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1970년 12월1 5일 새벽 1시 25분. 바람이 거세지고 성난 파도가 몰아친다. 갑판 위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밀감 3000상자가 뱃머리 왼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사람살려” 외마디 비명이 쏟아졌다. 사투를 벌이던 사람들은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하나둘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영호는 당시 부산~제주를 잇는 정기 여객선이었다. 남영호는 12월 14일 오후 5시경 제주 서귀항을 출항한 후 성산항에서 승객과 화물을 추가로 싣고 같은 날 밤 8시 10분경 부산을 향했다.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15일 새벽 1시 15분, 전남 여수에서 동남쪽으로 약 52km 떨어진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강풍이 남영호의 선체 오른쪽을 때리더니 갑판 위에 쌓아놓은 감귤 상자가 와르르 무너졌다. 이 순간에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며 남영호는 곧 침몰했다. 

남영호 침몰을 보도한 1970년 12월 15일자 제주신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남영호 침몰을 보도한 1970년 12월 15일자 제주신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남영호는 새벽 바다 속에 326명이라는 억울한 생명을 묻었다. 대한민국의 해상 참사 사망자 수 1위, 전체 재난 사고 중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이어 사망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바로 남영호 참사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참사였다. 당시 남영호는 정원초과는 물론 화물 적재용량을 4배 이상 과적한 상태였다. 예견된 참사였고, 당시 정부는 사고 당시 구조에 나서지도 않았고, 과적‧과승에 대한 선주와 해운국, 경찰 간의 부당거래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는 물론 가해자 수사나 사법 처리도 부실했다. 그저 사태를 무마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런데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데자뷰 같다.  

  여전히 국가는 없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 끔찍한 참사다. 기막힌 비극이다. 납득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안타까운 '참사'에 짧은 생을 마치고 하늘의 별이 되신 156명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찾아온 고통에 황망해 하고 계실 유가족들께도 깊은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또다시 원초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세월호 이후, 우리는 정말 달라지자고 부르짖었고, 달라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현실은 허망할 뿐이다. 자신만 살겠다고 세월호를 버리고 떠난 세월호 선장이나, 백척간두에 선 국민의 생명을 나 몰라라 했던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의 민낯이 지금의 윤석열 정부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냐고 국민은 묻고 있다. 누구도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고 반성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희생자를 사망자로, 참사를 사고로 깎아내리는 등 희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0월 30일 오전 1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에 구급차 및 소방·경찰관들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 위치해 있다. ⓒ 오마이뉴스
지난 10월 30일 오전 1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에 구급차 및 소방·경찰관들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 위치해 있다. ⓒ 오마이뉴스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보호할 의무, 이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주최자가 없는 행사였다’  ‘참사 수준의 사고다’ ‘청와대는 재난 상황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말장난, 책임 회피, 꼬리 자르기, 모두 비겁한 정부의 태도다. 그런데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데자뷰 같다.  

  공기가 다르다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타워이기를 거부한 대통령의 국가, 무수한 젊은이들이 희생됐음에도 자기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국가, 거듭된 참사에도 불구하고 무한의 책임을 져야 할 존재의 이유를 망각한 국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오늘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맨얼굴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 직후 경찰이 가장 먼저 한 일을 떠올려 보자. 참사 수습이나 유가족 지원에 팔을 걷어붙였던가. 부끄럽게도 경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태원 참사가 정권의 안위에 미칠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어제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이태원 참사 사태를 놓고 여전히 정치적 책임을 거부하는 정부의 태도는 물론, 참사의 책임을 따지는 엄중한 자리에서 ‘웃기고 있네’라는 메모로 국민을 대표하는 국감장을 희롱하는 대통령실 수석들의 태도를 지켜봐야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국민들의 고통이다. 

비단 경찰이나 청와대 참모들만의 일이겠는가. 윤석열 정부의 공무원들이 현 정부의 ‘공기’를 이렇게 읽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그 공기가 탁하다. 정화가 필요하다. 환기가 필요하다. 이 풍경 역시 낯설지 않다. 데자뷰 같다. 

그 끝은 촛불을 든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 김봉현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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