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97) 보헤미안의 유럽 여행기

<1> 여행 - 유쾌한 반란, 고통의 축제

2022년 10월 10일, J는 10일간의 일정으로 유럽 여행에 나섰다. 유럽의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4국과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두 나라를 순방하는 여행이다.

여행은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다. 이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J는 기꺼이 반란군이나 혁명군에 가담할 용의가 있다. J는 여행이 삶이라는 전쟁터를 벗어난 도전과 모험의 대장정이요, 구도의 순례임을 안다.

그래서 여행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황홀한 일탈이요,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처럼 여행은 고통의 축제와도 같은 것이다.

보헤미안의 유럽 여행. ⓒ제주의소리 / 사진=장일홍
보헤미안의 유럽 여행. ⓒ제주의소리 / 사진=장일홍

<2> 부다페스트-프라하-비엔나-잘츠부르크

쌍십절에 J는 인천공항을 떠나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부다페스트 출신 아드라스가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우울한 일요일)는 애잔한 선율 때문에 헝가리에서만 157명이 자살했고,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이 음악을 들으며 목숨을 끊었다. 작곡가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놀라운 음악의 힘!)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에서 J는 ‘프라하의 봄’을 상기한다. 역사는 1968년 당시 공산당 제1서기였던 두브체크를 소환한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건설’을 내걸고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소련의 군대와 탱크는 개혁파와 민중을 잔인하게 압살한다. (북한에 두브체크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면? 김정은은 죽었다 깨도 개혁파가 되지 못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노라면 당시 소련의 만행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푸틴은 스탈린과 비견할 만한 잔혹한 학살자다. 신이 있다면 제 명대로 살지는 못할 것이다. (오, 신이여! 우크라이나를 지키소서!)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빈)는 음악의 도시이며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유럽의 구시지가 거의 그렇듯 도시 전체가 중세·근대·현대가 어우러지는 건축물박물관이고 예술품이며 문화재다. 스테판 성당, 쇤부른 궁전, 음악가 묘지 등이 볼거리다.

잘츠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불린다. 1965년에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지다. 대절 버스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여주인공 줄리 앤드류스의 청순한 미모, 빼어난 가창력 덕분에 성공했다고 본다.

<3> 유럽은 무엇인가?

수많은 유럽의 건축물들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고, 자연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러나 궁전·성·대성당 같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 산·강·호수의 아름다운 자연 등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보다 더 위대한 건 유럽인들의 의식세계다.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오랜 역사, 평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가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유럽엔 전통의 향취와 현대의 세련미가 공존한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잘 조화시키는 게 유럽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이러한 융합이 문명의 금자탑, 문화의 최고봉을 이룩한 원동력이다. 공존-조화-융합이 유럽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EU(유럽연합)는 이 같은 유럽 정신의 구현체다. 영국이 6년 새 총리 4명이 낙마한 ‘브렉시트의 저주’를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젠가 영국은 ‘독불장군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EU에 복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유럽 정신의 뿌리에 기독교 사상이 있다. 유럽의 모든 도시 중심부에 성당과 광장이 있다. 이는 대다수가 기독교 국가이고 기독교가 얼마나 강성해 왔는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또한 유럽을 연결하는 매개체는 자연이다. 알프스는 유럽의 지붕이고, 다뉴브(도나우)강은 중부 유럽의 젖줄이다. 이처럼 유럽은 하나의 사상으로 결합하고 몇 개의 자연으로 이어지는 합종연횡의 연합체이다. 유럽인의 동류의식 내지 동질감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보헤미안의 유럽 여행. ⓒ제주의소리 / 사진=장일홍
보헤미안의 유럽 여행. ⓒ제주의소리 / 사진=장일홍

<4> 유럽인, 그들은 누구인가?

세계를 단순도식화하면 전체를 개인보다 중시하는 사회와 개인을 전체보다 중시하는 사회로 나눌 수 있는데, 유럽은 후자에 속한다. (물론 전체가 개인을, 개인이 전체를 위하는 사회가 이상사회다)

유럽인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개인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에토스(기풍)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유럽인들은 남을 의식해서 ‘남 나름대로’ 사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내 나름대로’ 사는 것이다. 이 같은 유럽인의 사고방식, 행동양식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국경 검문소다.

유럽은 영국을 제외하고 전부 육로로 연결되기에 이웃집 드나들 듯 국경을 넘나든다. 국경을 넘을 때 검문관의 성향이 각양각색이다.
①여권을 보지 않고 그냥 통과시키는 자
②검문관이 버스에 올라와서 여권을 확인하는 자
③여행객을 하차시켜서 개인별로 여권을 대조하는 자
④가이드에게 여권을 거둬오도록 해서 일괄 검토하는 자

유럽은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매뉴얼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처럼 통제사회도 아니다.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시스템이 작동하는 자율사회다. 이런 이유로 J는 유럽인을 ‘꼴린 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율성은 다양성과 창의성의 바탕이요, 원천이다.

이 꼴린 대로 사는 사람들 중에 획일성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문학가·음악가·미술가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예술은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상식·규범·관습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유럽인의 기질적 특성은 예술하기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아니할 수 없다.

<5> 여행의 잔해(殘骸)와 잔상(殘像)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구만리 높이까지 나는 붕새처럼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니 몽환적인 장면들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세상을 주유한 J가 붕새였는지, 꿈속의 붕새가 J였는지 도무지 헷갈려서 한참 헤매야 했다.

정녕 내가 본 그것들이 다 허깨비였단 말인가.

인생은 꿈이다. 그러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꿈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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