있던/있는 것인가? 이 전시 ‘오키나와인’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오키나와 반환 후의 세대(미군의 직접 점령 통치의 기억을 가지지 않는 세대)의 미술가들에 의한 응답이다. 다시 말해 여러 역사의 상처를 각인시킨 ‘오키나와인’이라는 역사적 주체 문제에 미술 표현을 통하여 접근해보려는 시도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니시나가 레이오나, 듣지 않고 내 이야기를, 가변크기, 설치,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니시나가 레이오나의 작품 ‘묻지마 나의 이야기를’은, CD 플레이어와 거기에 연결된 이어폰의 오브제이다. 그 이어폰은 철제선이 감긴 조개껍질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은 흘러나와 있을 소리를 들으려는 자의 귓전에 상처를 줄 수 있으며, 목소리의 주인과 그것을 듣는 자를 소외시킨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불통(不通, dis-communication)에 대한 중층적인 은유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하야토 마치다, 아카바나, 910×727mm, 캔버스에 아크릴,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하야토 마치다는 ‘오키나와 전쟁 전, 미국 점령기, 일본 복귀 후’를 각각 표상한 3점의 아크릴화를 제시했다. 그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오키나와’라는 기호의 집적이면서도, 기호화되는 그 자신에 대한 회의를 내포하고 있다. ‘오키나와인’은 그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고,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컬러풀한 꽃에 빗댄 사람들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함께 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엔도 카오루, 중력과 무지개, 미군제 낙하산, 단채널 비디오(3 min.), 2021.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엔도 카오루, 중력과 무지개, 미군제 낙하산, 단채널 비디오(3 min.), 2021.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엔도 카오루는 미군의 일회용품으로 입수한 낙하산이라는 소재에 의미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낙하산은 중력에 항거해 사람이나 물자를 안전하게 착지시키는 도구이지만 오키나와에서는 끔찍한 군사화와 생활을 위협하는 위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엔도의 영상 작품 ‘중력과 무지개’는 바람에 부풀어 생물처럼 날뛰는 낙하산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은 막강한 힘에 맞설 때야말로 자기 삶의 중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역설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영상 속 낙하산은 전시장 천장을 덮고 전시됐다).

나카마 노부에, 어디에 있어도, 가변크기, 식물 섬유,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나카마 노부에, 어디에 있어도, 가변크기, 식물 섬유,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반면 나카마 노부에는 낙하산의 질긴 화학섬유와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움을 가진 식물섬유를 매개로 세계와 교감한다. 섬의 토양에서 자란 식물이 엉켜 섬유질이 섞여있는 그녀의 작품 ‘내가 어디에 있든’은 기후의 축복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섬'의 축소판은 ‘오키나와인’이라는 고유명사마저 소멸되는 듯한 원초적 보편으로 우리를 이끈다.

타이라 준, 오키나와 조국 복귀 50주년 기념식, 254×203mm, 발색 현상 방식 인화,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타이라 준, 오키나와 조국 복귀 50주년 기념식, 254×203mm, 발색 현상 방식 인화,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사진가 타이라 준은 오키나와 섬에서 약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요론 섬에 초점을 맞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서로 섬의 모습을 보고 생활하고 있는 두 섬은 북위 27도선이라는 경계선에 의해 한쪽은 일본으로, 한쪽은 미국 점령지로 갈라졌던 역사를 갖고 있다. 요론 사람들은 오키나와에 깊은 동정심을 품고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애타게 기다렸다. 오키나와와 비오키나와의 경계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그 자리에서 타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재고하려고 한다. 

박영균, 섬의 노래, 아이패드 드로잉 애니메이션(3 min.), 2019.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박영균, 섬의 노래, 아이패드 드로잉 애니메이션(3 min.), 2019.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한반도 작가 박영균의 애니메이션 작품 ‘섬의 노래’에는 평택시의 광활한 농지와 오키나와 헤노코 바다라는 두 장소가 나타난다. 대추리 마을 사람들은 주한미군 기지 확장을 위해 그 땅에서 쫓겨났고, 녹색 농지는 캠프 험프리스로 변모했다. 주민과 함께 투쟁한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헤노코엣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다. 박영균은 매립 흙으로 붉게 물든 헤노코 연안을 푸른 물결이 지워가는 장면을 그려낸다. 대추리마을에서 좌절된 꿈과 희망은 섬의 노래를 타고 오키나와 바다로 이어진다.

이시가키 카츠코, 오키나와 사람을 찾아서 - 생활과 우리, 530×382mm, 신문접착 전단, 트레이싱 페이퍼, 유성 마커,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이시가키 카츠코, 오키나와 사람을 찾아서 - 생활과 우리, 530×382mm, 신문접착 전단, 트레이싱 페이퍼, 유성 마커, 2022.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그 노래는 이시가키 카츠코가 그리는 인물 군상 한 명 한 명에게 닿아 있을까? 이시가키의 드로잉 작품에서는 작가의 자유로운 선이 폭발하여 사람들을 출현시키고 증식시키며 연대시킨다.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길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불길한 것을 목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시가키는 이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그저 포옹을 한다. 그것은 상처와 재생을 반복하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사랑의 발로처럼 보인다.

전시장에서의 아티스트 토크 장면.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전시장에서의 아티스트 토크 장면.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오키나와인’이 일본 복귀에 기대한 것은, ‘기지 없는 평화롭고 풍부한 오키나와’의 실현이었다. 그 꿈이 무참히 깨져 온 50년, 미군 지배를 모르는 세대 또한 시대의 상처를 입고 있다. 그러나 가혹한 지정학으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서도 재생의 꿈을 잃지 않았던 이야기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제주나 대만처럼 어려운 상황을 살아가는 동아시아 섬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受傷と再生—<沖縄人>展のためのノート
豊見山和美

9月上旬、筆者が企画した<沖縄人>展が、北中城村にあるギャラリー・ラファイエットで開催された。在沖米海兵隊基地司令部を有するキャンプ・ズケランにほど近いロケーションである。美術展にしては風変わりな<沖縄人>というタイトルは地元の人々をいささか驚かせたようだ。沖縄の島々にルーツを持つ人間であっても、日常生活で自ら<沖縄人>と名乗ることはめったにない。もしかしたら、日本で<沖縄人>と名乗ることは、韓国で<済州人>と名乗ることとどこかしら似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勝手に想像してみる。沖縄も済州も、その土地の名前自体が重い歴史の刻印を負わされているから、その土地の人間であることはすでにして歴史の陰翳を引き受けざるを得ないことを意味する。沖縄と日本、済州と韓半島の間の内国植民地の歴史、そして継続する植民地主義という構図においてはなおさらだ。<沖縄人>という呼称は、<日本人>と異なる存在を暗示あるいは主張する響きを含む。だから、心優しい沖縄の人々は<沖縄人>というポレミックな自称の代わりに、「沖縄県民」などの曖昧な主語を用いることを好む。

だが、済州と異なる点のひとつは、<沖縄>という概念がたかだか140年ほどの時間にしか存在しないことだろう。近代日本が、1879年に琉球王国の併合を完成して島々に沖縄県という名を与えた時、島人たちは形式的に沖縄県民となった。異族である日本人の支配に対する抵抗も次第に薄れ、かつての琉球人は日本人に実質的に同化する道を進んだが、1945 年の凄惨な戦場でそれが全くの災厄だったことを思い知る。その後、沖縄の施政権者となったアメリカは、大日本帝国の刻印を消し去るために<琉球人: Ryukyuan>という呼称を好んだ。日本併合前の歴史を想起せよというわけだ。ところが、島人の多くは不条理な米軍支配の軛から逃れるために<日本人>に戻ることを熱望した。1972年5月15日にアメリカが日本に沖縄を返還するまでの27年間、島人は日本国民でも沖縄県民でもアメリカ国民でもなかった。米軍占領期において<沖縄人>とは、祖国なき沖縄の宙吊りの時間を表象する自称、そして「光復」前の<朝鮮人>や<台湾人>という語がそうだったような、植民地の桎梏を体現した呼称だった。

沖縄の「日本復帰」から半世紀を経た今、<沖縄人>はどこにいるのだろうか。<沖縄人>は時の経過とともに消えゆき、国民統合された<日本人>の完成形へと向かうだけなのか。それとも<沖縄人>とは、思いもよらぬ時にふと浮かび上がる聖痕のように島人の皮膚の深層に潜む何ものかなのか。そもそも<沖縄人>とは、ほんとうに存在していた/いるのか? <沖縄人>展は、これらの問いへの、沖縄返還後の世代(米軍の直接占領統治の記憶をもたない世代)の美術家たちによる応答である。言い換えれば、さまざまな歴史の傷を刻印された<沖縄人>という歴史的主体の問題に対する、美術表現を通じたアプローチの試みだ。

西永怜央菜の作品「聞かないで私の話を」は、CDプレーヤーと、それに繋がれたイヤホンのオブジェである。そのイヤホンは有刺鉄線の巻きついた貝殻の形をしている。それは流れ出ているはずの音を聞こうとする者の耳朶を傷つけかねず、声の主とそれを聞く者を疎外する。それは遍在するディス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重層した比喩となっている。

HAYATO MACHIDAは、沖縄の戦前・アメリカ占領期・日本復帰後をそれぞれ表象した3点のアクリル画を提示した。それらは彼にとっての「沖縄」という記号の集積でありながら、記号化される彼自身への懐疑をも孕んでいる。<沖縄人>は彼の内部でなく外部に存在し、彼はそれを眺めている。カラフルな花になぞらえた人々は哀し気な表情をしているけれども、共に泣くことができるか彼にはまだわからない。

遠藤薫は、米軍の払い下げ品として入手したパラシュートという素材に、意味の転換を企てているかに見える。パラシュートは重力に抗して人や物資を安全に着地させるツールだが、沖縄では禍々しい軍事化や生活を脅かす危険の象徴とされてきた。遠藤の映像作品「重力と虹霓」は、風に膨らんで生き物のように暴れるパラシュートに全身で抗う自分の姿を記録したものだ。それは強大な力に拮抗する時こそ、自己の生の重力を強く感じられるという逆説を体現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映像の中のパラシュートは、展示会場の天井を覆って展示された)。

その一方で仲間伸恵は、パラシュートのタフな化学繊維とは対照的な柔らかさを持つ植物繊維を媒介として世界と交感する。島の土に育まれた植物を結び、繊維をちりばめた作品「どこにいても」は、風土の恵みの祝福を穏やかに表現する。「島」の小宇宙は、<沖縄人>という固有名詞さえ霧散してしまうような原初の普遍へと私たちを導く。

写真家のタイラ・ジュンは、沖縄島から約20kmしか離れていない与論島にフォーカスしたインスタレーションを提示した。互いに島影を目にして生活している二つの島は、北緯27度線という境界線によって、片方は日本、片方はアメリカ占領下に分かたれた歴史を持つ。与論の人々は沖縄に深い共感を抱き続け、沖縄の日本復帰を待ち焦がれた。沖縄と非沖縄の境界が消えては現れるその場所で、タイラは「想像の共同体」の再考を試みる。

韓半島の作家・パク・ヨンギュンのアニメーション作品「島の歌」には、平沢市の広大な農地と、沖縄の辺野古の海という2つの場所が現れる。デチュリ村の人々は在韓米軍基地拡張のために土地を追われ、緑の農地はキャンプ・ハンフリーズへ変貌した。住民と共闘した芸術家の一人だった彼の、辺野古で抗う人々への共感は深い。パクは埋立の土に赤く染まった辺野古沿岸を青い波が打ち消していく情景を描き出す。デチュリ村で挫折した夢と希望は、島の歌に乗って沖縄の海へと繋がれる。

その歌は、石垣克子の描く人物群像の一人一人に届いているだろうか。石垣のドローイング作品では作家の自在な線が爆発して人々を出現させ、増殖させ、連帯させる。何かを見上げる人々は、吉兆を待つようでもあれば、不吉なものを目撃しているようでもある。石垣はこれらすべての人々をそのままに、ただ抱擁する。それは受傷と再生を繰り返す<沖縄人>への愛の発露のように見える。

<沖縄人>が日本復帰に期待したのは、「基地のない平和で豊かな沖縄」の実現だった。その夢が無残に破られ続けてきた50年、米軍支配を知らない世代もまた、時代の傷を負っている。しかし、過酷な地政学によって受傷しながらも再生の夢を失わずにきた物語もまた確かに存在する。それは、済州や台湾のように困難な状況を生きる東アジアの島々の物語でもあるだろう。

画像1: 西永怜央菜 聞かないで私の話を インスタレーション 2022
画像2: HAYATO MACHIDA Akabana カンバスにアクリル 910×727mm  2022
画像3: 遠藤薫 重力と虹霓  映像3分(撮影年) 2021 米軍製パラシュート
画像4: 仲間伸恵   どこにいても           植物繊維        サイズ可変 2022
画像5: タイラジュン 沖縄祖国復帰50周年記念式典 発色現像方式印画               254×203mm 2022
画像6: PARK Young Goun 島の歌 iPadドローイングアニメーション3分  2019
画像7: 石垣克子 沖縄人を探して― 生活とわたしたち  新聞折り込みチラシ、トレーシングペーパー、油性マーカー 530×382mm 2022
画像8: 会場でのアーティスト・トークの様子


Injury and regeneration - notes for the <Okinawa-jin> exhibition
TOMIYAMA Kazumi

In early September, the <Okinawa-jin> exhibition organised by the author was held at Gallery rougher yet in Kitanakagusuku Village. The location is close to Camp Zukeran, where the headquarters of the US Marine Corps Base in Okinawa is located. The title "Okinawa-jin", an unusual title for an art exhibition, seemed to surprise the locals somewhat. Even people with roots in the islands rarely call themselves Okinawa-jin in everyday life. I imagine that calling oneself an Okinawjin in Japan may be somewhat similar to calling oneself a Jejuan in South Korea. In both Okinawa and Jeju, the name of the land itself bears a heavy historical imprint, and being a person of the land means that you are already forced to take on the shadows of history. This is even more so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internal colonialism and continuing colonialism between Okinawa and Japan, Jeju and the Korean peninsula. The designation 'Okinawa-jin' contains echoes that imply or assert a distinct identity from 'Japanese'. Therefore, instead of the polemic self-designation <Okinawa-jin>, the kind-hearted islanders prefer to use ambiguous subject terms such as 'Okinawa prefecture people'.

However, one of the differences with Jeju is that the concept of Okinawa has only existed for a mere 140 years or so. When modern Japan completed the annexation of the Ryukyu Kingdom in 1879 and gave the islands the name Okinawa Prefecture, the islanders formally became Okinawa-jin. Resistance to the rule of the alien Japanese gradually waned and the former Ryukyuans went on to practically assimilate into the Japanese, only to realise in the horrific battlefields of 1945 that this was a complete disaster. Later, the US, which became the administrator of Okinawa, preferred the name Ryukyuan to erase the imprint of the Empire of Japan. The idea was to recall the history of the islands before the Japanese annexation. However, many of the islanders were eager to return to being 'Japanese' to escape the yoke of absurd US military rule, and for 27 years until 15 May 1972, when the US returned Okinawa to Japan, the islanders were neither Japanese, Okinawa prefecture people nor US citizens. During the US occupation, Okinawa-jin was a self-nominal term representing the suspended time of homelandlessness in Okinawa, and a designation that embodied the fetters of colonialism, just as the terms Korean and Taiwanese did before the “reberation".

Where are the Okinawa-jin now, half a century after Okinawa's reversion to Japan'? Will the Okinawa-jin simply disappear with the passage of time and move towards the perfection of a united Japanese people? Or is the Okinawa-jin something that lurks deep within the skin of the islanders, like a stigmata that suddenly surfaces at the most unexpected moments? In the first place, did/do Okinawa-jin really exist? The <Okinawa-jin> exhibition is a response to these questions by artists of the generation after the reversion (the generation that has no memory of the direct occupation by the US military). In other words, it is an attempt to approach the issue of the historical subject of the Okinawa-jin, who are marked by various historical scars, through artistic expression.

NISGINAGA Reona 's work 'Don't listen to my talk' is the object consisting of a CD player and earphones connected to it. The earphones are in the shape of a shell with barbed wire wrapped around it. It could damage the ear of those who try to listen to the sound that is supposed to be flowing out, alienating the owner of the voice and those who listen to it. It is a layered metaphor for omnipresent dis-communication.

HAYATO MACHIDA presented three acrylic paintings representing the pre-war, US occupation and post-return to Japan periods of Okinawa. They are an accumulation of signs of 'Okinawa' for him, but at the same time he is sceptical about being signed himself as Okinawa. Okinawa-jin exists outside, not inside, and he just looks at it. The people, whom he compares to colourful flowers, look sad, but he does not yet know whether he can cry with them.

ENDO Kaori appears to be attempting to shift the meaning of the parachute, a material acquired as a disposable item from the US military. Parachutes are a tool that defies gravity and allows people and goods to land safely, but in Okinawa they have been regarded as symbols of disastrous militarisation and life-threatening danger. Endo's video work “Gravity and Rainbow” documents her own full-body resistance to the parachute, which expands in the wind and flails about like a living creature. It may embody the paradox that it is only when you are in opposition to a powerful force that you strongly feel the gravity of your own life(The parachute in the video was displayed actually over the ceiling of the exhibition hall.). 

NAKAMA Nobue, on the other hand, communes with the world through the medium of plant fibres, whose softness contrasts with the tough chemical fibres of parachutes. Her work 'Wherever I am', in which plants nurtured in the island soil are knotted and interspersed with fibres, calmly expresses the blessings of the climate. The microcosm of the 'island' leads us to a primordial universality where even the proper noun 'Okinawa' seems to dissipate.

Photographer TAIRA Jun presented an installation focusing on the island of Yoron, which is only about 20 km from the island of Okinawa. The two islands, which live in each other's island shadow, have a history of being divided by a boundary line of 27 degrees north latitude, into Japan on one side and the US occupation on the other. The people of Yoron have maintained a deep sympathy for Okinawa and have longed for Okinawa's reversion to Japan. In this place, where the boundary between Okinawa and non-Okinawa disappears and reappears, TAIRA attempts to reconsider the 'imagined community'.

Two places appear in the animated work 'Song of the Islands' by South Korean artist Park  Young-goun: the vast farmlands of Daechuri, Pyeongtaek City and the sea at Henoko, Okinawa. The people of Daechuri village were forced off their land due to the expansion of the US military base in South Korea, and their green farmland was transformed into Camp Humphreys. As one of the artists who fought together with the residents, his empathy for the people who resist at Henoko runs deep. Park depicts scenes of blue waves erasing the Henoko coast, which has been stained red by reclaimed soil. The dreams and hopes that failed in the village of Daechuri are connected to the Okinawan sea with an Okinawan folk song.

Does the song reach each of the groups of people depicted in Katsuko Ishigaki's works?
In Ishigaki's drawing works, the artist's free line explodes, causing people to appear, multiply, and form solidarity. The people looking up at something seem to be waiting for a good omen or witnessing something ominous. She embraces all these people just as they are. It appears to be an outpouring of love for the Okinawa-jin, who are repeatedly injured and regenerated.

Okinawa-jin hoped for the reversion of Okinawa to Japan were the realisation of a "peaceful and prosperous Okinawa without bases". In the 50 years since that dream has been cruelly dashed, the generation that has never known US occupation has also borne the scars of the times. However,  there are certainly also stories of Okinawa-jin who have been scarred by harsh geopolitics but have not lost their dreams of regeneration. This may also be the story of East Asian islands like Jeju and Taiwan, which are living through difficult circumstances.

Image 1:  NISHINAGA Reona, 'Don't listen to my talk', Installation, 2022.
Image 2: HAYATO MACHIDA, ‘Akabana’, Acrylic on canvas, 910×727mm, 2022.
Image 3: ENDO Kaori,  ‘Gravity and Rainbow’,  Video 3min., 2021.
Image 4 : NAKAMA Nobue, ‘Wherever I am’,  plant fiber, size variable, 2022.
Image 5: TAIRA Jun, ‘50th anniversary of the reversion of Okinawa to the motherland held at Yoron Island, Kagoshima prefecture’, colour development method print, 254×203mm, 2022.
Image 6: PARK Young Goun, ‘Song of the Islands’, iPad drawing animation 3 min. 2019.
Image 7: ISHIGAKI Katsuko, ‘Looking for Okinawa-jin - Life and Us’, Newspaper insert, tracing paper, oil-based marker, 530×382mm, 2022.
Image 8: Artist talk at the 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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