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13) 고충석 제주대 명예교수, 前 총장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라는 T.S 엘리엇의 ‘프루프 록의 사랑 노래’에 나오는 시구처럼 훌륭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볍고 하잘것없음을 느낀다. 사진은 박목월(왼쪽), 이은상의 시집 표지. / 사진=알라딘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라는 T.S 엘리엇의 ‘프루프 록의 사랑 노래’에 나오는 시구처럼 훌륭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볍고 하잘것없음을 느낀다. 사진은 박목월(왼쪽), 이은상의 시집 표지. / 사진=알라딘

가을이 깊었다. 

가을의 소리, 가을의 빛깔, 어느 것 하나 서글퍼 보이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인생이나 가을이 깊어가면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까닭 없는 서글픔에 몸을 내맡기곤 한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쓴 시를 가끔 애송하고 나 나름대로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언제부터인가 독자가 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가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인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깊어가는 가을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라고 생각한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이 되었다. 

이별의 노래가 나오게 된 배경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수년 전에 유명을 달리 하신 강통원 교수님에게 들었다. 제주대 영문과 교수였던 시인 강통원 선생님과 나는 15년의 나이 차이를 초월하여 드문드문 만나 소주를 함께 마시곤 했다. 강 교수님은 한 마디로 술맛이 있는 분이었다. 미남에다가 힘 있는 시를 쓰는 멋쟁이 선배 교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강 교수님과의 옛 추억이 더욱 새로워진다. 강 교수님은 술자리에서 “고 선생은 매력 있는 젊은 교수야. 당신은 낭만이 있어”라며 술버릇이 좋지 못한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어느 날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박목월의 사랑의 도피 행각에 관한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 놓으셨다. 목월은 번듯한 가정이 있었고, 한양대 국문과 교수라는 명예까지 버리고 사랑을 좇아 제주에 와서 잠시 지냈다. 목월의 그녀는 명문여대 국문과 4학년이었다. 이들은 당시 제주대학 근처였던 용담동에 살았다. 목월은 제주대에서 가끔 강의도 했는데 영문학과 4학년이었던 강 교수님은 목월의 조교 역할을 자처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목월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때마다 그 여인은 얼굴은 비추지 않고 커피를 타서 찻잔만 문틈으로 들여놓더란다. 

그러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인의 부모가 딸을 찾아 제주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 여인을 태운 배가 제주시 동부두 항구를 떠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목석처럼 서 있던 목월은 배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목월의 그런 모습을 지켜본 강 교수님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데는 목월 부인의 품격도 한 몫 거들었을 거라고 얘기했다. 목월의 부인도 남편을 찾아 제주까지 내려왔었다고 한다. 궁색한 살림으로 남편과 함께 지내는 여인에게 부인은 오히려 힘들지 않으냐며 다정하게 묻고 영감 잘 모시라는 당부와 함께 돈 봉투를 챙겨 주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추운 겨울 따뜻하게 보내라며 겨울옷까지 사서 건네주었다고 한다. 강 교수님은 이러한 목월 부인에 대해 대단한 품격을 가진 분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리고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 여장부이니 목월도 대단한 시인이 될 수 있었고 서울대학교 박동규 교수를 비롯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것 아닌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목월의 친구인 황금찬 선생에 의해서 이러한 서사가 여성 잡지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강 교수님께서 전해준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 목월이 당시 이별의 아픔을 정리하면서 쓴 시가 그 유명한 ‘이별의 노래’다. 그 후 김성태가 곡을 붙이면서 오늘날 온 국민이 가장 애창하는 가곡이 되었다. 나는 이 시 중 3절을 가장 좋아한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은 운명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목월의 불륜은 비판할 수 있어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라고.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이별의 노래’ 가운데

또 하나의 국민가곡 ‘가고파’의 탄생도 노산 이은상 시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노산을 모시고 다녔던 나의 대학 선배 故 안성혁 형의 전언에 의하면, 가고파의 탄생도 노산에게는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노산은 유부녀였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노산의 부인은 한국에 사는 것이 우세스럽다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이 때문에 노산이 활동하던 문인협회에서 제명되는 등 사회적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래서 조국과 고향을 떠나 살수밖에 없었던 유랑의 삶과 연맥되어 잉태된 작품이 가고파라는 것이다.

대학 3학년 때인가, 국민가곡 ‘가고파’ 후편 작곡발표회가 숙명여대에서 있었다. 안성혁 형이 노산께 인사도 드리고 음악회도 구경하라고 하면서 나를 초청해줬다. 덕분에 나는 노산 선생을 직접 뵙고 인사를 올릴 기회가 있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고 풍채가 단단해보였다. 목소리 또한 힘과 분위기가 있었다. 노산의 친동생인 유명한 화학자 이길상 박사는 필자가 다녔던 연세대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교정에서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우라는 노산에 미치지 못했다. 

후편 작곡발표회 때 노산은 처음으로 가고파 전편을 작곡한 김동진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가고파 전편은 김동진 선생이 20대에 작곡한 곡인데 후편은 말년에 쓴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고파 후편은 전편보다 감흥이 좀 떨어졌던 것 같다. 적어도 내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역시 위대한 예술창작은 감수성이 충만한 젊음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조지훈의 ‘승무’도 그의 나이 열아홉 살에 썼다고 한다.

가고파 후편의 노랫말은 내가 느끼기에 전편보다 더 좋은 것 같다. 노산처럼 자신의 감정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우리 문학사에 몇이나 될까? 지금도 시 가고파를 읊으면 인생에 대한 잔잔한 애수가 저녁 붉은 노을처럼 피어오른다. 속절없는 세월 따라 아름답던 유년시절도,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는 애잔함을 느낀다.

여기에 그간 널리 회자되지 않은 가고파 후편을 소개해본다. 

가고파―후편
이은상

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거이랑 달음질치고 
물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가 알아봐도
내 몫 옛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무들 아비 된 사이
인생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이 아까워라. 아까와

일하며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키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 들명 살까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까나
돌아가 알몸으로 깨끗이 깨끗이  

가고파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또 한 가지 일이 있다. 대학 4학년 때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가고파(전편)’를 부른 테너 이인범 선생의 영결식 행사가 연세대 중강당에서 있었다. 내가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인범 선생은 음대 학장으로 계셨다. 여러 번 찾아뵌 적도 있고 해서 진심으로 애도의 마음을 가지고 영결식에 참석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차가 연세대 백양로를 한 바퀴 돌기 시작하자 선생님이 부른 가고파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내 옆에는 유신 체제에 항거하다 옥살이까지 한 신과대학 김찬국 교수님이 계셨다. 나를 많이 아끼시던 김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오늘처럼 실감 나는 적이 없다. 나도 목사로서 수많은 설교를 했는데 나 죽으면 나의 설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하면서 내 등을 두어 번 두들겨 주셨다. 그 후 가고파를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 왔기 때문에’라는 T.S 엘리엇의 ‘프루프 록의 사랑 노래’에 나오는 시구처럼 훌륭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볍고 하잘것없음을 느낀다. 


#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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