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0)신양리 김임생 어르신 이야기

“나? 13살부터 물질하기 시작했으니까, 게메 이! 몇 년 해샤?”

1942년 김임생 어르신의 해녀 인생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기가 혼란스러웠다. 핸드폰을 꺼내 계산기를 두들기고 나서야 머릿속으로 계산한 숫자가 맞다는 사실에 놀라워 나는 외쳤다.

“67년이요?”
“아이고, 나 경 오래 해져시냐?”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바로 어제도 바다에 다녀오셨다는 어르신은 성산읍 신양리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신양리 밖으로 터전을 옮겨본 적이 없는 현직 해녀이다. 어르신의 기억으론 어렸을 때 본인이 살던 마을의 이름은 고성리였고 ‘방뒤’라고도 불렸다 한다. 그런데 8살 즈음부터 신양리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신양리라고 하면 잘 모르고 고성리라고 해야 안다고 말씀하셨다. 

언뜻 들은 어르신의 말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아는 성산읍 고성리는 근처 마을인데 신양리도 고성리라고? 방뒤, 신양리, 고성리로 불리는 이 동네의 지명 유래가 궁금증에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조선조 말엽인 1894년 어로 행위를 생활의 근간으로 하던 이들이 고성리에서 내려와 움막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신양리의 설촌 유래였다. 이후 1909년 고성리에 둔 조합장이 이 지역의 행정을 관장했고 1915년에는 마을을 정의면 고성리라 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지금의 고성리와 신양리를 각각 고성리1구, 고성리2구로 행정리로 나눴고 이후 1941년 4월 23일부터 신양리로 마을 이름이 개칭되었다. ‘방뒤’라는 이름은 마을 지형이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인 말(斗)과 같이 우묵하게 생겼는데 머리 쪽은 막히고 밑은 터졌다고 방두포(房斗浦)라 했고 마을 사람들은 방뒤라고 했단다.

그러면 설촌 유래 시기부터 계산할 때 마을이 생긴지 128년이 된 신양리에서 81년을 살아오신 어르신의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다.  

“5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지. 어머니네가 어려워나서. 우리 집은 돈벌이도 없고 그때는 존밧(좋은밭) 없으면 서숙밧(조밭)을 못해나서. 지금처럼 비료가 막 있는게 아니라. 곡식이 잘 안돼서. 어머니네는 존밧이 어서서. 많이 고생했주.”

아버지는 선원이었고 어머니는 해녀였던 집의 첫째로 태어난 김임생 어르신은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태어나지는 못했다고 하셨다. 화산회토 성분이 많은 ‘뜬 땅’이 제주 서쪽보다 훨씬 많았던 동쪽은 주식으로 먹었던 차조 농사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좋은 토질의 땅에서만 조 농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서숙은 ‘조’, 즉 차조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어머니가 해녀이시지만 어르신의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상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셨다. 어릴 때 기억에 어머님이 가장 많이 해 오신 해산물이 미역이었고, 아버지도 뱃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어르신 아래로 남동생이 셋 태어났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어르신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단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동생을 등에 업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10살이 되는 해에 등에 물허벅을 졌다. 새벽이 되면 우물에서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 집에 커다란 물항에 채우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밥을 짓는 것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서숙쌀도 많지 않아 쌀의 양을 불리려고 고구마를 크게 썰어 넣어 저녁까지 온 식구가 먹을 밥을 10살 소녀의 손으로 지었다. 낮에는 동생들을 보면서 땔감용 촐(꼴)을 하러 들로 나갔다. 촐은 소도 먹고 불에 땔 용도로도 사용했고 작은 불을 낼 때는 소나무 솔잎도 필요한 터라 동생들과 소나무 솔잎을 손으로 긁어다가 모았다. 동생들이 하나둘씩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어르신은 서운하지 않았다. 네 자녀를 키우려고 저렇게 일만 하시는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학교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당연히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에 잘 다닐 수 있게 손을 보태는 것이 어르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셨다. 

어머니를 따라 13살에는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어르신이 해 온 물건은 미역. 미역을 해 와서 판 돈은 부모님을 드렸다. 부모님과 함께 번 돈으로 큰 동생은 중학교까지, 아래 두 동생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는 데에 보탰다. 

“어머니가 해녀 일을 잘하지 못했던 거 닮아. 어머니는 미역만 해와났거든. 나도 엄마 따라 처음엔 미역을 했주게. 근데 어머니보다 난 물질일은 좀 해 난 거 닮아. 그때는 전복만 돈이 좀 됐지. 15살 즈음 마을 사람에게 밤에 국어랑 암산법을 배운거라. 겅허난 해녀질을 해도 암산으로 계산해서 할 수 이신거.”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보다 물질일이 훨씬 나았던 어르신은 18살에는 마을 언니들과 함께 출가물질도 다녀왔다. 18살에 간 곳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 벗들과 같이 가서 풍선(風船, 바람으로 움직이는 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타고 직접 노를 저으며 물건(미역)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노동의 힘듦은 ‘이어도사나’를 함께 부르며 흥으로 바뀌었고 물건이라고 불렀던 미역을 돌산의 부락(마을)으로 가져와 자꾸미(ザクミ, 作米, 조선 시대에 공물을 쌀로 환산하여 받던 일)로 돈을 벌었다 한다.

그다음 해에도 출가물질을 다녀오면서 돈을 조금씩 벌어왔다. 물허벅 지고 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출가물질을 하며 집안 살림을 보태고 결혼 준비 자금을 준비했던 어르신의 10대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1961년, 20살에는 동네 사람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직후 바로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군 생활을 하는 3년 동안 김임생 어르신은 출가물질을 다녀오면서 돈을 벌었다. 

“(시집 전) 바다에 다니멍 돈 벌 때 집에서 연탄으로 밥 행 먹어서. 보리농사는 어머니 때 좀 하고 서숙(조)도 좀 하고. 거의 조팝(차조밥)을 먹었지. 그때는 쌀밥이 너무 먹고 싶은 음식이라나서. 냉중에(나중에) 곤로로 밥할 때 돼서야 동네 점빵가서 쌀 사왕 보리쌀에다 그 쌀을 조금 넣어서 먹었주. 너넨 곤로 모를 나이지이? 우리 땐 다 겅행 밥 먹었져. 반찬은 뭐가 이서나서? 콩 해그네 된장 다섯말 이만큼 담으민 그게 일년 반찬이라. 그자 밥에 된장만. 또시 멜젓. 이렇게 행 밥에 먹는게 반찬이었주. 아버지가 고깃배를 해나니까 생선을 그나마 좀 먹었던 것 닮아. 그게 끝이라.”

그렇게 1961년에 시집을 간 후 출가물질 3년을 다녀오고 번 돈으로 어르신은 드디어 자신의 이름으로 된 밭을 장만할 수 있었다. 시집가서 큰아이를 낳고는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절대 고생은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친정엄마와 다르게 어르신은 물질일을 꽤 잘하셨다고 한다. 시집가기 전 어머니가 물질했을 때는 전복만 돈이 좀 되는 물건이었고 그다음 값나가는 물건은 미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르신이 시집 간 후에는 성게, 소라, 오분자기, 문어도 돈벌이가 많이 되었고, 그것들이 바다밭에 많기도 해서 물질일이 돈이 되었다고 한다. 

어르신이 출가물질을 다니며 번 돈으로 장만한 800평(2644.6㎡) 땅에 농사를 지었다. 바다일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다에 나가지 않는 날이나 밤에는 농사를 지었다. 낮에 시간이 없으면 밤에라도 가서 고구마를 들여다보고 촐을 해 와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큰아들을 낳고 다음 해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곧 막내아들도 태어났다. 책임져야 하는 식구들이 많을수록 어르신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해에 밭 하나씩을 사며 농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단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고구마하고 유채농사 많이 해서. 고구마는 전분 공장에 팔고, 전분을 갈아서 빼때기(날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말린 것) 볼려서(바람에 말려서) 팔면 그게 전분 공장에 가는 고구마보다 돈을 곱빼기로 줬지. 돈 벌려고 빼때기 할 때는 밭에다가 빼때기 돌리는 기계를 가졍 가. 손으로 기계 돌리면 거기서 고구마가 잘리멍 나와. 그럼 바로 밭에 착착 널어서. 겅행 잘 말려야 돼. 또 바람에 잘 볼려야돼. 냉중에(나중에) 공판하는 사람이 나와서 가맹이(가마)로 등급을 매겨. 1등급에서 3등급을 매기매. 잘못 볼령 썩은 빼때기는 3등급. 잘 말린 빼때기는 1등급. 밭이 빼때기 볼리는데 비라도 오면 식구들 다 나강 빼때기 지켜사돼. 가을 겨울에 겅 빼때기 허멍 겨울 끝나가민 이젠 유채 시작이라. 유채꽃 지고 씨앗 여물민 바싹 말령 발로 막 밟아. 겅행 낭땡이(나무막대기)로 유채 털민 깨끗하게 유채씨가 불려 나오매. 우리 경숙이랑 아들덜이랑 어렸을 때 그 유채 계속 털어서. 내가 유채 긁어오면 애들이 열심히 털어서. 우리 애들 비오면 막 좋아해서. 유채 안털어도 되난. 하하. 그럼 방에 선풍기 틀엉 밤새 그 유채씨 잘 볼리는 거라. 유채도 잘 볼려야 값을 잘 쳐주니까. 그렇게 한 70~80 가맹이하면 유채씨 공판하는 사람이 또 오매. 가맹이를 찔러서 유채씨 보고 등급을 매기는데 대부분 다 1등급 줘났지. 그땐 유채씨도 돈이 좀 되나신디 언젠가부터 돈이 안되는거라. 게난 유채 설러불고(때려치우고) 그때부턴 당근을 했지.”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돈이 되는 물질을 낮에 하기 위해서는 밤에 유채밭에서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단했던 흔적은 어르신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없습니다.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어르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1960년대 시기부터의 제주의 환금작물의 변화상을 알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제주에서는 1차 산업으로 얻어지는 작물을 단순 가공하는 제조업이 흥했었던 사실을 알게 됐다. 농산물로는 고구마 전분공장과 주정 공장, 그리고 유채기름 공장의 원물인 물고구마와 유채를 집중적으로 농사지었다. 물고구마 원물은 고구마 전분 공장으로, 고구마를 썰어 말린 빼때기, 즉 절간 고구마는 주정 공장으로 팔려나갔다. 농민들은 전분 공장으로 가는 고구마보다 주정 공장으로 가는 빼때기를 값을 더 쳐 주었기 때문에 빼때기를 하는 것을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유채도 유채유를 얻기 위한 용도로 키웠다. 이 시기 제주가 고구마 전분과 유채기름의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는 이야기는 이를 입증한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감귤산업이 성장했지만 어르신 집에서는 당근 재배를 하면서 농가소득을 올리셨다. 내가가 인터뷰를 하러 간 날, 신양리의 밭은 푸릇푸릇한 당근잎이 절정이었다. 곧 당근 수확을 본격적으로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인터뷰를 하고 나오며 동네를 보니 당근잎으로 푸른 신양리의 밭이 장관을 이루었다.<br><br>사진=김진경<br>
인터뷰를 하고 나오며 동네를 보니 당근잎으로 푸른 신양리의 밭이 장관을 이루었다.

사진=김진경

그렇게 밤낮으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밭을 조금씩 사셨다고 한다. 빚을 내서라도 밭을 사면 물질을 하며 빚을 갚고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보탰다. 그야말로 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둘째 딸 경숙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살았다. 어르신이 그렇게 산 이유는 딱 하나였다.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고생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밤낮으로 일을 하면 할수록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사무쳤다.

김임생 어르신의 중년 이후는 또 다른 삶이 펼쳐졌다. 출가물질을 다니며 돈을 벌긴 했지만 어르신은 더는 출가물질을 가지 않으셨다. 잠시 물질을 멈춰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다시 물질을 시작하고 현재 67년째 이어온 해녀 생활. 어르신은 올해, 새로운 일도 시작하셨다.

사진=김진경<br>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사진=김진경

“나? 한 85세까지는 물질 하고 싶어.”

에너지 넘치는 선한 표정과 호탕한 웃음을 가지신 김임생 어르신은 지금의 나보다 더 열정이 넘쳐 보였고 기운이 좋아 보였다. 오히려 내가 어르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난 어르신의 인생 후반부도 궁금해졌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