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13) 내 고향 효돈감귤의 어릴 적 기억들을 떠올려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 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10월이 되어도 낮에는 도무지 더위가 사그라지지 않더니, 오늘은 기온이 뚝 떨어져 이제야 비로소 가을 날씨 같습니다. 가을이 되면 제주에서는 이제 감귤의 계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주의 곳곳을 감귤이 노오랗게 색을 물들이다, 그 색이 터질 듯 지쳐 주황으로 치달으면  바로 영주십경 중 귤림추색(橘林秋色)입니다. 

저는 제주의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 감귤의 주산지 효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지난 편지에서도 효돈 이야기를 많이 했고요. 오늘은 이 감귤의 어릴 적 기억으로 편지를 씁니다. 어쩌면 감귤이야기는 비단 효돈뿐만 아니라 제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 일터입니다. 상황에 따라 귤과 감귤, 그리고 ‘미깡’으로도 혼용해 쓴다는 점 미리 알립니다. 

  대한민국 국민소득 1위 간판이 있던 신효 앞동산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려면 늘 효돈마을 신효 앞동산을 지나야 했습니다. 앞동산은 버스가 서는 차부였고 아직도 있는 큰 돔박낭(동백나무)이 있었습니다. 앞동산에는 신효 상사(리사무소)가 있고 바로 옆이 효돈 초등학교 였으니 효돈마을 신효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언젠가부터 그 앞동산에 간판이 세워졌습니다. 

대한민국 소득1위 마을이라는 간판이 있었던 효돈 마을 신효 앞동산입니다. 간판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던 마을 어른들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간판 자료사진을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사진=강충민
대한민국 소득1위 마을이라는 간판이 있었던 효돈 마을 신효 앞동산입니다. 간판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던 마을 어른들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간판 자료사진을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사진=강충민

내 키와 비슷한 크기에 동그란 봉모양의 기둥에 하얀색으로 된 철로 된 간판에는 새싹모양의 새마을 표시가 있었습니다. 그 새싹 모양위에 “대한민국 국민소득 1위 마을”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명절, 제사 때나 먹던 하얀 곤밥(쌀밥)을 평상시에도 뜨문뜨문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1960년대부터 묘목을 심고 1970년대 중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효돈에서 감귤 대량수확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소득 1위 마을이 되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 기억 속 감귤은 우리 효돈에서 참 고마운 과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요. 

  겨울의 따뜻함이 효돈 감귤이 맛있는 이유

내가 어릴 적 우리 효돈에는 나스미깡낭(하귤나무)이 있는 집이 많았습니다. 나스미깡이라는 이름처럼 일본에서 들여온, 기존의 제주 재래종 귤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금 효돈 감귤 재배 이전에 중요한 귤나무입니다. 이 하귤나무는 무려 126년전, 효돈출신 김부찬 전(前)제주대 로스쿨교수의 증조부 김병호 선생이 1894년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받은 하귤에서 씨앗 세 개를 효돈 신효마을에 심은 것이 시작입니다. 그 후 김 교수의 부친이 감귤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126년된 하귤나무를 그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수명이 다한 듯 여겨, 잘라낸 등걸에서 새로 싹이 돋아나 다시 무성하게 자라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어 참 신비롭습니다. 

효돈 신효마을에는 감귤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감귤박물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26년된 하귤나무가 있습니다. 사진=강충민
효돈 신효마을에는 감귤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감귤박물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26년된 하귤나무가 있습니다. 사진=강충민

우리 효돈이 또 하귤과는 다른, 지금 우리가 까먹는 온주밀감 재배를 제주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효돈 보다 앞서 다른 곳에서 시작했지만 효돈이 감귤주산지가 된 이유는 바로 따뜻한 기후에 있습니다. 추운 기후에 민감한 감귤이 자라기 좋은 따뜻한 기후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효돈입니다. 

어릴 적 제주는 겨울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습니다. 눈이 자주 내렸고 물이 잘 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효돈은 예외였습니다. 설날 세배 드리러 외갓집인 한남리, 태흥리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면 눈을 밟고 걸어 간 적이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길 양 옆으로 낮이 되어도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시다리(지금의 쇠소깍 인근 효례교)를 건너 효돈에 들어서면 놀랍게도 눈이 한 방울도 쌓여 있지 않았습니다. “한라산 줄기 뻗어 월라봉 되고 그 아래 서고 있는…”이라는 효돈초등학교의 가사처럼 월라봉 등선이 효돈마을을 포근이 품안에 감싸 안 듯 찬바람도 막아준다고 어른들은 자주 얘기했습니다. 그 만큼 겨울에 효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제일 따뜻하고, 그런 겨울의 따뜻함이 가장 맛있는 감귤이 탄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미깡직허래 가기, 미깡방학, 파치장시

귤이 처음 대량으로 수확될 시기인 제가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인 1970년대 중반에는 밤에 귤을 지키러 갔습니다. 그걸 “미깡 직헌다”라고 했습니다. 수확을 앞둔 귤밭에 밤에 도둑이 들어 귤을 몽땅 따갔다거나, 귤 도둑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제삿날 저녁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귤밭 지키러 간 날, 귤밭 창고 한 쪽에 이불을 깔고 누우면 바람결에 귤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도둑 같았습니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릴까, 내뱉는 숨도 참아가며 두근거리고 있다가 후레쉬를 들고 귤밭을 한 바퀴 돌고 온 아버지가 창고로 돌아오면 이유 없이 설움이 한 없이 몰려와 큰 소리로 울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귤밭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00년 농특사업저장고’라고 페인트로 적었고, 그곳에서 밤에 귤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귤을 따서 저장하던 창고였습니다. 사진=강충민
귤밭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00년 농특사업저장고’라고 페인트로 적었고, 그곳에서 밤에 귤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귤을 따서 저장하던 창고였습니다. 사진=강충민

귤 수확철이 되면 미깡방학이 있었습니다. 효돈마을 거의 모든 집이 귤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효돈초등학교, 효돈중학교에서는 주말 붙여 금·토·일 이런 식으로 미깡방학을 했습니다. 방학이라도 하루 종일 밭에 있었지만 학교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모처럼 점심때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나 등 푸른 생선을 넣은 국은 참 맛났습니다. 이따금 잡채가 올라오기도 하고 평소와는 다른 반찬들과 음식들이 나무상자를 엎은 그 위에 올려 지면 따스한 가을 햇살과 함께 참 좋았습니다. 밥 먹다가 이따금씩 바람을 막는 방풍림으로 심어진 삼나무 잎이나 열매들이 음식위에 떨어져도 상관없었습니다. 

동네마다 파치장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통할 수 없는 비상품감귤을 파치라고 불렀습니다. 두세 명씩 다니며 사러 다니는 “누게 누게 어멍…” 이라 불리는 아주머니들이었습니다. 긴 줄 저울과 쇠추를 들고 포대기에 귤을 담아 무게를 재고, 파치장시에게 돈을 받으면 쏠쏠한 부수입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거리낌없이 올레를 거쳐 마당으로 들어서 “파치 어수과? 파치 있걸랑 폴아붑서”(파치없어요? 파치 있으면 팔아버리세요) 했습니다. 노지 귤도 귀했던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효돈사람들끼리 서로 절대 서로 하지 않는 자랑 

이제 우리 효돈마을에서 대량으로 감귤수확이 이루어진 지 50년이 넘어갑니다. 50년 전 수확했을 때의 노지감귤의 의미는 지금 많이 사라졌습니다. 감귤 말고도 수많은 과일들이 많이 나와서 소비자가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풍성하게 노지감귤 10kg 한 상자 사면 가족이 둘러앉아 새콤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까먹는 맛은 그 어느 과일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효돈하면 감귤 맛있는 동네, 감귤 많이 하는 동네 합니다. 

효돈의 일상적인 가을 풍경입니다. 효돈마을 안쪽을 조금이라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효돈감귤은 일조량이 많이 달고 과즙이 풍부합니다. 사진=강충민
효돈의 일상적인 가을 풍경입니다. 효돈마을 안쪽을 조금이라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효돈감귤은 일조량이 많이 달고 과즙이 풍부합니다. 사진=강충민

효돈사람들끼리는 절대 불문율처럼 서로 하지 않는 자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감귤이 제일 맛있다” 입니다. 맛있는 감귤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본인 아닌 다른 집 감귤이 맛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다들 감귤 맛을 자신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네 감귤이 제일 맛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효돈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감귤은 수많은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여름 하우스 귤을 시작으로, 노지감귤이 끝나갈 즈음, 만감류인 황금향, 천혜향, 레드향, 한라봉이 서로 다른 향과 과즙, 식감의 맛을 냅니다. 노지감귤이외의 다른 귤들도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맛을 찾느라 수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효돈에 살고 있는 내 가장 친한 친구 김진형만 해도 제일 맛있는 천혜향을 만들어내기 위해 단 하루도 비닐하우스에 나가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한 알 한 알이 진형이의 땀방울임을 알기 때문에 천혜향 받을 때는 차마 쉽게 껍질을 벗기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일 때가 많습니다. 

효돈에서 나오는 감귤브랜드입니다. 효돈의 각 선과장에서 이 상자에 담겨 전국농산물시장으로 나갑니다. 효돈감귤임을 증명하는 표시입니다. 사진=강충민
효돈에서 나오는 감귤브랜드입니다. 효돈의 각 선과장에서 이 상자에 담겨 전국농산물시장으로 나갑니다. 효돈감귤임을 증명하는 표시입니다. 사진=강충민
효돈감귤이 서울 가락농산물시장에서 경매중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소비자의 최종선택을 받습니다. 사진=강충민
효돈감귤이 서울 가락농산물시장에서 경매중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소비자의 최종선택을 받습니다. 사진=강충민

  결론은 제주농산물 애용입니다

편지의 처음을 쓰면서 제 고향 효돈 감귤이야기는, 효돈 감귤자랑 만이 아닌, 그 시절을 같이 공유한 세대들과의 기억을 같이 떠올리기입니다. 또한 앞의 편지 속에는 없었던 귤나무 가지 전정하기, 귤에 종이 씌워서 일사병 막기, 감귤껍질 벗겨 말려서 팔기, 감귤주스 만들기, 감귤잼 만들기 무궁무진한 기억은 다 같이 공유한 감귤에 대한 추억입니다. 
혹여 이 편지의 효돈감귤 자랑에 기분이 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게는 제주도의 고향 농산물 사랑이야기입니다. 언뜻 떠올려 보아도 우도 땅콩, 구좌당근, 대정감자, 애월취나물 등 이 작은 제주도에서 각각의 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주도 농산물사랑과 애용입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한라산에는 눈이 부시도록 활활 불타오르는 단풍이 지천이고, 제주의 들에는 주황빛에 물든 감귤이 익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계절 좋은 일만 있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덧붙이며: 이 편지글을 쓰면서 효돈농협 백성익 조합장님, 강공석 팀장님이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또한 내 가장 친한 친구 김진형이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줬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022년 10월 6일 

강충민 올림


# 강충민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글 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좋은 사람과 얘기나누고, 
제주의 자연을 좋아합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강사,여행사팀장, 향토음식점 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등, 하고 싶은, 좋아하는 다양한 직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최근까지 독서논술교실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제주의 농산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담는 종이박스 제작으로 전환하여 전념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www.jejungo.net )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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