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오래된 불변의 한국정치 방정식 / 이규배 논설위원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죄송한 마음이다. 첫 문장부터 긴 인용이 필요해서이다.

“자식들은 인정머리 없이 늙어가는 부모에게 길러준 은공도 갚지 않을 것이오. 주먹이 곧 정의고, 서로가 서로의 도시를 약탈할 것이오.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나 의롭고 선량한 사람에게는 아무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오. 그들은 오히려 악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자를 존경하게 될 것이오. 정의는 주먹 안에 있고, 염치는 사라질 것이오. 악한 자가 더 나은 사람을 굽은 말로 모함하고, 거짓 맹세로 이를 뒷받침할 것이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하고 무엇이 다르랴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무려2700년 전에 인간사회를 읊은 시(詩)다. 도대체 인간은 이 수 천 년 동안 진화하지도 않고 뭐를 했던 것일까 싶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 시인은 “종국에는 정의가 우세하기 마련이오”라고 노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다음 글은 언제 적 이야기로 들리는가? 

“그들은 시내로 쳐들어가 집과 성전을 약탈하고 노소 불문하고 주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이든 여자든 만나는 족족 죽였고, 짐 나르는 가축과 다른 생명체도 보이는 족족 죽였다. … 그들은 이때 사방이 아비규환이고 온갖 형태의 죽음이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곳에서 가장 큰 학교로 쳐들어가 막 교실에 들어간 아이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 사건들은 몇 십 년 전에 한반도나 제주에서 일어났던 학살도,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단지 데자뷔 때문에 그렇게 비칠 따름일 뿐, 이 글 또한 무려 2400년 전의 기록이다. 현대사의 학살을 생각하면, 인간은 단 한 걸음도 진화한 느낌이 없다.

변하지 않기는 한국의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 한국의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란 것이 권력의 분배를 둘러싼 대립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들은 너무 열심히 ‘다투는’ 정치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이름과 얼굴이 바뀌었을 뿐, 권력을 잡은 자는 쫓고 놓친 자는 쫓기는 술래잡기 시나리오는 예전 그대로다. 따라서 내년을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권이 교체됐던 과거 그 시기의 언론을 들여다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측 가능한 정치라는 면에서는 친절(?)하다. 나쁜 인간이나 정치인들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탓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대통령과 여의도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결코 유쾌하지가 않다. 대다수가 원하는 것은 그런 ‘다투는’ 정치가 아니라, ‘다스리는’ 통치이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위임한 것도 헌법에 명시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다스리는’ 그런 고귀한 통치의 권한이다. 우리의 정치는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소중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모자란 탓이다. 한때 강국의 반열에 올랐던 나라의 정치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통치’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유권자에게 알리기 위한 선거 목적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아닌, 세상을 움직이기 위한 통치론(統治論)이나 경세서(經世書)가 그것이다.

그들은 먼저 자국을 둘러싼 주변국가의 해외정세를 살폈고, 이어서 국내의 폐해와 이를 극복할 개혁문제를 깊이 사색한다. 농업과 공업, 상업을 혁파할 대안을 모색하고, 지식과 기술을 전파하기 위한 교육제도에 부심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제책을 고심한 후에 부국(富國)의 큰 기틀을 수립하여 이를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때로는 군주를 중심으로, 때로는 대통령과 수상을 중심으로 일국의 만민을 수렴할 수 있는 국가의 대지침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국을 ‘다스리는’ 통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선거만을 고민하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인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공론(公論)의 장에서 국민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깊은 고뇌가 담겨있는 만큼, 날선 반론에 대해서도 생존력이 있다. 강국으로 변신할 수 있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다툼’은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다스리는’ 통치의 틀을 둘러싼 충돌이었지, 상대방의 허물을 캐내는 저열한 ‘다툼’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직업으로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정 그런 것이 없을 때에도 그들은 그런 류의 책자를 안주머니에 품고 다녔다. 누군가는 삼권분립을 선언한 <헌법>을, 누군가는 <만국공법>을, 또 누군가는 <사회계약론>을, 혹은 <국부론>이나 <자본론>을 가슴에 품었다. 이 안에도 일국을 경영할 통치론이 담겨 있었던 때문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지만, 그런 세상이 바뀌었을 때는 까닭이 있었다. 그건 세상을 지배하는 이런 ‘다스림’의 통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결코 골방에 앉아있는 천재적인 정치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도 천하의 인재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좋은 직장과 재산을 놔두고 정치에 입지(立志)를 했으면, 이 사회의 집단지성을 꾸릴 수 있는 최소의 조직력과 자금은 있을 것이다. 큰 정치인일수록 이는 더욱 가능할 터이고, 대통령은 더더욱 가능할 일이다.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이유는 한 가지이다. 별로 존중도 받지 못하는 쓸데없는 정치에만 열심인 탓이고, 일국을 다스리는 통치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렇게 부르듯이, 정치가 3류여서 그럴 따름이다.

오래된 LP판의 노래가 무한반복 흐르듯, 참 오래된 불변의 한국정치 방정식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요즘의 정국은 또 다시 우리의 기억회로를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야당탄압’ 대 ‘정당한 수사’라는 여야의 주장은 분명 언제가 봤던 풍경인 탓이다. 대통령도 ‘다스리는’ 통치의 모습은 잘 안 보이고, 오히려 ‘다투는’ 정치에 손을 빌려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의 영향력은 그 어느 정치인보다 크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멈추게 할 수 있는데도 그렇다.

노자 왈,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라 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경고이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치욕스런 현실로 나타난다. 우리의 기억회로는 다음과 같은 과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언젠가 그랬듯이, “대통령은 탈당해 달라”는 여당의 선언 같은 것 말이다. 불과 18개월 남은 제22대 총선, 내년으로 들어서면 어떤 뉴스가 들릴지는 ‘정치’냐 ‘통치’냐, 그 갈림길에서 대통령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 이규배 논설위원·제주4.3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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